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글을 쓰던 우리들
대부분의 작가들이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드러낸 것과 달리 나는 학창 시절 글로 수상은 커녕 참가도 해 본 기억이 없다. 예쁜 글씨 쓰기 대회나 수학 경시 대회는 나가봤지만. 내가 글로 칭찬을 들은 것은, 실연의 아픔을 견디고자 등록한 대학원 수강 과정에서였다. 그때, 내가 쓴 동화평을 읽으신 깐깐한 교수님은 내 글을 동료 교수님더러 읽어보라고 건네주셨을 정도로 좋게 평가해주셨다. 학회에 가는 버스 안에서 또다른 교수님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가 왜 대학원에 합격했을까요?" 여쭈니 "글이 좋았어. 비문이 적었어. 글까지 가르치면 힘들어."라고 말씀해주셨다. 지금도 비문이 많으니 그말이 쉬이 납득이 가지 않지만, 그 말이 참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느꼈다. '내가 글로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가면 비공식적으로는 인정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 혼자 일기장에 시를 쓰곤 했고, 그 시에 내가 가장 먼저 취했다. 중학교 때에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즉석에서 시를 쓰면 아이들이 좋아하고 재밌어 했다. 파리를 때려잡고도 시를 쓰니 시심이 넘치는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컴퓨터교육과라는 전공명에 비해 국어과 강의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석사는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배울 때의 즐거움이란. 교수님처럼 동화평론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시를 썼던 것 같다. 더 이상은 내 시를 읽고 박수쳐 줄 친구도 없었고, 나 혼자 쓰고 나 혼자 취하는 시 말이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려 시합평 모임을 들어갔다. 세상에, 나만 빼고 과거에 합평 한 자락씩은 하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중 세 명이 현재 시인이다. 그런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시를 나누다니! 처음엔 초등학생 수준의 시를 쓰는 나를 그저 귀여워해주던 사람들이었고, 그 우쭈쭈 덕분에 마음껏 나는 시를 썼다. 시작이 미약하여 발전도 컸기에 마지막엔 계간지에 공모도 했고, 어쨌든 짧게 언급이나마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인이 되는 길은 아무래도 사유의 깊이가 모자라는 듯 해서 시를 사랑하는 독자로 살기로 했다. 그때, 우리의 시를 이끌어주던 김산 시인에게는 고마움을 느낀다. 어떻게든 모자란 나를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 그 마음을 알고 있다. 함께 시를 썼으나 넘사벽이었던 박은정 시인을 사랑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녀를 닮은 시를 쓴다. 좋은 시인을 발굴하여 책을 출판하는 일까지 하는 그녀가 정말 대단하다. 심지어 그녀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흠 잡을 데 없다. 한인준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눈웃음이 매력적인 그가 등단했다는 소식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그가 요즘 시를 쓰지 않는 건 너무 속상하다. 그의 안위조차 알 수 없어 속상함을 전할 길도 없다. 경수와 동호도 그립다. 시심으로 치자면 나는 그들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한다. 각자의 삶을 살아갈 그들을 응원한다.
시를 다시 쓴 것은 김언 시인의 시창작 수업에서였다. 시인이 내어주는 과제에 맞게 한 주를 숙성시켜 시를 써갔다. 시인은 내 시를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씀 하나로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브런치의 매거진 [시적인 글 사적인 시]에 남아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주문 제작형 작가(?)인 모양이다. 일단 관심 가는 곳이 많아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해 그 매거진에 글을 남기지 못한 지 오래다. 하지만 시란, 대상을 오래 관찰해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최근의 내 생활이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다. 시는 내게 늘 한 구석 방을 차지하는 장르이다. 김언 시인의 수업 시간의 평가는 대학원 시절 교수님들의 말씀들처럼 인정의 욕구를 채워줬다.
시를 다시 쓰기 몇 년 전엔 도서관에서 책쓰기 수업을 받았다. 숨쉬는 책공장의 김경미 대표가 열 명 남짓의 수강생의 글이 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수강생들과 더불어 의견 나누는 수업이었다. 원고가 이미 있는 사람들만이 수강할 수 있는 모임이라 나는 그 1년 전에 쓴 중드 에세이들을 들고 갔다. 독특한 주제였다는 평가였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읽으려 하지 않기에 상품이 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나 역시 그 의견에 공감했다. 투고를 2군데 했었는데 쓴 맛을 봤던 원고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글들을 브런치에 올렸다. 그것이 브런치북인 [중드 취향입니다]였다. 책으로 나오지 못할 원고라면 이렇게라도 누구에게든 읽히고 싶다는 욕구였을 것이다. 그 이후의 중드 관련 글들은 역시 브런치의 매거진 [뭐든 일기] 안에 <중드 일기>라는 머리말을 달고 쓰고 있다. 그 글이 포르체 출판사의 편집자의 눈에 띄어 지금의 [중드 보다 중국사]가 되었다. 그래서 책이 나오고 나니 이때 같이 공부한 예비 작가분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일부는 나처럼 그때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루고히 님과 강라헬 님이 그러한데, 지금껏 꾸준히 글을 올리는 분은 강라헬 님 뿐이다. 꾸준하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브런치 알림을 받을 때마다 느끼는데 그래서 강 라헬 님이 존경스럽다. 연화지 님의 글은 당시 우리 중 가장 반응이 좋았는데, 지금까지 글을 쓰시는지 궁금하다. 다 그 시절에는 댓글로라도 소통을 했었는데 소식이 끊어져 아쉽다.
책을 냈지만 내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홍보가 부족한 게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사와 건강 등)에서는 이 최소한의 변화가 다행스럽기도 하다. 책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일은 즐겁다. 중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쉬이 읽힌다고 하고, 중드를 좋아하는 분들은 배워간다고 한다. 둘다 모르는 사람은 어렵다고 한다. 쉽게 쓴다고 썼는데 그건 내 한계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까. 내가 시인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없는 일은 없는 일이니까. 중드 관련해서는 기고를 요청받기도 했다. 소소하지만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난 역시 주문 제작형이다.
대단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있다. 비록 온라인에 올리는 글은 횡설수설할 수는 있지만 그 또한 일상의 내 모습이리라. 책을 내고 나서 내가 글을 쓰는 과정에 함께 있었던 지기들이 생각이 자주 난다. 특히 시를 같이 썼던 '악몽' 동인들과 해공 도서관의 글쓰기 모임 멤버들 말이다. 아, 잊을 뻔 했네? 나와 함께 독서일기를 쓴 큰 아들과 그 글들을 책으로 엮어준 바람길 출판사도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지금 쓰는 모든 글들이 언젠가의 결과물에 크고 작은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