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understand

by 개울건너

봄과 겨울 송년회로,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OB 모임이 있다.

76년도 봄에 성당 청년 성가대 입단으로 인연이 된 선후배, 동기들 모임이다.


50년 세월의 무게를 어찌 가볍다 하겠는가.


세상을 떠난 이가 여럿이다. 암으로, 자다가 홀연히, 지병으로, 그리고 스스로..


시간은 산 자의 편이라, 살아있는 이들끼리 만나고 있다.


수녀원으로, 이민으로, 결혼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서, 해외로 유학 갔다가 눌러앉아서..

간간이 소식만 듣고 있는 그들 역시 함께 하지 못함은 아쉽다.




가족 중에 더 가까이 지내는 형제가 있듯 성가대에 들어가서 주로 청바지 차림에 잠자리 안경이 매력 있고 활발하던 한 살 위 글라라 선배와 가까이 지냈다.

그녀는 알토 파트를 맡고 있었다.

소프라노 파트였던 나는 어느 날 주일 미사와 성가 연습을 끝내고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엘 가게 됐다.

옥수동 좁은 골목길을 걸어올라 조금 비탈진 길 왼쪽에 있는 하늘색 나무대문 집, 시멘트 계단 세 개를 올라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좁은 마당은 기울어있었다.

작고 허술한 주택에 가득했던 학문의 향기.

왼쪽으로 쪽마루가 있고 그것과 붙어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그 방으로 들어가니 벽에 붙어있는 책장엔 책이 가득했다.

나는 문화충격을 받았다.


밖에서 보기엔 번듯한 주택이었으나 안에선 메말라 버석거리는 정서의 우리 집 분위기와는 달랐으니까.

작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엽서에 눈이 갔다. 그녀의 친구가 보낸 엽서였다.

거기에 적힌 문장에 공감이 갔다. 나처럼 스물, 스물한 살에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었으므로.

나는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 엽서에 적힌 글을 필사했다.



딸 셋 중 막내인 그녀는 집에서도 활달했다.

집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그녀의 작은 언니는 키가 아주 작았고 말이 없었고 머리는 단발이었다. 그녀가 그 작은 언니에게 큰 소리로 핀잔을 줘도 그분은 별로 관심 없어하며 책을 읽거나 자기 일에 열중했다.

남동생도 있다고 했는데 내가 갔을 땐 그 동생은 없어서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고, 자식들의 진로를 잘 안내해 준단다.

어머니는 목소리가 작은 선량한 주부였다.

윤기 없이 부스스한 머리와 차림은 궁핍해 보였지만 어머니에게서 어떤 공간이 보여 그것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녀의 활달함과 작은 언니의 무던한 집중력은 어머니의 그런 여백이 제공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의 큰언니는 우리와 같이 성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큰언니는 자기가 벌어 힘겹게 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 중이었다.

나는 작은 방 책장에 있던 타고르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그 책을 책장에 도로 꽂지 않고 빌렸다. 상봉동 우리 집에서 여러 번 읽었다.

다음에 갖다 주면서 또 다른 책을 빌렸다.


가을날 그녀가 음악 감상실에 가자고 했다.

주 1회 정기적으로 교수의 해설과 함께 한다는 충무로 음악 감상실에서, 들어도 모르겠는 클래식을, 교수의 해설을 맨 뒷좌석에 앉아 졸면서 들었다.

해설과 음악은 그대로 녹음 돼 그 주 일요일 기독교 라디오방송을 통해 전파를 탄단다.


그곳을 나와서 명동성당 앞 언덕길을 오르며 내가 말했다.

“이렇게 저물녘이면 난 가슴이 무너지듯이 아파.”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지?”


조금 더 걷다가 내리막길에서 그녀가 영어 간판을 올려다보더니 어깨 가방에서 작은 영한사전을 꺼내 펼치고 그 단어를 찾아보았다.

나도 그 무렵 그녀처럼 영한사전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며 모르는 단어가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찾아보았는데 그녀도 그렇게 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나도 간판을 올려다보며 가방에서 사전을 꺼내 그 영어 간판의 뜻을 찾아보았다.


그 주 일요일 나는 부엌에다 라디오를 놓고 CBS 방송을 틀었다.

연탄불에 밥을 했다.

10시가 되자 그날 음악실에서 녹음했던 그 음악과 해설이 나오긴 했는데 해설하는 교수의 소리도 음악도 멀리 들렸다. 답답했다.

볼륨을 높여도 소리의 크기는 그대로였다.

아마 그 당시 녹음 환경이 좋지 않았던 게 원인인 듯하다.


어느 겨울날엔 명동 한복판 길에서 파는 공갈빵을 사서 같이 먹으며 정말 빵이 이름처럼 안에 아무것도 없네 하며 웃었다.

그녀를 따라 그녀의 동창이 타이피스트로 근무하고 있는 북창동 어느 사무실에 같이 가서 그녀 친구와 같이 퇴근하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 하는 곳은 어디나 새로웠다.


다음 해 그녀의 그 작은언니가 활동 중인 영어 서클에 같이 구경 가보자고 했다.

작은 언니가 어두컴컴한 큰방 쪽마루 아래에 있는 연탄아궁이에 그릇을 올려놓고 김치 넣어서 볶아준 밥을 셋이 같이 먹고 따라나섰다.

작은언니는 경기여고를 나와 서울 농대에 재학 중이었다.

현재의 관악구 서울대 근처였는지 어느 작은 강의실에서 영어로 발표하는 서울대 학생들을 나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꽤 뒷자리에 앉아 음 음 하며 듣는 작은언니의 소리에서 선배의 여유 있는 품이 느껴졌다.

거기서 작은언니가 꽤 선배인 듯했다.

유창한 영어로 발표했던 남학생들이 언니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정중했다.



귀가하는 지하철에서 글라라 선배가 말했다. 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안의 자연이 음악을 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활동 중인 가수 이수만 김창완이 그곳 출신인 데는 이유가 있다더라고.

그 말을 들으며 사유로 이끌어 밖으로 분출시킬 수 있는 그곳의 자연환경을 상상했다.


그녀는 텔렉스 학원에 다니며 자격증을 취득해 그 계통으로 취업하면서 성가대에서 외엔 자주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러다가 그녀는 성가대를 떠났고 아주 가끔 그녀를 시내에서 만났다.


나는 그녀를 자주 못 만나는 시간의 공간에서 박완서를, 박시정을 알아갔다.


박시정이 쓴 단편 <고국에서 온 남자>를 읽었다.

미국에서 어린 딸을 두고 사는 한국인 여인이 유학 온 대학생과 사랑하다가 남자가 결혼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 걸 나중에 알게 되는 내용이었다.

둘이서 식사할 때 그녀의 식사량을 보고 “새처럼 조금 드시는군요.” 남자가 했던 말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자전적 소설이겠거니, 그때 미국에서 살던 작가 박시정의 새처럼 작을 것 같은 체구를 상상하며 나도 밥을 조금만 먹고 싶었으니까.



처음은 언제나 설렌다.

그 해 겨울에 성가대에 동갑의 친구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 겨울, 우리는 새로운 친구가 된 서로를 알아가느라, 까르르 웃느라 분주했다. 서로의 집도 부지런히 방문했다.

연말 즈음에 어느 날 내가 무심코 G-Clefs가 부른 ‘I understand’를 흥얼거렸다. 고등학교 때 인기 많았던 젊은 지리 선생님이 수업 중에 불러 좋아하게 된 노래다.

한 친구가 잔잔히 백 코러스를 넣었다. 나는 눈으로 깜짝 놀라며 노래를 이어갔고, 다른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렇게 그 노래는 우리들의 지정곡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이 노래를 성가대원 모두가 자주 불렀다.


부친이 돈이 많고 동네 유지인 선배를 따라가 술집 '이화'에서 우리들은 선배가 사주는 맥주를 가끔 마셨다. 선배가 맥주를 유리잔에 따라주며 맥주는 잔을 기울이고 잔 벽쪽으로 살살 따라야 거품이 안 생긴다고 일러주었다.


성가 연습 중 흑인영가는 거룩한 희열으로 나를 천상으로 부유하게 했다.



어느 날 저녁에 무슨 행사가 있어 음식을 장만했다.

성당 지하에서 접시에 음식을 담아 긴 탁자 위에 죽 놓으며 며칠 전에 대마초 사건으로 투옥된 가수들의 이야기를 하며 우리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때부터 윤형주 김세환 채은옥 등의 노래는 들을 수 없었고 대마초 사건에서 제외된 송창식의 노래는 라디오로 TV로 가열 차게 방송되었다.

대마초 파동으로 대마초에 연루된 가수들이 사라지고 최헌 조경수(조승우 아버지)가 노래 '오동잎' '돌려줄 수 없나요'로 히트 치며 연말 십 대 가수가 되었다.

송창식은 연말 가수왕 상을 받았다.

성가 연습을 끝내고 밤에 다 같이 귀가하던 중에 한 동기가 장발로 잡혀 끌려갔다. 우리는 놀라 어머 어머 하며 그가 들어간 경찰서 입구에서 놀라 쳐다보다가 집으로 왔다

그날 밤 그는 경찰서에서 자고 다음날 나왔다는 이야기를 다음 주 성가 연습에 가서 만나 들었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새로 온 지휘자가 말했다. 지금은 김민기가 자기 이름을 내놓지 못하고 가명으로 노래를 작곡하고 있다고. 가명이 ‘김영아’라고 했던가.


우리는 가끔 I understand를 노래했다.


그때마다 늘 그 친구가 곱게 코러스를 맡았다.


평일 저녁에 성가연습이 끝나고 다방에 가서 차를 마셨다. 우리는 모여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다방에서 나오는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들으며 나 지금 이렇게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건가? 틈틈이 불안했다. 커피를 홀짝였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눈빛이 그윽한, 그러나 가느다란 허리로 유연하게 춤도 잘 추는 친구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날이다. 그날 아침에 I understand에 백코러스를 담당하는 친구와 함께 수녀원에 가는 친구의 집에 들어갔다. 그녀는 떠날 준비를 끝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같이 가지고 나와서 우리는 옥수동 도로가에 있는 사진관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수녀원 들어가기 전 사회에서는 마지막 사진이 될 친구를 위해서.

명동성당 뒤에 있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원장수녀님과 함께 2층 도서실로 올라갔다.

독서를 하던 앳된 수녀님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더니 바로 환영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반주도 없이 즉석에서 화음을 넣어 부르는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 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환영가를 듣던 그때의 느낌은 글로 표현이 어렵다.

천국 문이 열리자 여기저기 모여있는 천사들이 단체로 일어나 환영해 주는 합창이라고 할까.

그녀의 어머니와도 함께 우리 넷은 그 자리에 서서 표현할 길 없는 뻐근함으로 환영가를 듣고 있었다.

수녀원에 입회하는 친구가 안경 너머로 그윽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를 수녀원에 두고 나와서 찻집에 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수녀원에 가라고.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던 코러스 친구도 대답이 없었다.



조세희 오정희 소설을 읽으며 그 작가들을 알아갔다.


한 선배가 또 수녀원에 들어갔다.



나는 취업을 했다.


강남이 ‘영동’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은마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고, 허허벌판 삼성동에 드문드문 주택이 지어지고 있었다.

삼성동 단아한 단층 건물에 두 개의 분양 사무실이 있었는데 나는 한쪽 사무실에서 미스 박으로 불리며 일을 했다.

사무실 청소를 하고 땅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타주고, 등기소 등에 무슨 서류인가를 가져가고 그곳에서 가져오는 심부름도 했다.

스물여덟 살인 젊은 사장의 세 명의 이모들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근처 빈 땅에 집을 짓고 다른 곳에 땅을 사는 복부인들이었다. 그녀들에게 무슨 서류를 갖다 주고 오라는 사장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그곳에 손님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른 체하고 커피를 타서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사장에게 이 주위의 땅 시세를 묻고 사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갔다.


치아가 하얗고 표정이 맑아 보이는 이십 대 초반의 기사를 둔 사장은 빨간 차를 타고 자주 땅을 보러 가거나 해서 사무실이 한가할 때가 많았다. 적막할 때마다 나는 책을 읽었다.

무료할 땐 낙서장에 'Bee Gees Bee Gees Bee Gees' '로스트로포비치 로스트로포비치 로스트로포비이'를 쓰기도 했다.

사무실이 서향이었던가.

저녁 무렵, 조세희의 ‘뫼비우스 띠’를 읽고 났을 때 창으로 비치는 석양이 조금 처연했다.


전화번호부에 '잠실사모님'이라 적힌 여인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는 새로 지은 잠실 아파트에 입주해 하릴없이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똑똑한 남매를 두고 외모도 내면도 수려해 보이는 남편을 둔 사십 대 초반의 여인은 약혼녀와 동거 중인 이 젊은 사장에게 개인적 애정 감정을 가지고 접근했다. 아주 조금씩.

무관심하던 사장이 그녀에게 기우는 걸 보았다.

'뱀이 분명 양의 탈을 쓰고 있구나' 생각하며 나는 조금 웃었다.


생리통이 심했다.

어느 날 생리통으로 힘들어하는 나에게 나와 동갑의 운전기사는 몸살쯤으로 알았는지 미스 박 이거 먹어요, 하며 비탈길 아래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빵을 사다가 내밀었다. 내 주위에서 맴도는 그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생떽쥐베리의 소설만 문고판으로 샀다.

‘야간비행’을 읽으며 공감이 가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밑줄 친 문장을 필사수첩에 옮겨 적다가 몽땅 다 공감이 가는 문장이어서 필사를 포기하고 볼펜으로 줄을 쳐가며 읽었다.



글라라 선배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직장 생활을 하며 직장에서 하던 일 텔렉스(지금의 정보통신?)와 관련된 학과에 들어가 졸업하고 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결혼을 앞두고 그 일을 그만두었단다.

나는 출근을 해야 해서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부모님 가게에서 가져온 앙증맞은 두 개의 옹기 단지를 그녀의 큰언니를 통해 결혼 선물로 전달했다.


또 다른 동기가 수녀원으로, 원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으로, 지방으로 하나 둘 떠나고 새로운 단원들이 들어와 그 자리를 채웠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흑백 TV 뉴스에서 알려주는 대로 북한 소행인 줄 알았다.



친구 엄마가 눈물 닦으며 너희들도 수녀원 가라고 했을 때 내가 대답을 안 한 이유가 있었다.

6년 후에 나는 결혼을 했으니까.

내 옆에 앉아 역시 대답 안 하던 코러스 친구도 내 결혼 3개월 뒤에 결혼을 했으니까. 그녀는 결혼 후 영국으로 들어갔다.

겨울에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그녀의 코러스를 생각하며 흥얼거렸다.


아이를 낳았다.



큰 아이가 돌이 지났다.


6.10 항쟁으로 나라가 난리 통이었다.



6.29 선언이 있었다.



간간이 성가대 선후배, 동기들의 부모상 소식이 들렸으나 문상 갈 여가는 없었다.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 유세 중에 그가 그동안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을 불렀다.


가을마다 있던 성가대 정기 공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도 동기들로부터 들었지만 거기 역시 가보지 못했다.


대마초 가수들이 풀려나고 그들의 노래가 방송을 탔다.



작은 아이를 낳았다.

무지한 정권에 짓밟혀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기관 요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농사짓던 김민기가 KBS TV '열한 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해 그동안의 삶을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

집회현장에서 국민들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먼 거리에서 들으며 이젠 더 이상 '아침이슬'은 내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그가 작곡한 ‘아침이슬’이 그의 목소리로 나오자 그의 눈가가 젖었다. 그가 괴로운 듯 침을 삼켰다.

자고 있는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시청하는 내 눈가도 뻐근해졌다.


88 올림픽이 있었다.

굴렁쇠 소년이 우리 큰아이처럼 통통하고 귀여웠다.



주로 12월에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나오는 ‘I understand’를 들을 때 여러 해 같이 활동했던 성가단원들을 생각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문예지 '문학사상'을 1년 구독했다.

매달 오는 문학사상을 몇 쪽씩밖에 읽지 못했다.


성가대 후배와 결혼한 기타를 아주 잘 치던 선배가 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이 낳은 남매가 어리단다.

그 소식을 전화로 알려준 친구에게 내가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형 피부가 조금 까맸던 이유가 간이 안 좋아서였나 보다고, 술을 잘 안 마시던 그가 간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게 오래된 것 같다고.


몇 달 뒤 이제 우리 모임을 갖자는 연락을 받았다. 선배가 떠난 충격으로 마음에 허망함이 자리했을 다른 선배들이 주선했단다.


가을날이었다.

첫 모임을 경복궁에서 가졌다.

회장 총무는 두 선배가 맡았다.


글라라 선배도 만났다. 아들 하나가 있는 그녀는 대학 입시생 몇 명에게 수학 개인 과외를 몇 년째하고 있단다.



이후 우리는 도시락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에서 만났다.

아이들이 공원에서 다방구를 하고 놀았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다.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오던 동기가 죽었다.


야외 모임에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않고 늘 혼자 나오던 동기도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그들의 장례식장에 모두 참석했다.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로 스스로 떠난 예쁜 후배는 나를 무척 따랐었다. 그녀의 죽음은 몇 달 후에나 알게 돼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남자 동기가 세상을 떴다. 달려오는 전동차에 몸을 던져서.

그의 죽음 소식은 MBC TV 뉴스로도 방송이 됐다. 머리 좋고 똑똑하던 그는 결혼 후 선배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잠깐 하다가 나와서 이후론 직업을 가졌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는 남매가 있었고 그의 부친이 세상 떠날 때 남겨준 부동산을 다 없애고 아내와 헤어진 후 힘들어한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 모였다. 헤어진 그의 아내와 남매가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했다.

'우리 성가대 후배들은 내 피부야 피부!'라고 자주 말하던 선배는 술을 많이 마시고 괴로워하고 화장실 가다가 넘어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생사와 상관없이 해는 매일 뜨고 진다.



같이 데리고 만나던 아이들이 컸고 결혼을 했다.

자식들 결혼식에 모두 참석했다.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란 선배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축의금을 내려는데 줄이 길었다. 우리들은 저 뒤로 가서 줄을 서며 말했다. 축의금을 이렇게 길게 줄 서서 내긴 처음이라고.

선배의 부친이 생전에 사회에서 명망이 있었다.

선배는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을 축내지 않고 잘 관리했다.

건축학을 공부한 그는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성실하게 근무해 모범 직원상도 받았었다.

그의 활동 영역이 넓어 보였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그 아들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스스로 떠났다고.

우리는 장례식장으로 갔다.

조의금은 받지 않았다.

우리는 연도를 했고 애도의 성가를 불렀다.


이후 몇 명의 후배들이 그 선배와 위로의 술자리를 몇 번 가졌다. 그의 아내가 약 없인 밤잠을 못 이룬다고 했다.



선배들에서 시작한 회장 총무의 바통이 동기들에게로, 동기들에게서 후배들에게로 넘어갔다.


만날 때마다 우스운 소리 실실 잘해 우리에게 웃음을 주던 후배가 간밤에 세상을 떠났다. 자다가 조용히.

몇 해 전이었던가, 정기 모임 후 모임장소에서 가까이 있는 우리 집으로 옮겨와서 저녁을 먹을 때 그가 삼겹살을 구우며 고기가 타서 눌어붙은 프라이팬 바닥을 상추로 닦았다. 누나, 이럴 때 상추로 닦으면 좋아요 팬 바닥이 상하지 않아서.

그는 상추로 팬을 깨끗이 닦아내고 고기를 더 구웠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영정사진에서 실실 웃고 있는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 떠나셨을 때 성가대 OB 단원들이 다 함께 왔던 장례식장에서 연도와 성가도 주관하던 그였다.

그의 빈소에선 다른 후배가 연도와 성가를 주관했다.

거기서 만난 글라라 선배는 남편이 병중에 있다고 했다.


동기가 대장암으로 떠났다. 냉면 가게를 운영하던 그였다.


글라라 선배의 남편이 세상을 떴다.

남편이 오랜 투병 끝에 떠나서인지 그녀는 슬퍼 보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숙제는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터이니, 숙제가 등에서, 어깨에서 누르고 자꾸 건드리든 말든 나는 오늘 보고픈 이들을 만나고 맛난 것 먹으며 살 일이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가 돼도 줄지 않고 계속 내렸다. 큰 우산은 건사가 성가셔 작은 우산 겸 양산으로 골라서 쓰고 출발했다.

송년회 장소는 수년 째 같은 스시집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추운 날에, 더구나 이처럼 비 오는 날은 꽤 불편하다.

그곳을 향해 걸을 때마다 ‘식당을 역 가까이에 잡으면 좋을 텐데..’ 불만스럽다.

그러나 나는 이제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야 하는 선배 쪽 자리에 있다.

천천히 걸어서 약속 장소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스무 명이 모였다.


고문 자리에 있는 선배가 건배사를 했다.

모두 건강해 다시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그리고 외쳤다. “오늘은 몽땅 내가 쏜다!” 우리는 잔을 부딪치며 해마다 하는 답을 외쳤다. “네, 형니임!” 그리고 웃었다.


2분 스피치 시간이다. 각자의 근황 등을 2분 정도 얘기하는 시간이다.


아들의 결혼식과 장례를 한 달 사이에 치렀던 선배 차례가 되었다.

그는 얼마 전 그의 아내와 남미의 한 성당에 가서 아들 이름으로 큰 종을 봉헌하고 왔단다.

매일 낮 12시, 저녁 6시에 그곳에서 울려 퍼질 종소리는 자신의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 바치는 기도 소리가 될 거라고 했다.

모두 숙연해졌다.


한 동기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옛날에 그가 성가대에 들어온 계기를 길게 말했다. 2분이 지나있었다.

‘얘는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 길게 하는 건 여전하네.’ 지루하다 생각 중인데 그가 말했다. 그의 아내가 폐암이라고, 폐를 한쪽 절제했다고.

모두 놀랐다.



여기에만 오면 아이가 되는 후배가 일어섰다.

의료기 회사 CEO, 모범 납세자 상을 가끔 받는 그가 술잔을 들더니 노래했다. “천만 번 또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우리는 잔을 부딪치며 화답했다. “사랑해애애애..” 그리고 또 웃었다.


회장을 맡고 있는 후배가 일어나 말했다.

얼마 전 모친상을 치른 ‘안나’가 오늘 후원금을 냈다고. 우리는 모두 손뼉을 쳤다.

안나가 말했다. 모두 와서 같이 애도해 주시고 맘 보태준 덕분에 94세의 어머니 잘 보내드렸다고.

어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자는 듯이 가셨단다.

기타 잘 치는 선배와 결혼했던, 그러나 그 남편을 간 질환으로 일찍 하늘나라에 보낸 그녀는 신용카드 영업 일을 하며, 대형 시장에서 옷 가게를 하고 또 다른 일도 하며 치열하게 살았지만 내색 없이 조용조용 두 남매를 키워냈다.

남매가 결혼할 때도 우린 모두 가서 축하해 주었었다.

그녀가 또 말했다. 자식을 결혼시킨 부모는 자식이 잡음 없이 살기만을 바란다고.

아들을 하나를 낳아 키우고 있는 그녀의 아들이 현재 부부사이가 원만치 않은 느낌으로 말하며 목이 메었다. 그녀가 티슈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지금 나의 삶이 소박해서 그냥저냥 지낼만하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이 대축일에 부르던 미사곡 이야기, 성탄 미사 끝나고 늦은 밤 모두 글라라 선배네 집으로 몰려가 떡국 먹던 이야기, 속초, 송지호, 학암포, 비진도로 여름 캠프 갔을 때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모두 아름답기만 할까.

나는 속초해수욕장 말만 나오면 감초처럼 등장하는 내게 일어났던 사건 이야기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첫해에 갔던 속초 해수욕장 캠프 때 바다에 들어갔다.

모래사장과 아주 가까운 거리였는데 순간 바닥이 발에 닿질 않았다. 파도가 수시로 내 몸을 덮쳐 감았다. 마침 그 동네 청년들과 배구시합을 하던 선배가 나를 발견하곤 청년들과 함께 바다로 급히 들어왔다.

그렇게 그들의 도움으로 살아 지금 이렇게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하고 있다.

지금도 선배가 말한다. 내가 파도 속에서 안 죽으려고 자기를 하도 꽉 잡아 같이 익사할 뻔했다고.



회장후배가 가지고 온 가방을 열고 돌며 모두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아주 작은 종이 백에 고급져 보이는 양말 한 켤레씩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기뻐서 와.. 하며 받았다.


번호 뽑기도 했다. 당첨된 이에게 그는 머플러를 따로 선물했다.


이어 총무후배가 립스틱을 들고 돌리며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우린 또 놀랐다. 나는 여린 핑크색을 집었다. 짙은 색은 부담스러워서.

아내가 폐암 투병 중인 동기는 짙은 핑크색을 집었다. 그의 아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나는 글라라 선배에게 그녀의 부모님, 자매들, 남동생의 근황을 물었다.

우리와 활동을 같이 하다가 동기의 오빠와 결혼했던 큰언니는 남매를 낳고 남매가 어릴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다른 가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는 세상 떠나신 지 오래됐고, 100세 가까운 어머니는 방송국에서 임원으로 정년퇴직한 남동생과 양평의 아름다운 집에서 함께 지내고 계시단다.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부재중이어서 한 번도 보지는 못했던 남동생은 재직 중에 꿈꾸었던 삶을 그곳에서 원 없이 누리고 있단다.

좋은 오디오 시설을 갖춰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커피를 끓이고 어머니와 함께 텃밭을 가꾸고.

그는 요리도 잘해 어머니에게 맛난 음식도 잘해드린단다. 어머니와 산책도 하고 가끔 외식도 하면서.

남동생의 아내는 양평에서 가까운 도시에 살면서 가끔 그곳에 다녀간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과도, 시어머니와의 사이도 원만하단다.

나는 그들의 삶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동생의 아내도 양평 집에 같이 산다면 고부갈등이 있을 테고, 그것이 부부 갈등으로까지 이어질 테니까.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기름기 없는 푸석한 머리로 빨간 위 내복을 입고 계셨던 그때의 어머니 모습은 없었다. 자애롭게 웃는 모습이 고왔다.


그녀의 작은언니는 그때 같이 가서 보았던 영어 서클에서 만난 선배와 결혼해 대구에 살다가 남매가 어릴 때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가족이 다 남자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했다.

그 남매가 머리가 좋아 종친회에서 대주는 학비로 대학을 졸업하고 생명공학을 전공한 딸과 의대를 졸업한 아들은 그 분야에서 종사하며 잘 지내고 있단다.

작은 언니의 남편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수십 년 누워있는 아들과 아들의 가족을 품고 살았을 부모를 생각하며 나는 한숨지었다.


시간이 많이 가고 있었다.

2차 맥주집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왔다.

밤이 되어 내려간 온도로 비는 더 차가워졌다.

우산을 쓰고 로사후배와 함께 2차 장소로 천천히 걸었다.

연극배우로 시작해 현재 단역배우도 하고 있는 그녀가 연극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들은 3.1로 창고극장에 가서 그녀가 나오는 연극을 관람하며 응원했었다.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모노드라마'라는 명칭으로 처음 시도되는 추송웅의 1인 극 ‘빨간 피터의 고백’이 한창 인기 있던 시기였다.

그 연극도 같이 보았다.

그녀의 세 딸은 결혼해서 지금 잘 살고 있단다.

큰 딸은 자기 사업을 하고 제일 예뻤던 둘째는 배우를 시키고 싶었지만 본인이 싫어해 필라테스 강사로, 셋째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단다.

세 딸이 어릴 때 남편이 하던 일이 안 되고 설상가상 작업실에 불이 나고 해서 그녀가 경제적으로 힘들게 지내던 때를 나는 알고 있다.

트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때 넘어져 쓰러지지 않고 아이들과 집에서 연극놀이을 하며 지냈었다.

계속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피죽을 먹고살더라도 세상 멋을 아는 남자, 철학을 가지고 사는 남자와 살고 싶어 남편을 택했었다고, 살아보니 철학도 배부르고 나서 얘기고 경제 능력 있는 남자가 세상 멋을 아는 남자더라고.

그녀는 지금도 유명 배우를 꿈꾼단다.

나는 유명배우도 좋지만 지금 유명하지 않아서 더 좋지 않으냐고 했다. 너무 유명해지면 그만큼 여러 위험에 노출돼 화가 따를 수도 있다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지금이 좋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우리는 맥주 집에 또 모여 또 건배를 했다. CEO후배가 “2차는 제가 쏩니다!” 외쳤다.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렸다.


“어머 내 우산!” 의자 옆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로사와 이리로 걸어올 때 내 우산을 따로 쓰고 왔나 로사 우산을 같이 썼던가.

로사에게 물어보니 그녀도 생각이 안 난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걸을 때 키 작은 가 들었던 작은 우산이 키 큰 그녀가 든 큰 우산 아래로 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친 순간이 기억나는 듯도 했다.

막내 후배가 벌떡 일어나더니 가서 내 우산을 찾아보겠다고 빗속에서 스시 집으로 뛰었다.

한참 후에 그가 우리가 있던 방에 우산은 한 개도 없더라고 하며 들어왔다.

우산을 옷걸이 아래에 내가 잘 두었는데 그가 못 찾았을 거라며 내가 일어났다.

그곳으로 다시 가보기 위해 몸을 돌려 의자에 걸쳐있는 코트를 빼서 입으려는데 칸막이 뒤 맥주병 몇 개 꽂힌 박스에 내 우산이 놓여있었다.

스시 집으로 뛰었던 막내후배에게 우산 여기 있다고 말했다. 그가 웃었다. 다른 이들도 웃었다.

우리는 과일과 맥주를 마시고 어느 테이블에선 떡볶이도 추가해 먹었다. 떡볶이가 너무 맵다며 물에 씻어 먹

기도 했다.

우리는 수녀원에 간 단원들 이야기도 했다.

다음 모임엔 수녀님들도 같이 모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밤이 깊어 어서 일어나야 했다.

내가 외투를 입자 한 후배가 언니, 목도리도 챙기세요. 이 장갑도.

우산 실수 이후 이젠 정신 차려 잘 챙길 텐데 그녀는 자꾸 나를 살폈고 나는 자꾸 웃었다.

그녀는 내 우산을 자기가 들고 나와서 펴고 나서야 나를 주었다. 우린 서로 바라보며 또 웃었다.


몇 명은 우리가 나온 맥줏집 앞에서 바로 헤어졌고, 몇 명은 지하철 계단 아래서, 몇몇은 계단을 올라 지하철역에서, 나머지는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가다가 헤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만난 단원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그들 속에 있었다.

그들에게 말이 또 하고 싶어졌다.

휴대폰을 열고 서른세 명이 머무는 단톡방에 들어갔다.

한 명 한 명 부르며 얘기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주경야독으로 유일하게 돈을 벌던 원석이 형, 그때는 우리 모두 형에게 빈대였어도 미안함도 모르고 지냈다고, 로마제과에서 빵과 우유를 늘 사주셨던 것에 이제야 감사함을 전한다고.

이젠 제가 얼마든지 사드릴 수 있으니 드시고 싶은 것 있을 때 연락 주시라고, 버선발로 뛰어나가겠노라고.


빵빵하게 들어있는 선물 가방을 들고 약속장소로 들어오던 회장 영준,

선물을 사고 포장하고 양말 넣을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가방 구하기도 번거로웠을 텐데 그의 얼굴은 그가 들고 있는 가방의 부피만큼 기쁨으로 빵빵한 표정이었다고, 고맙다고.


이번 모임도 역시 영준 회장과 의논하고 준비했을 총무 상영,

수고 많았네. 립스틱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은 즐겁지만 단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림을 그리던 데레사,

화구를 들고 전방 어디로, 그곳이 남북한 경계인 줄도 모르고 들어간 그곳에서 우리 군인들에게 발각돼 큰일 날 뻔했던 그녀,

결혼 후엔 붓을 놓았다면 이제 그 붓을 다시 들면 좋겠다고, 유명 화가가 아니어도 진흙 속 진주들이 얼마나 많게? 자신을 구원해 주는 건 예술행위만 한 게 없으니 그림을 다시 그리라 권하고 싶다고.



나는 경훈이를 볼 때마다 정직하고 품격 있는 CEO의 포스를 느낀다고.

부지불식간에 하는 말과 행동은 마음 그대로의 얼굴이더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되더라고.



막내 안토니오, 미안했어요.

내 우산 찾으러 간다고 빗속을 뛰어가는데 왜 그대의 배우자 레지나의 눈치가 보이던지.

성가대 커플인 그대들 수리술술이 잘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지 그대들만 모르는 것 같더라고.

.

.

.

동혁이 형,

남미의 어느 성당에서 낮 12시 저녁 6시 종이 울리는 시간 즈음에, 하늘나라에서 상욱이가 울리는 인류 구원의 기도에 저도 함께 할게요.



끝자락에 썼다.

아침부터 중간 꼰대의 수다 들어줘서 고맙다고.

어제 참석 못한 단원들에 대한 얘기는 쓰지 못했으니 이해를 구한다고.


마지막에 첨부했다.

생각해 보니 어젠 우리의 단체곡 'I understand'를 부르지 않았더라고.

우리 지금 함께 부르자고.

노래의 영상을 함께 올렸다.




수다를 올린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답글이 올라오고 있다.

조금 전엔 한 동기의 답글이 올라왔다.

이 노래에 코러스를 잘 넣던 실비아가 보고 싶다고.

긴 머리가 잘 어울려 아름답던 그녀, 단톡방에 초대할 때마다 무슨 연유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나가는지 모르겠다고.


다른 동기의 답글이 올라왔다.

지금 쯤이면 실비아도 먼 나라 그곳 영국에서 이 노래를 코러스로 우리와 함께 부르고 있을 거라고.


https://youtu.be/kYJrU8ukIDw?si=r8BS-hGUrPKL12Kc



작가의 이전글순간을 영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