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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립 Mar 04. 2022

헤어짐이 날 키우는 게 싫어서

바깥은 여름 (김애란)

헤어짐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다. 죽음, 멸종, 연인과의 이별, 기억 속 과거와의 단절, 꿈꾸며 기대했던 미래의 침잠. 수많은 헤어짐 앞에서 우리는 예상했던, 혹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을 수없이 느낀다. 모든 헤어짐이 슬프거나 허망한 것만은 아니며, 모든 헤어짐에 충격을 받거나 화를 내지도 않는다. 헤어짐은 어쩌면 우리의 삶에, 더 나아가서는 한 집단과 사회에, 이 세계에 스며들어 누구든 당연히 한 번은 겪어야 하는 현상으로 자리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떤 존재 혹은 관계, 현상의 소멸이 나에게 성장의 발판이 된다는 말을 싫어한다.


그럴 수 있다면 하지 않는 게 좋은 경험 중 하나가 헤어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은 헤어짐을 경험해 왔고, 모든 헤어짐이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헤어짐을 통해 배웠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으나, 반항적인 마음으로 돌이켜보면 그 헤어짐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익힐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떤 허무한 종착이 나를 조금이나마 어른으로 만들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당시 내가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겨내기 위한 나의 자위였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은 다양한 헤어짐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슬프거나 공허하게 여겨질 수 있는 헤어짐 속에서, 그 주체의 이기심과 욕망이 얼마나 자글자글하게 끓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 내 욕심을 채우더라도 네가 당장 떠나지 않을 거라는,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기대. 그 두려운 상황을 내가 만들지 않고 싶다는 욕심.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그로 인한 결과에 내 책임은 없다고 내지르는 외침. 끊어져버린 줄을 애써 외면하려는 무표정. 그 모든 게 나에게도 내재되어 있으니 난 그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 여전히 스며들지 못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허망과 슬픔과 자조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부정하거나 숨기지 않았을 때, 그저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을 때에서야 내뱉을 수 있는 어떤 말들. 그리고 그 탈출과 몇 문장의 언어가 나를 구해줄 수 있다는 사실.


2, 3년 전 이 소설집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생각하지 못 했던 것들을 이번에 다시 읽으며 느끼게 되었을 때 그 간격을 떠올린다. 그 사이에 경험한 헤어짐과 훨씬 더 전에 경험했지만 기억할 수 없었던 (혹은 기억하지 않았던) 헤어짐을 상기한다. 헤어짐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 배움을 포기하겠지만, 결국 그 배움의 길을 따라갈 것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씩 인정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p.16)


�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p.18)


� 그러곤 속으로 ‘오늘은 아내가 일어나는 날이구나, 이제 막 일어서려는 참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은 내게도 영우에게도 중요한 날이라고. (p.32)


�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p.50)


�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p.98~99)


�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p.115)


�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p.158)


�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p.173)


�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p.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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