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사고를 수습하는데 며칠을 보냈다. 만병의 원인은 스트레스라더니. 속으로 삭힌 화는 몸의 이상 신호로 고개를 쳐들었다. 꼬박 열흘을 앓고 나니 체력은 회복되지 않았고 미각이 돌아오지 않아 일상이 지루해졌다. 목숨처럼 붙들고 가던 모든 루틴도 망가져 버렸다.
규칙적인 운동 습관을 비롯해 새벽 공부, 엄마, 아내로서 수행하던 모든 일상이 남김없이 흔들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건 여행에 꺼져버린 내 마음이었다. 항공료는 물론이고 미리 잡았던 숙소 3곳 중 2곳은 돈을 날렸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여행이 더 이상 달갑지 않았다. 누구는 돈으로 때울 수 있는 사고라서 다행이라 했고 남편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냐며 잊으라 했지만 좀처럼 꼬인 심사가 풀리지 않았다. 몸과 마음은 이렇다 할지라도 급한 불만 껐을 뿐 현장에서의 수습은 어찌할지, 숙제가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원더우먼이 사라졌다
‘아! 오늘은 진짜 예약해야 하는데…. 호텔 예약, 바투루산 투어, 또 뭐가 있었지?’
여전히 천근만근인 몸뚱어리로 침대에 누워 해결할 목록들을 정리해 보지만 생각과 달리 무거운 몸을 어쩔 도리가 없다. 또다시 약 기운 때문에 눈이 감겼다. 하루 이틀이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새로 신청한 여권이 나오면 해결하자며 마음을 비웠다. 일상의 복귀도 조금씩 시도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우리가 머무를 곳을 찾아보며 가보고 싶은 곳은 따로 메모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가족의 발리 여행을 이대로 망칠 수는 없었다.
드디어 나왔다. 반짝 빛을 내며 남색 커버로 바뀐 전자여권! 5일 후면 정말 떠날 수 있다. 미뤄놨던 일들을 서둘러 마무리한 후 일찌감치 챙겨 놓은 가방은 현관 앞에 두었다.
영하 15도. 이번 겨울 가장 추웠던 그날, 우리는 따뜻한 나라 발리로 출발했다. 인천공항은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티켓을 받고 5개로 늘어버린 짐을 부치고 나니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기분 좋은 백색소음에 흥분한 나와 달리 잠이 덜 깬 아이들은 남편의 아재개그에 어이없다는 듯 억지웃음을 날려주었다.
습한 공기와 숨 막히는 열기! ‘웰컴투 발리’의 환영 문구가 지금 내가 어디에 도착했는지 알려주었다. 인천공항에서 전자 세관신고서만 작성하고 비자는 인도네시아 공항에서 받기 위해 따로 줄을 섰다. 까다로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비자 발급은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굳이 인터넷으로 신청할 필요 없이 QR코드로 확인하는 세관신고서만 잘 작성하면 활짝 웃으며 “Have a nice day!”를 연발하는 직원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발리로 입성할 수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마주할 때
우리의 첫 여행지 우붓! 발리는 섬의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섬 내륙의 우붓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다. 푸른 논밭의 전경과 정글처럼 우거진 깊은 숲. 평화롭고 한적한 분위기와 마주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바다는 전혀 아쉽지 않다.
매일 아침 바람과 새소리를 벗 삼아 우붓에서 보내는 시간은 깊은 충만함으로 기억에 남았고 고즈넉한 곳에서 함께하는 요가는 몸의 움직임, 명상, 호흡 등의 수련을 통해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힘을 주었다. 오늘은 모처럼 우붓의 액티비티를 즐기기 위해 해발 1717미터 높이의 활화산인 바투르산으로 환상적인 일출 투어를 예약했다. 사륜구동 지프를 타고 일출 포인트까지 가는 투어도 있었지만, 나는 지프와 트래킹을 함께 하는 상품으로 예약했다. 50분 정도 깔딱고개 수준의 산을 오르니 이른 새벽, 잠이 덜 깬 아이들은 울기 일보 직전이다. 가이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르지 못했을 정도로 험준한 산이었다. 만약 작정하고 온 트래킹이 아니라면 지프 투어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가성비 좋은 우붓의 파라다이스, 크레타야 우붓은 알라스 하룸이라고 부른다. 한국 돈으로 4500원의 입장료를 내면 곳곳이 인생샷 천국이다. 발리 스윙은 물론이고 계단식 논밭 트갈라랑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수영장은 오직 성인들만 이용할 수 있으니 가족 동반 여행객은 알고 있으면 나처럼 당황하지 않을 유익한 정보다.
나는 일상의 긴장감이 누적되어 몸과 마음에 이상 신호가 왔을 때,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떠나온 이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며 서로의 에너지를 나누었다. 적당한 긴장감을 동반하며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발리에서는 매일매일 모든 경험이 신비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