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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

by 개울건너

늙은 호박 네 개를 로컬마트에 내기로 했다.

내일 새벽미사 다녀오는 길에 매장에 내려면 지금 밤이 늦었어도 차에 실어놔야 한다.

텃밭 앞 농로가 온통 파헤쳐져 있어 차가 들어오질 못해 호박을 저 멀리에 주차해 둔 곳까지 들고 가야 한다.

호박 한 개는 배낭에 넣어 등에 지고, 한 개는 가방에 넣어 어깨에 멨다. 한 손엔 플래시를 들었다.

남편은 손아귀에 들어올 수 있도록 꼭지를 길게 자른 두 개의 호박꼭지를 양손으로 잡아들었다.


사방이 깜깜하다.

플래시로 길을 비추는 내가 앞장서 걸었고 남편은 뒤에서 걸었다.



밭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옆집 밭길을 걸어 개집을 지나서 살짝 비탈진 풀밭을 내려갔다. 길이 아닌 풀밭은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어있다.

나는 남편에게 몸을 자주 돌리며 여기 땅이 솟아있으니, 그릇이 엎어져있으니,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일러줬다.



왼쪽으로 돌아서 겨울엔 눈꽃이, 봄부터 가을까진 기생화초 초롱꽃 다알리아 매발톱꽃 등 각종 꽃으로 가득한 양 선생 네 밭으로 올라서 오른쪽으로 꺾어 돌았다.

어깨 가방이 무거워 나는 그쪽 어깨를 자주 으쓱했다.


드디어 나온 평평한 흙길을 걸었다.

어휴 힘들다고 쉬어가자며 그가 호박을 내려놓고 어느 농막 앞 벤치에 앉았다. 나도 어깨 가방과 배낭을 내리고 그곳에 앉았다.


좁은 도로에 차들이 가끔 지나갔다.




지난날 그가 앞장서 안내한 내 삶의 밤길은 비교적 안전했다.




우리는 일어나 호박을 지고 메고 잡고 다시 걸었다.

그가 호박 한 개를 길바닥에 내려놓으며 또 쉬어가자고 했다.

나는 뒤돌아 호박을 내려놓고 비어있는 그의 한 손에 플래시를 건네주었다.

그의 어깨에 밖에 닿지 않는 작은 키의 나는 그가 내려놓은 호박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좁은 찻길을 뛰어 건너며 말했다. “다 왔잖어, 얼른 와요.”



언제부터인지 내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보다 커지고 있다. 나는 그보다 자꾸 앞장서 걷는다.



그가 일어나 나를 따라서 길을 건넜다. 주차된 차 뒤로 가서 트렁크 문을 열고 그가 말했다. “여기 놔? 아님 뒷좌석에 놔?”

차에 호박 놓는 위치까지도 결정권이 나에게 넘어오고 있다.




밭에 쑥 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언제 자기 몰래 쑥 뿌리를 온통 땅 속에 묻어놨나, 밭을 그예 이렇게 쑥대밭을 만들어놨다고 허리에 한 손 짚고 호통치던 그때 그의 높던 기개를 나는 다시 당하고 싶다.


세월이 빠르다.


우리는 지금 침묵조차 연민으로 채워지는 시간 속에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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