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또 사라졌다

첫 번째 이야기

by 희봄

다음 정거장은 영등포구청역, 영등포구청역입니다.

해가 저물고, 밤샘 작업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붙들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영등포 신세계 백화점 불빛이 번쩍거리고, 술집과 상가의 네온사인들이 형형색색으로 반짝였다. 그 사이 골목마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부재중 전화가 떠올랐다.


- 뚜뚜뚜뚜—고객님이 전화받지 않아…


그녀가 연락을 받지 않은 지 일주일째였다. 자식이 이렇게 무심해도 되나 싶어 전화를 걸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공연히 걱정하는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찜찜한 마음이 목 안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지만, 애써 뽑아내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에 안위했지만, 한편으론 예전처럼 고의로 내 전화를 외면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자라났다.

오래전 만화 가게를 할 때도 그랬다. 가게 한쪽에 낸 작은 방에서 다섯 식구가 붙어 자던 시절이었다. 방문을 열면 책을 읽던 손님과 눈이 마주쳤고, 화장실과 샤워실조차 손님들과 함께 써야 하는 프라이버시라곤 1도 없는 공간이었다. 생활과 영업이 구분되지 않은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는 늘 친절한 말투와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억눌렀던 인내심이 폭발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 너 학원 안 가고 어디 갔어?

- 그 친구들한테 전화하지 말랬지~


사춘기의 질풍을 한껏 삼킨 나에게, 그녀는 늘 질문과 경고를 반복했다. 대꾸하지 않으면 맹수처럼 포효했고 그 모습을 본 손님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그녀는 속살을 들킨 것처럼 몹시 부끄러워했다.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었다. 계산대에 있는 공중전화를 붙잡고 친구와 수다에 빠져있을 때였다. 손님들이 책을 읽고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학교 이야기, 영화 이야기, 좋아하는 배우까지 줄줄이 쏟아냈다. 재밌는 대화가 꼬리를 물면 끊을 타이밍을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 그만 끊어.


처음엔 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그녀는 주방에서 다듬던 긴 파를 들고 와 마치 사무라이의 칼처럼 나에게 휘둘렀다.


- 엄마가 그만하라고 했어? 안 했어!

놀라서 전화를 끊었는데, 책을 읽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꿰뚫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나는 어디라도 숨고 싶어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곧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손님들 앞에서 유난스럽게 혼날 문제인가 싶어 억울했다. 말로 타이를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잘 웃는 둥근 사람이었는데, 왜 항상 내 앞에선 뾰족한 사람이었을까?


- 언니, 엄마가 집 나갔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동생들이 다급하게 방문 밖에 상황을 알렸다. 그녀가 활화산처럼 폭발한 뒤, 차가운 밤거리로 열을 식히러 나가버렸다. 맞은 것도, 혼난 것도 난데 왜 엄마가 집을 나갔지? 혹시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걸까? 집에서 벗어날 빌미만 찾고 있는데 내가 걸려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이유야 어쨌든 보호자가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오지 않으니 불안했다. 문밖으로 나가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주방에서 밥 짓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더라도 먹이를 물어 돌아오는 어미 새처럼, 아기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그녀가 돌아왔다. 그 후로도 그녀는 나와 부딪칠 때마다 사라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잠시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자는 어른스러운 대처일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두려웠다. 내가 더 아픈 것 같은데, 아프다고 말할 기회조차 뺏긴 기분이 들었다. 우리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다. 해결되지 못한 날 선 감정들이 공기 중에 흩어져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어떤 서운한 감정으로 사라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얼마 후 동생이 그 이유를 전해왔다.


- 엄마가 언니가 아빠 편만 든다고 서운했대.


그제야 그녀와의 통화 내용을 떠올랐다. 엄마가 외출하면 아빠 밥은 누가 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고 아픈 아빠만 챙기라고 강요한 내 말에 실망했단다. 항상 내가 한 말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였다. 엄마와 내 사이가 살얼음판이다 보니 동생들은 알아서 눈치를 살피면서 컸다. 민감한 말은 삼키고, 착한 딸답게 항상 엄마의 기분을 살폈다. 무심한 첫째 딸에게 서운했던 그녀는 이번에도 화를 삭이기 위해 사라졌다가 시간이 지난 뒤 돌아왔다.

왜 늘 사라짐으로 마음을 표현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늘 기다리는 쪽이었을까. 그 점이 분했던 것 같다. 딸의 미숙한 마음을 품어주지 못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고, 상황을 알면서도 전하지 않은 동생들마저 야속했다. 이렇게 그녀와 난 늘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얼음판 위에서 발끝으로 서 있었다. “왜 그랬어?” 그 짧은 말이 가장 어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사이에 벽은 높고 더 단단해졌다. 그녀가 모르는 새 실금들이 곳곳에 생겨났고 서서히 갈라지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허물어놓듯, 모녀 관계도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