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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Mar 27. 2024

[생활 일기] 불운한데 불운하지만은 않은

지난 11월이었나, 그쯤부터 시작된 불운은 주변 사람들이 '삼재'나 '액땜' 등의 말을 내뱉게 했다. 어쩌면 이런 말들은 지금까지도 잘 살아남았는지, 그만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불운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위로에 대해 나 역시 '귀신에 씌인 듯 하다'며 오래된 말로 받아치기 시작한 것은 스미싱이라고 분류되는 보이스피싱을 당하면서부터였다. 보이스피싱 받고, 발가락 골절 받고, 손목 골절까지 이어진 지난한 반 년이 이제야 겨우 잊혀져간다. 훗, 내가 참 운이 없긴 없었군!


'해외 결재 어쩌구 저쩌구'하는 스팸문자는 전혀 새롭지 않았다. 수 년간 그런 문자를 받았지만 개념치 않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날은 그 문자가 '너 해외결재 잘못했단다.'라는 개인적인 문자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다른사람들에게는 수도 없이 링크를 클릭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정작 제 손은 막지 못했다니! 정말 귀신에 씌이지 않고서야 내 손가락이 그럴 리가 없다! 심지어 일이 종료되고 나중에 문자를 확인하니더 기가 막혔다. 클릭한 링크의 문자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소비자원'도 아니고 '한국소비자'에게 문의하라는 걸 왜 눌렀단 말인가! 아, 자존심 상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점심도 거른 채 전화통에 매달린 나를 구원해준 것은 동료들이었다. 처음엔 농담으로 '보이스피싱 아니야?'묻는 말에 웃으며 대꾸했는데 얘기를 들을수록 지금 내가 당하는 것이 바로 보이스피싱이라는 게 명확했다. 와! 내가? 원격조정앱인 팀뷰어까지 깔고 보안앱들이 다 삭제되어진 참이었다. 내 입으로 내 개인정보와 계좌 잔액을 술술 불고난 뒤였다. 결국 경찰도 오고 금감원과 통화하며 다행히 내 계좌에는 피해가 없고, 불행 중 다행으로 계좌 비밀번호나 신분증은 알려주지 않은 터라 추후 피해도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순순히 말을 잘 듣는 나를 '다 된 밥'으로 안 범죄자들에게 나란 사람은 중요한 사항은 나중에 물어도 알려줄 것 같았던 모양이다. 난 다 된 밥이 아니었다구! 그래도 찝찝하여 근 2일주일간을 휴대폰 공장초기화, 계좌 정리 카드 재발급 등으로 후유증을 앓았다.


한달 쯤 지나자 스스로를 소재 삼아 농담을 할 경지에 이르렀는데 이번엔 냉동 고기가 발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쳐도 이렇게 찐생활형 이유로 다치다니! 왜 갑자기 아침밥을 정성스레 차려주는 엄마의 역할을 하려고 했던가? 그냥 하던대로 떡국이나 먹일걸. 그 순간 제일 먼저 든 깨달음은 요즘 냉장고의 냉동실이 아래쪽에 있는 이유였다. 유레카! 앎은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것이구나! 발가락이 아팠지만 평소 순발력 하나는 뛰어났던 터라 잘 비껴갔다고 생각했고, 고기의 덩이가 크지 않아 그저 타박상이려니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큰 아들과 다정한 홍대 나들이도 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고 발을 보니 피멍이 확연한 선을 그리며 나 있었다. 심상치 않아 야간 응급진료병원에 가니 엑스레이로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나의 통증과 증상으로 골절을 진단받았다. 추후 정형외과에서 다시 미세골절을 진단 받고 절뚝거리며 출퇴근을 했다. 깁스를 하기엔 골절이 너무 작고 애매한 위치였기 때문에 그저 사용을 삼가하는 방향으로 한 달여를 한쪽 발을 쓰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부러지지 않은 게 어디냐 위안을 삼았지만 발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골반의 틀어짐까지 가져와 꽤나 불편했다.


연말에 액땜을 해서 그런가 새해가 들어 리셋된 모양이다. 1월에만 지독한 감기를 두 번이나 앓았다. 남들은 그것도 액땜이라고 하더라만 도대체 액땜은 얼마나 길게 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한계를 나에게 시험하는 건가 싶었는데 진짜 액땜은 감기가 나을 무렵인 1월 17일에 일어났다. 갑작스런 폭설에 땅이 꽁꽁 얼어붙은 그날, 많은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빙판길 낙상을 겪었다는 그날, 나 역시 미끄러지고 말았다. 손을 짚기는 했지만 몇 년 전에 벌러덩 자빠졌을 때와는 달리 살짝만 짚었을 뿐이라 골절은 생각도 못했다. 그저 또 타박상이겠거니, 발이 아니니 다니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며 신나게 놀러다녔다. 영덕 대게도 가위로 다 잘라가며....손목아, 미안하다.


아무래도 낫지 않아 병원에 가서 CT까지 찍어보니 역시 또 미세골절. 발가락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손목까지 금이 가서 온 나를 의사선생님도 참 딱하게 보셨다. 하지만 통증은 발가락에 미치지 못했기에 전보다는 좀더 허용적(?)으로 손목을 보호한 것 같다. 아프지 않다고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책정리를 신 나게 했고 그 대가로 손목의 금은 더 벌어지고 말았다. 이젠 정말 손을 꽁꽁 묶어놔야지 했는데, 이게 의외로 편하더라. 한 번 경고를 받은 내 손목은 집안에서 강력한 보호 대상이 되었기에 집안일을 일절 안 할 수 있었다. 손을 못 쓰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다는 불편과는 별도로 몸이 편해졌다. 하지만 발가락과 손목 중에 더 중요한 건 뭘까, 이런 비교까지 할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두 신체 부위의 중요성을 느낀 날들이기도 했다. 발가락이 나으면 상체 위주의 운동을 해야지 했는데 손목까지 이래서 운동만 점점 멀어져갔다. 그럴듯한 핑계, 나이스!


손목의 깁스를 푼 것이 3월 초. 근 한 달은 업무량 과다로 손목 학대에 가깝게 손목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행히 큰 무리는 없다. 시큰시큰거리던 발가락도 최근엔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물론 그 사이 갑상선호르몬 수치 이상이라는 복병을 만났지만 일단 재검까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려고 한다. 질병이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니까. 하지만 보이스피싱이나 골절 문제는 내가 조심하면 피할 수도 있었던 문제라 스스로에게 좀 짜증이 많이 났었다. 그래도 보이스피싱에 걸렸지만 현금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고, 손발 모두 골절 진단을 받았지만 금이 간 정도에서 끝났으니 불운했지만 또 행운도 있었다는 생각도 했다. 주변에 보이스피싱에 걸려 은행까지 가서 통장을 개설하는 정도의 예도 적지 않았고, 병원에 가니 치료사 분들도 손목에 금이 갔다고 같이 진료를 받고 계시는 모습에서 어쩌면 이 불운은 불운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사건이라고, 어쩌다 일어난 사고라고 말이다.


1년 중 가장 바쁜 3월이 지나가고 이제는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들고 동료를 찾아가 '요즘 많이 힘드냐'고 물어볼 여유까지 생겼다. 그간 '꾸준한 글쓰기는....'으로 시작하는 알림에 반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시간도 생겼다. 이렇게 나의 불운했던 반 년의 시간은 한 편의 에피소드로 쌓아두고 내일부터는 다시 그 이전의 나로 회복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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