'장사의 신' 탄생
우리집은 시골 면소재지 중.고등학교 앞에서 문방구.참고서적.먹을 것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면소재지에서는 가장 큰 가게이기도 하고, 유일한 중.고등학교 앞 종합판매점이나 다름 없었다.
방학때도 버스 회수권(승차권)을 사러 가게에 손님들이 찾아와 문을 두드릴 정도 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창 가게가 잘 될 때는 하루에 수백개의 오뎅, 빵, 호빵, 삶은 계란, 도너츠 등을 팔았다.
면소재지가 아닌 더 깊은 산골에 사는 학생들은 집에 있는 어린 동생들을 위해 하교시 추가로 빵을 구입해 가기도 했다.
이틀에 한번 정도씩 빵공장에서 갓 만들어서 빵봉지에 김이 서려 있는 단팥빵, 샌드위치, 소라빵, 이거야빵 등 갖가지 빵들을 가득 실은 삼립빵 트럭이 학교 운동장 입구에 도착했다.
그때마다 전가족은 빵보다 더 무게가 더 나가는 100여개의 빵상자를 가게로 옮겼다. 가게에 다 두지 못해 집안쪽 복도 양쪽에 쭉 쌓아 놓았다. 밤에 출출할때는 마음내키는 대로 빵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당시 우리집은 라면을 삶아 팔았다. 짧은 점심시간 동안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라면을 먹기 위해 줄을 서기 때문에 라면을 미리 삶아서 건져 놓아야 했다. 라면은 라면 모양이 풀어지지 않는 정도로 삶아 건져서 물기를 제거해 놓는다. 주문이 들어오면 뜨거운 물에 토렴을 하고, 뜨거운 물을 붓고, 스프와 함께 내어 주었다.
하루에 500그릇 정도를 팔기 위해서는 하루 전날밤에 라면 봉지를 까서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놓아야 한다. 50개들이 삼양라면 10박스를 까야 되는데, 그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매일 저녁 반복되는 작업이었는데, 부모님은 하루종일 가게일 하시느라 지쳐서 저녁 8시 정도가 되면 두분 모두 가사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라면 1박스 당 50원씩 받고 '라면 봉지 까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라면을 까다 보면 부스러기 라면을 먹기고 하고, 부스러기가 모이면 삶아서 개밥으로 주기도 했던 것 같다. 어린 형제자매들이 경쟁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듯 10박스 작업이 끝이 나 있었다. 당시에는 노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놀이로 생각되었다.
그때는 내가 국민학교 시절이었는데, 가게가 너무 바쁘니까, 국민학교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마자 집으로 뛰어가 가게를 도와야 했다. 그러다 국민학교 오후 수업 시작 직전 다시 뛰어서 학교로 돌아갔다. 물론 점심은 먹지 못했다. 대신에 빵과 우유를 들고, 학교로 돌아가면서 대충 먹었다.
좋게 말하면 국민학교 때부터 우리가족은 생활전선에서 비지니스 마인드를 익혔고, 나쁘게 말하면 어린 나이에 학업을 등한시 한 채 가사노동에 시달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점심시간 때 가게에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우리형제자매들은 어렸었지만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Helper였다. 당연히 오후 수업시간에는 졸다가 자다가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정신이 돌아올때 쯤은 이미 수업이 끝나 있었다. 당시 '수면 학습법'을 별도로 익히지 않았는데도 자면서도 대충 수업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졌었던 것 같다. 사람이 급하면 안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4학년때까지 4칙 연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 곱셈과 나눗셈은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중에 겨울방학때 어머니 손에 끌려 4칙 연산을 제대로 배웠다.
지금도 분식집이나 집에서 라면을 먹을 때면 당시의 '라면봉지 까기' 아르바이트 장면과 연탄불을 되살리기 위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부엌에서 힘차게 풍로를 돌리던 생각이 난다. 힘들었지만, 재미 있었던 그때 그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