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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Sep 26. 2023

             의심의 바람

   나이 드는 게 좋기도 하다.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대가족이 소중하다는 걸 알아가니까. 의무감으로만 참석했던 시댁 벌초행사에 이젠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앞서간다. 벌초 날이 내일이므로 오늘 오전에는 떠나야 한다.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 호박음식을 제일 좋아하는 맏동서에게 주려고 하늘 넝쿨에서 울타리에서, 조롱조롱 매달려있는 호박을 모조리 따서 사각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삽으로 파 내 긴 꽃대를 쪽가위로 잘라내고 모아놓은 백도라지도 다른 바구니에 담았다. 진한 향을 뿜어내는 도라지가 바구니에 쌓여가자 내 마음도 미리 쌓이는 기쁨으로 울렁거렸다. 몇 개의 가지와 여주는 바구니 모서리에 찔러 넣었다. 그녀는 젊어서 암 수술을 한 후부터 우리 유기농 음식에 관심이 많다. 바로 다 소비 못하는 식재료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말려서 물에 넣어 끓여 먹기도 하고 설탕에 재워 양념으로 먹기도 한다. 그녀가 수술 후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에 별 탈 없이 지내오는 건 그녀의 토종음식 사랑 덕이리라.

   벌초 가는 길은 우리 가족 여행길이기도 하다. 그 여행은 신혼 때부터 이어오고 있다.


해마다 거쳐 가는 과정대로 공주 큰 시누이네 먼저 들렀다. 대문 앞에 서있는 대추나무엔 아직 덜 붉은 대추가 올해도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많이 열려있다. 몇 년 전 퇴직한 시누이 남편은 화단 상사화에 거름을 뿌리다가 우리를 맞이했고 시누이는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남편이 상사화가 이 가을에 봄날처럼 싹을 내민다며 신기해했다. 우리는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서 상품권을 넣은 봉투를 꺼내 가지고 나와 주방 냉장고 커버주머니에 살짝 넣었다. 이것은 이따 우리가 떠나고 나서 시누이에게 문자로 알려줄 참이다. 차 한 잔씩 마시며 잠깐의 담소만 나눈 후 일어났다. 저녁 식사를 동서네 가족과 함께 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하므로. 시누이는 차 트렁크에 멜론 여러 개를 실어주며 당부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서울 가져가서 우리만 먹으라고. 나는 멜론을 트렁크 안쪽으로 놓고 옆에 있던 옷가지로 덮었다.

   

우리는 익산으로 달렸다. 서울에서 공주 가는 길도, 공주에서 익산으로 가는 길도 벌초로 많이 막힐 거란 예상과 달리 한산했다. 동서네 집 앞에 도착하니 시숙과 동서가 대문 앞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내민 선물 상대가 기뻐한다면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농장에서 담아 온 야채 바구니를 내 두 아들이 들어다 거실에 내려놓으니 동서가 기뻐한다. 아이들이 각각 제 큰아버지 큰어머니한테 용돈 넣은 봉투를 드리고 나는 조카손자 책 사주라며 조카며느리에게 도서상품권을 주었다. 두 개 나란히 놓은 상에 준비한 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상다리가 휠 정도다. 장손인 조카가 밖에서 들어오며 생선회와 매운탕을 사가지고 와 푸짐함을 더했다. 때맞춰 경주에 사는 시동생이 도착해 합류했다. 식사가 시작되자 나는 모두 술잔을 들어 건배를 외치라고 지휘하며 사진을 찍었다. 동서가 우리들의 추석은 오늘이라고 말했다.

   식사 후 긴 시간 이야기 나누다 보니 밤이 늦었다. 조카는 결혼해 가까운 거리에 따로 살고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젊은 그들만의 이차 모임이 있으리라.

   

나는 큰 방 침대에 동서와 같이 누웠다. 식사 후 조카가 배달시켜 와 마신 한 모금의 커피가 잠을 방해했다. 그녀와 두런두런 사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새벽이 되어간다. 그녀가 잠에 취한 소리로 말했다. 저 호박으로 요리해 먹을 생각에 미리 신이 난다고. 나는 잠결에 생각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본심은 덧칠 없는 아기의 마음일 거라고. 스스로 마음을 막아놓은 분노로 상대를 미워하느라 그 천진함을 미처 꺼내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나 아쉬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찍 일어났다. 태풍에 앞선 폭우 예보로 마음이 바쁜 남자들이 서둘렀다. 누룽지를 끓여 한 그릇씩 먹고 시조부모와 시부모님이 잠들어 계신 강경으로 출발하기 위해 현관문을 여니 술, 쌀, 밑반찬 등 동서가 꺼내 놓은 선물이 문 앞에 쌓여있다. 두 아이가 그것들을 들고나가 싣기 위해 차 트렁크 문을 열자 눈치 없는 멜론 한 개가 앞쪽으로 굴러 나와 까꿍하고 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는가. 우리 차에 같이 타려고 뒤에 서있던 동서가 웬 멜론이냐고 물었다. 나는 들키지 말라던 시누이의 당부와, 큰 시누이네서 오는 우리 편에 자기 것도 좀 보내주지, 할 수도 있는 동서의 서운한 마음을 최소화하는 선을 택해 말했다. 시누이가 멜론을 딱 한 개만 넣어주더라고. 나머지 멜론은 옷가지 속에 잘 숨어있어 더는 들키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트렁크 문을 얼른 닫았다.

  

 남자들은 조카 차에, 동서와 나는 우리 차에 타고 출발했다. 새벽까지 나누던 동서와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남자들이 큰소리쳐봐야 결국 여자들 손바닥에서 노는 거라고 얘기하며 박장대소하자 운전하는 작은 아이가 빙긋이 웃는다. 산소에 도착해 남자 어른들은 예초기와 낫을 들어 키가 커있는 풀을 깎고 조카와 우리 아이들은 떨어진 잔풀들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동서와 나는 멀리 떨어진 언덕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과일을 베어 먹으며 우리도 허망한 가루가 되어 저 아래에서 영원히 쉴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얘기했다.   

   긴 시간 동안의 벌초를 끝내고 동서가 만들어온 송편과 고기 과일을 놓고 절을 한 후 내려왔다. 시내로 나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길 건너에 사는 작은 시누이 집으로 들어갔다. 모두 거실에 앉았음을 확인한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 한 편에다 추석 명절 잘 쇠라는 메모와 함께 현금을 넣은 봉투를 놓고 사각 접시로 눌러놓았다. 그리고 거실로 나오는데 동서가 허리 시술 후 바닥에 앉으면 일어나기 힘들다며 주방으로 들어와 식탁 의자에 앉는다.

   접시 밑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흰 봉투를 그녀가 볼까 봐 맘이 쓰였다. 내가 이렇게 다른 형제에게 하는 봉투 인사를 그녀가 알게 될 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견제의 파동은 꽤 불편하니까. 사는 게 이렇게 간단치가 않다. 작은 시누이가 뭔가를 가지러 뒤뜰로 나가기에 살그머니 그녀 뒤를 따라가 귓속말을 했다. 저 식탁 위에 있는 봉투를 동서가 볼 수 있으니 얼른 치우라고.

   그리고 나는 여기 부추꽃이랑 꽃사과 좀 보시라며 동서를 뒤뜰로 불러냈다. 눈치 빠르기가 나보다 한 수 위인 그녀가 이번엔 눈치를 못 챈 느낌이다. 식탁 위 봉투도 불러내는 내 술수도. 그녀가 허리를 짚은 채 나오는 걸 확인하며 시누이 등을 밀어 들여보냈다. 동서가 반질반질 늘씬하게 달려있는 가지를 보더니 따가야겠단다. 나는 가지 담을 비닐봉지를 가져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을 보니 봉투는 치워져 있었다. 그때 맞은편 현관 방충망 너머로 앞마당에서 시동생이 나에게 나와 보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나는 동서에게 봉지를 얼른 갖다 주고 들어와 마당으로 나갔다. 시동생이 빨리 차 트렁크 문을 열라고 재촉하며 자신의 차에서 그의 장모가 담가 보냈다는, 한 아름이나 되는 큰 통의 고추장과 복분자액을 꺼내왔다. 트렁크는 동서네서 준 선물로 이미 다 차 있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가 그것들을 바닥에 내려주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눈들이 많아 줄 기회를 못 잡았다고.

   

모두 들어와 후식을 먹은 후 또 어서 일어나야 했다. 이젠 헤어져야 하므로. 떠나는 형제들에게 시누이가 소곡주 한 병씩을 주었다. 공평하게. 출발을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차 시동을 걸었고 다른 가족들이 서서 배웅해 줬다. 차 바닥엔 시누이네서 나올 때 형제들과 함께 받은 소곡주 말고 어느새 물김치와 한 병의 소곡주가 더 놓여 있었다. 시누이가 먼저 몰래 넣어놓은 거라고 아이들이 말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닥에 빈틈없이 놓인 선물 위에 다리를 편 채 올려놓고 앉아 문득 생각했다. 혹시 그들이 나를 보내놓고 모여 다른 선물들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에 비밀이 없다지만 더러는 있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의리로 뭉쳐 비밀로 해 함구한다면 가장 멀리 사는 내가 어찌 알겠는가. 불현듯 가슴에서 의심의 바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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