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사장과 친절한 그녀

페인트 현장에서 만난 그녀, 꿈을 이루다

by ClaireH

첫 현장을 다녀오고 나니, 타일보다 페인트 현장도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두 가지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이번엔 페인트 현장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는 ‘화이트 카드’를 따야 했다. 대부분의 페인트 광고에는 화이트 카드가 필수라고 적혀 있었기에, 자격증을 취득하고서야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날 마주한 사장님은 마치 야생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덥수룩한 수염에 묶은 머리, 거칠고 무뚝뚝한 이미지. 말수는 적고 담배만 연이어 피워대는, 딱 임꺽정 같은 사람이었다. 직원 수도 많았고, 두 팀으로 나눠 운영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각자 맡은 일이 척척 맞아 돌아갔다. 나는 다른 직원의 가르침을 받으며 페인트 밑작업을 배웠다. 꼼꼼함이 중요한 과정이라 긴장하며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며칠 후, 드디어 사장님이 내 손에 붓을 쥐여주었다.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붓 사이즈 고르는 법, 페인트를 붓는 법, 잡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만 연습 삼아 벽 한쪽을 맡겨주었다. 붓을 처음 잡았던 그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현장에는 여자 직원들이 꽤 있었다. 그중 한 분이 내 옆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붓 끝만 보면 돼요.”


하얗고 마른 체형의 젊은 여성이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쁠 얼굴이었고, 친절한 목소리로 자기만의 팁까지 알려주었다. 현장에서는 보통 “이렇게요”라는 말이 전부였는데, 그녀는 달랐다. 자세히, 세세하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알고 보니 이웃사촌이었고, 그 덕에 자주 같은 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사장님 말로는 ‘둘이 그나마 덜 투덜댄다’는 이유였다. 그녀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그러다 다른 현장에서 또 다른 여자 직원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낡은 쇠문을 샌딩 하는 중이었는데,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요?”를 반복했다.


결국 지친 그녀는 꼼수를 부리듯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 사장이 들이닥쳤다.


“뭐 하는 거야!!!”


제대로 샌딩 하지 않으면 금세 페인트가 벗겨진다고 호통을 쳤다.


“몇 날 며칠이 걸려도 하라면 해야지! 그럴 거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


그녀는 결국 짐을 챙기고 비가 내리는 현장을 떠나버렸다. 야속하게도 그날따라 비까지 내렸다. 나는 우산을 쓰고 혼자 남아 쓸쓸히 샌딩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페인트 일도 손에 익었지만, 그 팀에서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던 그녀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폴댄스 학원을 차리는 것이 목표라며, 열심히 벌고 아끼고 모아 결국 그 꿈을 이루고 떠났다. 목표를 정하고 그대로 실천해 낸 사람을 나는 처음 봤다. 부럽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그녀는 아껴두었던 붓과 현장용 겨울 재킷, 장갑을 내게 선물로 주며 “그동안 좋은 인연이었다”라고 인사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어디선가 그녀의 꿈이 잘 이뤄졌기를 바란다.


나도 그때만큼은 꽤 열심히 했던 페인터였다. 그녀만큼 실력이 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버금가게 노력했다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