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노약자다

by 희봄

지난여름, 가족여행으로 필리핀 보홀로 향했어요. 어쩌다 보니 초등학생 아들과 엄마, 노약자 둘을 데리고 가는 보호자가 됐었죠. 여권을 챙기고, 짐 부치고, 공항에서 가이드를 찾고, 이동을 안내하는 일까지 모든 것은 나의 몫이었어요.

우리는 늦은 밤에서야 숙소에 도착했어요. 아침 일정을 위해 자야 했지만, 노약자 둘을 제대로 챙길 수 있을지 걱정이 몰려왔죠.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운 채, 정신도 못 차리고 아침 일찍 바다로 향했어요. 셋 다 스노클링은 처음이었지만 엄마와 아이는 들떠 있었어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도전하시니 대단하세요.

얼굴이 말간 여자와 덩치 좋은 젊은 남자가 엄마를 칭찬했어요.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도전하는 여성’이 된 그녀는 상기돼 보였어요.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예전에 친구들과 라오스에서 다이빙하고 집라인을 탔던 경험을 늘어놓기 시작하셨죠. 그사이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한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내 손을 잡아당겼어요. 곧 우리 차례인데 화장실을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애매했어요. 망설이며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다른 관광객들과 동행인 것처럼 섞여 있었어요.

하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어요. 남편이 함께 왔더라면 아이를 잘 챙겼을 텐데,

남편의 빈자리가 엄마가 채워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내 바람과 달랐어요. 결국 신경질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급히 볼일을 마치고 스노클링 장소로 뛰어가니, 그녀가 부둣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죠. 외국인 가이드가 다급하게 우리를 불렀어요. 다 함께 대형 튜브를 붙잡고 물안경을 쓴 채 바닷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발밑으로 정어리 떼가 유유히 지나가다가 회오리처럼 현란하게 춤추며 빛을 냈어요. 그 황홀한 광경도 잠깐, 나는 물에 뜨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입안 가득 짠맛만 삼키고 있었어요. 숨이 가쁜 그 순간에도 아이의 안전이 제일 먼저 떠올랐죠. 아이의 자리를 빼앗지 않으려 몸을 웅크린 채 바둥거렸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달랐어요.

잠깐만, 잠깐만

물속에 몸을 담근 상태에서, 그녀는 갈급한 목소리로 외쳤죠. 그러더니 튜브를 혼자 독차지한 채 온몸으로 감싸 안았어요. 나와 그녀 사이에 있던 아이는 튜브를 붙잡을 공간이 없어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나는 몸을 비틀며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튜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 순간,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든 모질고 끈질기게 버텨온 그녀의 삶처럼, 그녀는 정말 생명줄을 붙들 듯 튜브를 독차지하고 안고 있었어요. 그래. 그렇게 버텨냈기에 나도, 동생들도, 아빠도 살 수 있었죠. 하지만 그런 억센 생존력이 미워질 때가 있었어요. 우리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외국인 가이드는 정말 즐겁다는 듯 웃으며 물속으로 들어가 물방울로 구름빵까지 만들어 보여줬어요. 아이는 손을 흔들며 즐거워했고, 나는 한참을 발버둥 치다가 겨우 물 밖으로 나왔죠.

할머니 때문에 힘들었지. 네가 자리도 없어서 힘들었을 거야.

그녀는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이에게 사과했어요. 엄마 역시 나처럼, 아이가 마음에 걸렸던 거예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바다 위에서 우리 셋이 하나의 튜브에 매달린 채 떠 있었던 순간, 의도치 않게 엄마의 ‘살아내려는 본능’을 마주했어요.

마사지는 어떻게 하실까요? 세 사람이 같이 쓸 수 있는 방이 없어서 한 명은 떨어져야 해요.

제가 아이가 함께 받을게요.

어떻게 할 거냐는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아이를 선택했죠. 그 대답을 듣고 오히려 가이드는 그녀의 눈치를 봤어요.

어머니, 혼자 쓰셔도 괜찮으세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죠. 다 큰 어른이 혼자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요? 마치 내가 모질게 결정을 내린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가이드의 태도에 잠시 당황했어요. 나는 그저 ‘아이와 함께’라고 말했을 뿐인데, 누구나 저처럼 선택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이가 함께 마사지를 받고, 나 혼자 방을 쓸 수도 있었네요. 그땐 그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여행 내내 아이를 먼저 챙겼고, 그녀도 아이를 챙겨주길 기대했어요. 나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엄마가, 이제는 내 아이에게도 희생해 주길 당연하게 바라는 뻔뻔한 마음이 있었죠.

도윤아, 할머니 가방에 신기한 거 많은데, 뭐 먹을래?

공항에서 엄마는 가방에서 흰 봉지에 싸둔 사탕 꾸러미를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어요. 여행 내내 아이 생각하며 사탕을 챙겨 왔던 모양이에요. 여행에 지쳐있던 아이는 반색하며 좋아했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그 사탕으로 버텼어요. 알록달록한 사탕 포장지들이 공항 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어요. 사탕이 없었다면

그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요.

여행에서 돌아온 뒤,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어요.

언니, 엄마가 여행이 재밌었다고 좋아하던데,

아빠도 없고, 돌볼 사람도 없이 가서 너무 좋았나 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에서는 환자들을, 집에서는 아빠를 돌보며 늘 힘들기만 했던 사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는 사실이 기뻤죠.

내가 기대했던 엄마의 모습은 한없이 포용적이고,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나도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어요. 그런 다정함은 잠시 스쳐 갈 뿐이고, 엄마라고 해서 언제나 사랑이 가득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모습에서 그녀는 조금 비켜나 있었고, 나 역시 그녀가 기대했던 딸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자라났다. 그래서 이제는, 튜브를 힘껏 끌어안았던 그녀를 원망하고 싶지 않아요. 그 절박한 본능 덕분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저는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기만을 바라며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어미 새의 날개깃이 빠져 더 이상 높이 날지 못하게 되어도, 여전히 그 곁에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죠. 어떤 위험 속에서도 독하게 버텨내며 모든 것을 해냈던 엄마의 강한 생명력을 당연한 힘으로만 여겼던 것 같아요.

잊지 말아야죠.

내가 지켜줘야 할 그녀는 이제, 노약자라는 걸.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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