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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방앗간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 하시게요?

기계에서 납작하게 잘라져 내려오는 쑥절편을 손으로 내려받아 물에 담그며 여사장님이 물었다.

"고추 빻으려구요."

그녀의 표정이 단박에 달라졌다. "거기 놓고 기다리세요."



방앗간에선 명절 무렵과 이렇게 쑥떡 철인 오월엔 고추 빻으러 오는 손님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는 무안해져서 묻지도 않는 대답을 하며 네모로 된 큰 나무 탁자에 고추 봉지를 놓고 앉았다. "어제 고추 건조기를 열어보니 작년에 마지막으로 따서 건조시킨 고추가 그대로 있더라구요. 그래서 얼른 담아서 가져왔네요."


탁자 한 옆에 믹스 커피와 종이컵, 커피스푼, 전기 폿트가 있다. 기다리는 동안 마시라는 사장님의 배려가 미안함의 끝에서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장은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떡에 집중하고 있다. 그 옆에서 손님인 듯한 두 여인이 서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내려오는 이 떡이 자기네 거라고 했다.


나이 드니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져서 좋다. 처음 만난 사람도 늘 만나오던 사람들처럼 스스럼 없이 대하게 되니까.

나도 그들을 보며 웃었다.


우리의 음식 재료, 특히 쑥에 관심이 많은 나는 그녀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쑥 뜯느라 힘드셨겠네요, 어디서 뜯었어요, 요즘은 얼마나 좋아요 쑥을 뜯어 냉동실에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면 되잖아요, 쌀 한 말에 쑥이 몇 킬로 들어가면 적당한가요.

두 여인은 밭 주변에서 틈틈이 뜯었단다. 조금씩 뜯어 모아 힘든 줄은 몰랐단다. 쌀 한 말에 쑥이 얼마나 들어가야 적당한지는 자기들도 몰라 대충 가져왔단다.



말은 조심한다 해도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모녀 사이인가 봐요?" 내가 물었다. 조금 뒤편에 서있던 젊은 여인이 눈을 꿈뻑 난감해하며 아아니 자기가 동생이라고 조그만 소리로 입을 크게 해 말했다. 조금 앞 쪽에 서있던 나이 든 여인은 그 질문을 자주 받았던 듯 나의 질문에도 동생이 하는 대답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 자매도 나의 큰언니와 나만큼이나 나이차가 많은 모양이다.


여사장님은 물에서 건진 절편을 스텐 다라에 옮겼다. 참기름을 뿌리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절편을 뒤적였다.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떡이 이만큼의 양이면 쌀이 몇 킬로 들어가는지 물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직사각형으로 납작한 두 개의 종이 상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이 두 상자에 딱 맞게 들어가는데 쌀이 팔 킬로 한 말이라고 했다.

사장님은 떡을 두 상자에 나눠 담으며 쑥이 더 들어갔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

동생 여인이 집 냉동실에 쑥을 많이 남겨두고 왔는데 더 가져올 걸, 아쉬워했다. 집에 남아있는 쑥 가지고 한 번 더 와야겠다고, 다음엔 쑥개떡 거리로 빻아야겠단다.

동생 여인이 상자에 담긴 떡 한 개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언니 여인이 한 개만 주면 정 없다고 하나 더 드리라고 말했다. 동생여인이 하나를 더 집어 내 손에 쥐려고 해, 보이는 일회용 비닐장갑을 얼른 빼서 끼고 받았다.



누가 맡기고 갔을까.

저쪽에서 남자 사장님이 등을 보이고 씻어 놓은 쌀과 데쳐서 꼭 짜놓은 쑥을 함께 방아에 넣고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쪽으로 가서 구경했다.

쌀이 쑥과 섞여 초록으로 색칠을 하고 기계 비탈을 내려와 바닥에 놓인 플라스틱 다라에 소복이 앉기 시작했다. 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정겹다.


여닫이 문이 열렸다. 중년 부부가 들어온다. 여자의 손엔 씻어 물을 빼고 담은 쌀솥이, 남자의 손엔 얼린 쑥을 담은 다라가 들려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바닥에 급히 내려놓고 허리를 폈다.

어머어머어머 하며 두 자매는 떡을 입에 넣고 그리로 쫓아갔다. 나도 한 손에 떡을 든 채 어머어머 하며 그들을 따라 쫓아갔다.

세상에나 이 많은 쑥 뜯느라 고생하셨네, 삶은 게 이 정도면 엄청 많은 양이네요, 아니 그래 이 많은 쑥을 누가 다 뜯었대요? 우리 셋은 마구 놀라며 돌아가는 방아 소리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배 나온 남자가 자기가 다 뜯었다고 큰 소리로 자랑했고 여자는 정말이라고 이이가 다 뜯었다며 웃었다.



남사장이 초록쌀을 내리던 방아가 끝이 났다. 조용해졌다.


여사장이 내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고추 봉지를 열어 고추 방아에 넣었다. 고추 방아가 돌아갔다. 그녀는 막대기로 기계 위에서 덜덜 떨며 조금씩 내려가고 있는 고추가 내려가며 잘 부서지도록 헤쳐주었다.


빨간 가루가 되어 내려온 고춧가루를 봉지에 담으며 그녀가 말했다. 올해 고추는 추수 끝난 가을에 바로 가져와서 빻아가라고.

나는 올핸 마지막으로 말린 고추도 잊지 말고 꼭 같이 챙겨서 가져와 빻아야겠다고 말했다.



여사장은 자기가 우선 해야 할 일을 끝내자 잠시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믹스커피를 타서 탁자에 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쑥 삶을 때 어떻게 삶아야 초록 색깔이 그대로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신 커피 컵을 내려놓고 벽에 걸린 선반으로 가서 식소다 봉지를 집어 내려 보여주었다.

물 한 다라가 팔팔 끓을 때 이 식소다 오십 그램을 넣고 쑥을 넣으라고 했다. 오십 그램 씩 포장된 이 식소다는 마트에 가면 다 있단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또 냉동실 문을 열고 삶아 얼린 쑥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것 좀 봐요 이파리만 보이지요? 대는 없지요?

쑥 대는 따지 말고 윗부분만 똑똑 따서 삶으라 했다. 쑥 대는 삶아 빻아도 떡 속에서 그대로 돌아다녀 먹기 불편하단다.

쌀 팔 킬로 한 말에 삶은 쑥 3-4킬로가 적당한 비율이라고 말했다.

나는 휴대폰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나는 또 사장님은 쑥이 많이 필요할 텐데 그 많은 쑥을 어디서 뜯어오는지 물었다. 그녀네 쑥밭이 따로 있단다. 인부들에게 일당 주고 뜯는단다. 나도 일당 받고 그곳에서 쑥을 뜯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춧가루 봉지를 들고 일어섰다. 동생 여인이 다음에 또 만나요 했다. 나는 네 대답했다.

나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들을 또 만나 쑥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


여기선 꽤 먼 동네에 살고 있다는 그들 자매와 내가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살아보니 삶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떡 철이어도 고추를 빻아야 되는 상황이면 가지고 가서 사장님한테 싫은 소리 한 번 듣고 빻으면 될 것이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가며 배우면 될 것이다.

스승은 도처에 있고 평화는 내 안에 있으니까.


평화에 색깔이 있다면 쑥과 쌀이 섞여 가루로 빻아져 내려온 색깔일 것이다.

평화에 소리가 있다면 쑥쌀방아 돌아가는 소리일 것이다.



쑥 뜯는 철이 좀 늦었으려나?

편 소나무 밭 그늘로 가면 연한 쑥이 아직은 꽤 있을 것이다.


윗 부문만 똑똑 따서 방앗간 사장님이 일러준 대로 나도 해볼 요량이다.


식소다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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