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우리 엄마
요즘처럼 여름에서 가을로 막 넘어가는 시기만 되면 늘 그때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울 엄마가 생각난다.
남쪽 지방의 어느 마을, 없는 살림에 6남매를 키우는 엄마가 있었다. 울 엄마는 17살 때까지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살아오다 얼굴 딱 한번 보고, 아버지와 결혼하여 시골에서 내리 6남매를 낳고 생고생을 하시다가 말년에 살만 하니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벌써 돌아가신 지 15년이나 되었다.
지금도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지 가끔 꿈에 나타나신다. 아무 말씀은 하시지 않고 그저 환하게 웃어주시곤 한다.
그런 울 엄마도 내 기억에는 한때 젊은 시절이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장사하느라 애들 키우랴 정말 정신없이 사셨다. 그런 와중에도 울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셨다. 그중에서도 나에 대한 사랑은 형제자매들조차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6남매 중에서도 유독 나를 아끼셨던 것은 아마 집안에서 제일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도 더하면 더했지 어머니 못지않게 나에 대한 사랑도, 기대도 모두 쾌나 컸다.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입학 후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다. 그때 부모님은 만천하를 가진 듯 정말 기뻐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중. 고등학교 앞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아들의 전교 1등 계기로 답례 차원에서 학교선생님들 체육대회날에 막걸리와 음식을 대접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 학교 운동장 배구코트 옆에 차려진 돼지수육과 막걸리통, 각종 반찬들,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서로 웃으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이쿠 아드님이 전교 1등을 했다지요. 참 좋으시겠어요”
“아! 예, 다 훌륭하신 선생님들 덕분이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지나가며 듣자 하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말기쯤 어머니께서 타고 가시던 버스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우리 집은 중심이 잡히지 않고 어수선했다.
6남매가 모두 학생이고, 어머니는 안 계시고, 누나들이 밥은 대충 했지만, 가게운영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혼자서 집안일과 가게를 하시느라 힘겨워하셨고, 연일 술을 많이 드시곤 했다.
당시 어린 나로서는 큰 충격적 상황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나는 하루아침에 찬밥신세였다. 어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아버지는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시느라 정신이 없었고, 누나들, 형, 동생들은 각자 할 일을 하느라 모두들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 수개월 지속되자, 나는 서서히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공부를 잘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졌다. 그래서 2학년이 되자 성적이 뚝뚝 떨어졌고 내 생활도 엉망이었다.
어머니가 퇴원하고, 서서히 우리 집은 안정을 되찾아 갔다. 아버지도 술을 줄이시면서 거의 어머니 교통사고 전의 상황으로 회복했다.
그런데도, 유일하게 나 혼자 회복하지 못했다. 학교 성적도, 공부 의욕도, 내 얼굴의 웃음기도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퇴원하신 울 엄마는 어느 날 식구들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나를 불렀다. 집안의 희망이자 당신의 기대주인 둘째 아들이 공부도 하지 않고, 반항심만 커져 가자, 참다 참다 직접 부르신 것이다.
울 엄마는 처음에는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나는 그냥 “열심히 공부는 하고 있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라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울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한참을 우시다가 저에게 “미안하다. 그간 못 챙겨줘서 네가 이렇게 되었구나” 말씀하시고 그 후로도 한참을 또 우셨다.
울 엄마의 울음을 처음 본 나는 어머니가 교통사고 난 날 받은 충격보다 훨씬 더 컸고,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울 엄마의 눈물을 보고 난 후로는 울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대학졸업하고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 취직도 했다. 부모님 봉양을 위해 서울 본사 생활을 접고, 지사로 내려갔고, 거기서 결혼도 하고, 자녀를 놓고 지내면서 거의 매주 주말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집사람은 다소 힘들었지만, 항상 시골에 가면 버선발로 대문 앞까지 뛰어나와 나를 반겨주던 울 엄마, 내가 좋아하는 멍게, 곰장어 고추장 조림, 부추전 등 한상 가득 차려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본사로 발령이 나서 가족들과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아들네 집을 한번 보겠다고 해서 식구들과 함께 상경하셨다.
지금도 어머니와 같이 쉬었던 그 휴게소를 지날 때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늦가을 이맘때쯤 날씨가 제법 쌀쌀했고, 거기서 뜨거운 호두과자를 호호 불며 드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혼자 시골집을 지키고 계셨던 울 엄마는 항상 아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 서울에서 내려가 찾아뵈면, “회사일 바쁜데 안 와도 된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는데 뭘 자꾸 오느냐”며 오지 말라고 하셨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내가 어머니 곁에 있을 때는 어머니 얼굴이 봄꽃처럼 환했다. 도착 직후에만 “왜 왔냐고”하고는 내가 떠날 때까지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고, 시종 좋아하는 표정이셨다.
그런 울 엄마는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늘 그 자리에 계셨던 울 엄마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찾고 있는 그 자리와 울 엄마는 언젠가부터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늘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늘 보고 싶어진다.
“어머니 잘 계시지요? 어머니께서 애지중지하던 둘째 아들도 이제 60이 다 되어 갑니다. 中 늙은이가 다 되었네요. 어머니에게는 늙은 아들도 여전히 귀엽겠지요? 울 엄마 늘 사랑하고,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추석 때 예쁜 꽃 사들고 식구들과 두 분 계신 곳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