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살 나이부터
신승훈의 팬이었다
지금은 누구의 팬도 아니고 가요도 잘 듣지 않는다
그래도 누가 물으면 신승훈의 팬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 묻지 않으면
나는 누구의 팬인가
신승훈의 팬이 맞나
한때 신승훈의 팬이었지만 그전엔 조정현의 팬이었고 그전엔 변진섭의 팬이었지 않나
그래도 신승훈의 팬이었던 기간이 가장 기니까
누가 물으면 신승훈의 팬이라고 하자, 그렇게
혼자 결심한 대답은 아니었을까
누가 묻지 않으면 오랫동안 나는 누구의 팬이었을까
국민학생 때부터였다
밤비내리는 영동교는 아니었고 신사동 그사람이 좋았다
학창시절엔 신승훈을 좋아한 게 틀림없다 사춘기 소녀가 좋아하기에 주현미는 부끄러웠다
사춘기가 한참 지나도 신승훈의 앨범을 샀지만 노래방에 가서는 주현미의 노래를 불렀다
간드러지는 주현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 양 두 귀를 속이면서
그러나 두 귀 이상은 속이지 못하면서
변진섭 조정현 신승훈의 시기를 지나 끈적끈적한 목소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토니블랙스턴이나 란이나 린이나 거미 목소리를 내 귀에 쑤셔넣으며 따라 불렀다
혼자 있을 때만 불렀다 내 귀는 속일 수 있어도 남의 귀는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식에선 주현미를 불렀다 러브레터라는 노래가 듣기에도 부르기에도 좋았다 몇몇 귀는 간혹 속았다
그래도 주현미의 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거미의 팬이라고 답했다
마흔이 넘어 주현미가 정용화의 어느 멋진 날을 부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건은 사건이다
목격자 수백명의 얼굴이 박힌 화면에 둘러싸여 긴장한 채로 화면을 응시하는 하얀 드레스의 주현미는 하얀 드레스를 부여잡고 환하게 웃는 마를린먼로보다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건 반하는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거구나! 아름다운 주현미가 어느 멋진 날을 부른다 아름다운 주현미가 어느 멋진 날을 주현미처럼 부른다 아름다운 주현미가 어느 멋진 날을 끈적끈적하고 간드러지게 부른다 끈적끈적하면서도 간드러질 수 있다는 걸 주현미를 통해 알았다 거미도 심수봉도 못하는 걸 주현미는 부른다 이건 무슨 장르지? 리듬앤트로트? 그날밤 주현미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긴장하며 화면을 응시하던 주현미를 떠올렸다 전주가 나오고 마이크를 들고 나서야 긴장을 놓은 주현미를 떠올렸다 주현미가 부른 어느 멋진 날을 떠올렸다 모든 게 주현미였던 어느 멋진 풍경을 떠올렸다
학창시절 누구를 가장 좋아했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신승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주 오랫동안 주현미를 좋아했다 주현미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주현미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어 주현미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오랫동안 주현미를 좋아했다고 국민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좋아한 사람은 주현미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