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땅의 첫겨울

by 감동의 날
차 홈리스.jpg 새 땅의 첫겨울 차 안의 홈리스 생활

내가 미국에 입국하고 3개월이 지난 그다음 해 1월 초순이었다.

전해 연말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계속 내리더니 연일 내린 눈이 무릎을

넘길 만큼 쌓여 온 세상이 하얀 눈 천지였다. 그해 겨울은 춥기는 또 얼마나 춥던지 차 안에 앉아

있으면 무릎이 자동으로 덜덜 떨렸다.

그날 저녁도 매일 밤 고정으로 차를 주차하는 주차장 한쪽 구석에 차를 주차하고 차 안에서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었다. 차 연료비를 아껴야 하니 차 시동을 계속 켜 놓을 수 없어 시동을 끄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누가 운전석 문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톡톡 소리는 잠깐 든 쪽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에이. 짜증 나고 귀찮게

또 누구야!.”라고 신경질을 내며 일어나 윈도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주차장 구석 전봇대 전등 빛은 300여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중간을 환하게 비추고 있고

전봇대 최상단에 달린 전등 빛을 받아 야광이 번들거리는 검은 얼굴이 차 밖에 어른거렸다.

간혹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마약에 취해있는 상태에선 제정신이

아니라 마약 구입할 단돈 몇 달러를 강탈하기 위해 사람을 해치니 말이다.

나는 차 문 유리를 목소리가 간신히 들릴 정도로 조금 내리고 신경질적으로 왜? 하고 소리를

빽 지르니, 웬 키가 크고 시커먼 사람이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차 앞 범퍼를 가리키며

“라이트, 라이트!”라고 소리쳤다. 자동차 라이트가 켜졌다고 하는 거 같아 운전대 밑에 대시 보드를 보니 앞 헤드라이트 신호에 오렌지색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나는 핸들 좌측에 있는 레버를 위로

돌려 라이트를 끄고 미안해하며 큰소리로 “땡큐!” 하고 오른손을 드니 키가 크고 깡마른 체격의

흑인은 유어 웰컴”이라고 하고는 저쪽 7.11쪽으로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7.11 편의점이 24시간 영업을 해 무슨 물건을 사러 오다 쇼핑몰 한구석 빈 차에 헤드라이트가

켜져 있어 차 가까이 와 안을 보니 차 안에 사람이 누워있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해 보느라

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자기 전에 머리맡 구석에 벗어 놓은 전자 손목시계를 더듬거려 찾았다. 시계가 손에 잡혀 왼손으로 시계 몸체를 잡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시계 3시 방향 바깥쪽에 붙어있는 좁쌀만 한 버튼을

누르자 시계 숫자가 보니 새벽 두 시였고 잠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무릎이 심하게 시려 왔다. 차가운 겨울의 냉기는 몸속의 뼈를 만나면 뼈를 타고 온몸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며 뼈와 뼈 사이 연결되는 관절로 숭숭 빠져나갔다. 혼자 나가기엔 억울하고

허전한지 몸에 간신히 조금 남아 온기를 다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잠시 멈칫했던 무릎이

또 시려 오며, 온몸이 동지섣달 삭풍에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녁마다 팔과 무릎관절이 시려 옷을 몇 벌 껴입고 얇은 홑이불로 몸을 칭칭 말고 누워 냉기의

침입을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그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밤마다 온몸과 이가 덜덜 떨리도록

괴롭혔다. 무릎이 시려 깊은 잠을 못 자고 매일 밤 자다 깨기를 저녁내 반복했다.

깨어 있을 땐 너무 무릎이 시려 쪼그려 앉아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고 양손으로 시린 무릎을

꼭 감싸 안고 앉아 있으면 그래도 좀 나았다.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차 시동을 걸려다 차 안에 온기가 좀 돌게 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시동을

켜 두어야 하는데 지갑에 남은 총 재산 몇십 불을 차 연료비로 쓸 수가 없어 그 생각을 접었다.

몸을 움직이면 몸 밖에서 내 몸으로 침입하려고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는 냉기에 기회를 주어

몸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냉기를 막아내려면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어야 했다.

빨리 날이라도 샜으면 좋겠는데 날이 새려면 족히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얇은 여름 홑이불로 둘둘만 몸을 일으켜 세워 추워서 이불 밖으로 빼내기 싫은 오른손을

빼냈다. 차 앞 운전대 쪽으로 몸을 굽혀 라디오를 켜서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채널에 맞춰

라디오 소리가 내 귀에 조그맣게 들리도록 볼륨을 고정하고 두 손을 포개 양 무릎 사이에 넣고

새우잠을 자는 자세로 모로 누웠다. 차종이 포드에서 생산된 왜건형이라 뒤에 의자를 완전히 젖히면 운전석 뒤 공간이 제법 넓어 옷가지며 세간살이 짐들을 차 짐칸 뒤쪽에 있었다. 머리를 앞 좌석을 향하고 반듯하게 누우면 다리가 물건에 닿아 쭉 펼 수가 없어 대각선으로 누웠다. 새우등처럼

웅크린 자세로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도대체 이 생활이 얼마나 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1월 7일이니 내가 작년 11월 3일에 입국해서 강 사장이 소개해 준 현준 엄마 아파트에서

한 달 만에 나왔으니 벌써 이 생활을 한 달 하고도 4일이나 더 지났다. 이런 고단한 노숙인 생활을

하루빨리 어떻게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내 나름의 온갖 해결책을 찾아보았지만 지금으로선 쉽게 끝날 기약이 없고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강 사장 가게를 그만두고 강 사장이 소개해 준 아파트에서 짐을 싸서 나온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사장 가게 식품 도매상은 워싱턴 D.C 플로리다 마켓 청과물 도매시장 맨 끝 쪽 구석에

있었다. 나는 미국에 입국한 다음 날부터 그 가게에서 저녁 11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꼬박 8시간을 일했다. 그때 내 한심한 체력은 냉동창고에서 밤을 새우는 강도 높은 노동이 도저히

감당 안 됐다. 한국에서 미국에 입국하기 전 2년 동안을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30 중반의

내 체력은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저질 체력이었다.

고향 초등학교 5년 선배인 강 사장은 이런 나의 저질 체력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친구 조카인 나를 어떻게든 강하게 훈련해 노동 강도가 센 미국 생활에 하루빨리 적응시켜

한시라도 빨리 미국 생활에 안정되게 정착시키려는 좋은 의도였던 거 같다. 하지만 내 체력은 정신 육체적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피폐해진 상태의 저질 체력 상태라 그런 호의적인 강 사장의 기대와 요구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영하 18도를 유지해야 하는 추운 냉동창고에서 몇 시간 일하다 보면 온몸의 관절이 시렸다.

10여 년 전 시골 도로에서 트럭 운전 중 갑자기 튀어나오는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차가 무밭으로
서너 바퀴를 구르는 전복 사고로 크게 다쳐 수술한 오른쪽 무릎이 땡땡 부어오르며 통증이 심했다.

강 사장의 가게는 미 전국 각지에서 대형 트레일러에 실어 오는 농수산 축산물 축산물을 신선하게 보관 유지하려고 냉동창고의 천장과 사방 벽에서 하루 24시간 내내 찬 냉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천장 높이가 5.6미터쯤 되는 수백 평이되는 공간 층층 선반에 땡땡 얼어붙은 농수산 축산물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되었다. 그 품목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선반에 올리고 내리는 일의 노동 강도를 견뎌내기엔 내 저질 체력으론 절대 무리였다.
일주일에 세 번씩 대형 트레일러가 도소매 할 농수산 축산물을 싣고 오면 지게차로 그 생산물을

차에서 내려 냉동창고에 내려놓으면, 냉동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크고 작은 박스를 해체해 다음에 찾기 좋게 지정된 선반에 물건을 정리해야 했다. 얼어 굳어진 바윗돌처럼 단단하고 무게가 상당한 작은 박스를 선반에 올리고 내리는 작업은 내게는 순간순간이 고통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안 하던 밤일을 하고 아침에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려니 밖에서 나는 온갖 소음 때문에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저녁내 밤일을 하고 아침이 되면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지만 잠은 못 자고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던 오른쪽 무릎이 냉기에 장시간 노출되자 통증이 극도로 심해졌다. 그 극심한 통증에 못 이겨 일이 끝날 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이 푹 꺾이며 그냥 주저앉아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 가 냉동창고에서 정신을 잃고 곧 쓰러져질 것 같아서 우선 살고 보자고

강 사장이 소개해 준 아파트에서 짐을 싸 나왔다.
강 사장을 제외하면 일가친척 친구 한 명 없는 낯설고 물선 이 땅에서 어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미국에 온 지 2주 만에 면허를 따고 수중에 있는 돈 다 털어 10일 전에 길거리에서 포드에서 생산된
왜건형 중고 승용차를 2.700$(약 300만 원)에 구입했다. 지금은 안 되겠지만 그때는 운전면허도

입국해 바로 취득할 수 있었다. 한적한 도로 옆 여유 공간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 FOR SALE이라

붙이고 자기가 쓰던 중고차를 팔았다.
날이 밝아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모로 누웠더니
몸에 조금의 온기가 느껴져 눈은 그대로 감은 채 나는 똑바로 누웠다.
한국에 있는 병석의 어머니, 동화책 외판원으로 매일 동분서주할 아내, 유아원에 하루 종일 생활하는
7살 5살 된 두 아들의 모습이 차 안 천장에 어른거렸다. 그 생각은 아직 할 때가 아니고 당분간
한국 생각은 떨쳐내야 한다고 고개를 좌우로 가늘게 흔들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은 잔상이

사라져 가는데 병석의 어머니 모습은 그대로 어른거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저쪽 큰길 쪽에서 삐웅삐웅 하며 지나가는 구급차

경적에 화들짝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저녁내 냉기에 시달려 바윗돌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차창 밖을 보니 날이 훤히 밝아져 있었다. 저녁내 깊은 잠을 못 자고 냉기에 부대낀 찬 몸을 녹이기엔 7.11 편의점 컵라면과 커피가 그만이었다. 운전석 자석 밑에 둔 신발을 주섬주섬 챙겨 신고 차에서 내려 7.11 편의점을 향했다. 이른 아침 가게 안은 일찍 출근하는 노동자들로 붐볐고

가게 중앙을 차지한 열두 종류의 커피가 담긴 커피포트가 한 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커피포트 옆에 컵라면 사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도 있었다.

나는 물건 진열대에서 컵라면을 하나 집어 들고 그 옆에 있는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발톱 모양의

하얀색 플라스틱 포크도 하나 챙겼다. 노숙인 처지에 커피를 매일 사서 먹으면, 커피값도 만만치

않았지만 밤새 냉기에 시달린 언 몸을 녹이려면 그래도 따뜻한 컵라면과 커피 한 잔은 먹어야 살 것 같았다. 컵라면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가득 붓고 디카페인 커피 한잔을 뽑아 차 안으로 돌아와

컵라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한 방울의 국물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입가심으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우선 배가 불러오며 밤새 냉기에 시달려 지치고 굳었던 몸이 서서히 풀어지며

나긋해지는 느낌이 들어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오늘 하루는 또 뭐 하지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눈이 많이 와서 어디로 움직이기도

그렇고 이럴 때 종석이 형님이 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짜 아파트 입구에

회색 목도리에 밤색 벙거지까지 푹 눌러쓴 종석이 형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아파트 귀퉁이에서 잰걸음으로 걸어오더니 7.11 편의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저께 밤 초저녁 7시쯤에 7.11 편의점 출입구 오른쪽 공중전화부스 앞에서 종석이 형님을

만났다. 7.11 편의점 출입구 옆 오른쪽 비 가리개 가림막 안쪽은 7.11 편의점 손님들이 음식을 서서 먹을 수 있도록 두 평 남짓한 공간이 있었다. 7.11 본체와는 빨간 벽돌로 칸막이가 돼 있었고 사람 넷이 앉을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칸막이 벽돌에 바싹 붙어 있었다. 의자에서 우측으로 두어 발짝

떨어진 벽돌벽에는 공중전화 한 대가 설치돼 있었다. 그 구석 벽에 설치된 공중 전화기로 한국에

있는 아내와 전화를 끝내고 막 나오는데 7.11 문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나이가 50대

초반쯤 되는 체구가 조그마한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국으로 전화하시는가 봐요?” 하기에 나도 모처럼 한국 사람을 만나 반가워, “예, 그래요, 이 근방 사세요,” 하니 턱으로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바로 이 아파트 단지 내에 산다고 했다. 우리는 인사나 하자면서 악수하며 통성명했는데, 그는 굵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 종석입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내가 한국의

아내와 하는 전화 통화 내용이 너무 애처롭게 들려 일부러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 후 우리는 연 사흘째 매일 아침 7.11 편의점 앞에서 만났다. 각자 7.11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나와 7.11 입구 오른쪽 공중전화박스가 있는 공간, 눈비를 막는 가림막 차양 아래 서서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 시간 이후부터 우리는 그해 겨우내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열 살이 더 많았지만 서로 말이 잘 통하고 적절히 필요했던 거 같다.
그 형님은 운전을 못 해 출퇴근할 때 버스를 타고 다니는 뚜벅이 신세인데 뜬금없이 내가 나타나

내 차를 타고 출퇴근해 좋았고, 나는 일가친척 친구 누구 아는 사람 한 사람 없는 타국 땅에서

불안하고 답답하던 차에 살갑게 대해주는 그 형님이 타지에서 만난 고향 형님처럼 반가웠다.

종석이 형님이 커피를 사 들고 7.11 편의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차에서 내려 7.11 편의점 출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출입구 오른쪽 지붕 차양 안쪽에 서서 커피를 마시던 종석이 형님이 나를 보더니, “왜 이리 일찍 나왔어.” 하며 그도 심심한 데 잘 됐나 싶었는지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모닝커피 한 잔 생각나서요”라고 대답하고, 7.11 편의점 앞 차양 밑에서 나란히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한국에서 미국 이민을 위해 차분히 준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혈혈단신으로

보따리를 싸 부랴부랴 입국한 상태였다. 해외 생활이 처음인 데다 낯설고 물선 미국 생활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게 생소했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았다. 반면에 종석이 형님은

이미 2년 전에 미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궁금한 점을 거의 다 겪은 상태였다.

내가 무슨 사안에 물으면 그는 마치 그 질문이 나올지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막힘없이 척척

대답해 주어 나의 궁금한 점이 바로 풀려서 좋았다. 자기가 경험한 지 얼마 안 된 일들이라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종석이 형님도 어디 가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심심해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담배도 살 겸 나왔다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 얘기하다 보니 커피잔을 잡은 손이 둘 다 덜덜 떨렸다.

종석이 형님이 너무 추워서 더 이상 못 있고 그만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하기에 별 바쁜 일 없으면 내 차에 가서 얘기나 좀 더 하자고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종석이 형님도 집에 가봐야

별 할 일이 없었든지 그러자고 하며 차 안으로 들어와 조수석에 앉더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차 뒷칸에 잔뜩 실린 내 물건들을 보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무슨 짐들이 이렇게 많아?”라고

물었다.

그때까지 종석이 형님은 내가 이 추운 날씨에 노숙인으로 차 안에서 지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물쩍거리다가 “아. 내 살림이요” 했더니 차 뒤 칸 한쪽에 길게 둘둘 말아

개어놓은 얇은 여름 홑이불이 그제야 눈에 띄었던지 “그럼 이 차 안에서 잔다는 말이야”라고 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짧게 ‘예’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어젯밤 그 추위에 이 차 안에서 잤다고?”라고 반문하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며 “예”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 형님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허허, 그동안 말로만 듣던 워싱턴 D.C 인근 지역 한국인 노숙자가 바로 내 옆에 여기 있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날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진솔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나는 지난 두 달여간 나에게 있었던 얘기를 숨김없이 그대로 다 털어놨고,

종석이 형님도 지금 자기의 처지를 대강 얘기했다. 한국에서 3년 전 아내와 사별했고,

광화문 우체국을 마지막으로 23년 근무한 체신부 공무원을 퇴직했으며, 오랜 투병 끝에 사별한

아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내와 관계되는 사람을 만나면 아내가 생각나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이참에 한국을 아예 떠나면 아내 생각이 좀

안 날까 해 이민을 결정하고 고등학교 중학생인 아들 딸을 데리고 미국에 온 지 2년 됐다고 했다.
아들과 딸은 기숙사가 있는 사립 중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는 스몰 비즈니스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퇴직금 7천만 원이 불과 2년 만에 다 날리고

지금은 영주권 절차를 위해 만난 여자 집에서 간신히 몸만 얹혀살고 있다고 했다.

웬만하면 이 추운 겨울 며칠간이라도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면 좋을 텐데, 지금 사는 여자 집에

식구도 많고 자기도 간신히 얹혀사는 처지라 그럴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저녁에 여기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7.11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운전을 못 해 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그 말끝에 그러면 내가 직장까지 내 차로 태워 드릴 테니

저녁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지금 노숙하는 애난데일 7.11 편의점 가게 앞 주차장은 미국 거대 잡화 가맹점 자이언츠와

주차장을 함께 사용하고 있어 저녁이면 경찰차들이 주기적으로 순찰해서 늘 조심스럽고 불안했다.

그날 새벽처럼 밤늦게 흑인과 남미인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날이 많아 늘 긴장되고 불안해서

깊은 잠을 못 자고 저녁내 선잠을 자며 뒤척이다 날이 새는 날이 많았다.

그 형님 일하는 7.11 편의점 주차장에 주차하면 그래도 좀 편안한 마음이 들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석이 형님도 버스 타고 가려면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 걸어가야 하고,

직장까지 가는 버스가 자주 다니지도 않아 한 시간여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겹다며 그렇게

해주면야 자기는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 합의가 되어 그날부터 종석이 형님 일하는 날에는 내 차로 출퇴근을 해주고, 나는 그 형님이 일하는 7.11 편의점 주차장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됐다.

종석이 형이 일하는 7.11 편의점은 내가 차를 주차하고 있는 애난데일 패트리어트 아파트 입구

7.11 편의점 주차장에서 10여분 거리인 폴처치 H 마트 앞, 큰길 사거리 신호등을 만나면 계속

직진해 가다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장 DMV 조금 못 가 갤로스 로드 큰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내차로 그 형님과 같이 출근한 첫날부터 형님이 일하는 7.11 편의점 주차장 한쪽 구석에 차를

주차해 놓고 밤을 지내니 생각대로 애난데일 자이언츠 몰 주차장보다는 훨씬 편하고 좋았다.

큰길 옆이라 차 다니는 소음이 귀에 많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아는 형님이 바로 앞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에 일단 마음이 편해서

심적으로 안정이 되어 그런지 잠깐씩 자는 쪽잠이라도 깊게 잘 수 있었다.

좋기는 종석이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종석이 형님은 7.11 편의점 계산대를 맡고 있었는데,

편의점 내 커피 끓이는 일과 물건이 팔린 빈 진열대에 7.11 편의점 뒤쪽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와 물건을 채우며 종석이 형님을 보조해 주는 베트남 사람이 새벽 네 시면 퇴근했다.

그는 아침 7시쯤 교대자가 올 때까지는 3시간은 혼자 일해서 늘 불안했다고 했다.

남미나 흑인 청년들이 밤늦게까지 모여 놀다가 서너 명이 떼 지어 우르르 몰려와서는 가게에 혼자
일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은 갑자기 돌변한다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이 물건값 계산대 앞에서 가게

물건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척 말을 시키면 묻는 말에 대답해 주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다른 사람들은 맥주 등 자기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 물건값도 안 내고 뻔뻔스럽게 출입문을 통해 유유히 걸어 나가면 혼자 근무해 어떻게 제지할 수 없다고 했다. 7.11 편의점 가게 매니저도

그런 경우에 섣불리 대응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 한다고 했다. 그런 막무가내 절도 행위를 혼자

막으려다 피차간 누구 한 사람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회사가 그 일을 처리하려면 더 손해가 난다

하며, 물건은 결손 처리하면 되니 괜히 혼자 무리하게 방어 행동을 하다 일이 더 커지니

그냥 놔두라 한다고 했다.

종석이 형님은 우스갯소리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한창 피가 끓어 물불 안 가릴 젊은 놈들,

덩치는 웬만큼 커야지 크기가 산적같이 큰 놈들이 맘먹고 한 방 날리면 그들에 비하면 왜소한

몸인 나는 저만큼 나가떨어질 텐데, 그들을 상대하기는 한참 부족한 역부족이고,

그들의 물건 강탈 행동을 혼자 막으려다 몸이라도 다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이었다.

그럴 땐 속으로 “에라, 이 나쁜 놈들아! 나도 모르겠다, 너희 나라 것이니 너희 맘대로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며 그냥 모르는 척한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얼마 전부터 새벽 시간에 자기 혼자 일하는 것을 알고 덩치가 크고 인상이

우락부락한 흑인 서넛이 떼 지어 들이닥쳐 마약에 취해 횡설수설한다고 했다.

마약에 취한 몽롱한 상태에서 어떤 충동적인 행동을 할지 모르는 일이라, 그럴 때면 무섬증 나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거린다고 했다. 그래서 조만간 7.11 편의점 밤 일을 그만두려고 하던 차에

요즘은 내가 밖에 있으니 자기도 내심 든든한 감이 들며 안심이 된다고 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내가 또 좋은 것은 7.11 편의점 규정에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은 즉시 폐기 처분한다고 했다.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을 실수로 손님에게 팔았다가 식중독이라도 걸리면, 7.11 편의점 평판에

큰 타격을 입을뿐더러 막대한 손해 배상이 뒤따른다고 했다. 그래서 유효기간이 지난 식품은

그 즉시 7.11 편의점 내 비치된 대형 덤프 쓰레기통에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금방 먹기에는

아무 탈이 없는 유효기간 지난 식품들을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당시 내 주머니 사정은 차 연료비가 없어 차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먹는 것이 시원찮아 늘 허기진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유효기간 지난 빵 종류 간식거리가

고정적으로 생겨 반갑기 그지없었다. 어떤 날은 빵, 핫도그, 도넛, 깡통에 담긴 소시지들이 물건

담는 제법 큰 노란 봉투로 두 봉투쯤 되어 차 트렁크 뒤쪽에 놓고 매일 조금씩 먹었다.

겨울이라 음식이 쉽게 상하지도 않아 며칠 후까지 먹어도 배탈은커녕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고생하던 몸이 영양이 충분히 공급되자 점차로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기운이 없어 늘 피곤하던 몸 상태도 차차 나아지고 있었고 차 안에서 자는 쪽잠이지만,
일단 잠이 들면 깊은 잠을 자게 되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가뿐하고 새 힘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종석이 형님이 일이 끝나면 저녁내 일해 피곤해하는 그 형님을 내 차로 집에다 태워다 주었다.

그렇게라도 그 형님이 밤일하는 날이면 덜 심심한데, 일주일에 일을 안 하는 이틀은 하루 종일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그런 날은 자이언츠 몰 뒤편 주차장 한적한 구석 나무 밑에 차를 주차하고

차 안에서 책도 좀 보다가 졸리면 그대로 앉아서 좀 졸다가 했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면 해바라기 하며 하루 종일 보내려니 너무 지루하고 심심했다.

그즈음 어느 날, 아침에 밤일을 끝낸 형님을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가는데 애난데일 큰길 사거리

7.11 편의점 앞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버어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를 거치며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한 바퀴 도는 495번 순환도로,

출구 번호 52B로 나오면 한인 밀집 지역 애난데일시가 있다. 52B 출구로 막 나오면 큰길 사거리

교차로 왼쪽에 위치한 7.11 편의점 가게 앞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내가 종석이 형님에게 저 사람들 왜 저기에 서 있냐고 물으니 하루 일거리 잡으려는

사람들이라고 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별 기술이 필요 없는 아무 일이나 하는 일당 잡부들이라고 했다. 나도 내일 아침부터 형님을 집에 내려놓고 곧장 여기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학교에 다닐 때까지 일당 일을 하러 아침마다 그 7.11 편의점 앞에서

남미 노동자들과 섞여 서성거리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 지역에는 한국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더군다나 나처럼 맨땅에 헤딩하기로 무작정 미국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형편이 어렵지 않아 거기에는 한국 사람, 아니 동양 사람은 늘 나 혼자였다.
겨울인 데다 눈이 많이 와서 밖에서는 일할 수가 없어 일감이 많지 않았다.

아침에 일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도 애난데일 큰길 사거리 7.11 편의점 둘레에 남미에서 온 일용직 근로자들이 50명쯤 되었다.

다들 근심 가득한 초조한 표정으로 일감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날도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기존에 그 장소에 자리 잡고 있는 50여 명의 남미 노동자들의 텃세 눈치가 보여,

하루 일당 일꾼을 구하는 각종 건축 업자나 개인들의 눈에 잘 띄는 앞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7.11 편의점 건물 뒤쪽 모서리 자동차 바디샵 앞쪽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7.11 편의점 앞 주차장에 고급 차 벤츠 500이 정차하더니 키가 훤칠하고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50대 중반의 백인 남자가 내렸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겨울 반코트가 잘 어울리는 멋진

중년 신사는 좋은 직업과 돈 잘 버는 상류층이라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차문을 열고 내리자 남미 일용직 근로자들이 우르르 그의 곁으로 다가서 에워싸며

무슨 일을 하려고 하냐고 물었다.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건물 구석에 혼자 서있는 내가

눈에 띄었는지 남미 노동자들을 손으로 물리치며 헤치고 나와 나한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외 아유 프롬? (Where are you from?)” 해, 내가 “싸우스 코리아

(South Korea)”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더니 그는 자기 차 타고 일하러 가자고 했다.

나는 미국에 와 개인 집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고 무슨 일을 시키려는 지도 몰라 걱정이 됐다.

내가 차 안에서 서툰 영어로 내가 오늘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직업이 군의관이고 한국 오산 공군기지에서 2년 근무했다고 했다.

한국에 살아봐서 너를 보고 한국 사람인지 금방 알았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How come?) 하니,

그는 웃으며 한국 사람들은 옷을 깨끗하고 단정히 입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날 아침 7.11 편의점 앞의 일용직 노동자 중에서 구별되어 눈에 잘 띄게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그는 크고 고급스러운 단독 주택인 집에 도착해 오늘 할 일은 집 지붕 처마에 달린 거러(gutter)라고 부르는 물받이에 차 있는 나뭇잎 청소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지붕 처마 밑 물받이에 나뭇잎이

차 있어 지붕에 쌓인 눈이 녹으며 흘러내린 얼음물이 물받이를 따라 집 네 모서리 하수구로 빠지지 못하고 물받이를 넘쳐 현관문 앞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물로 현관 앞이 빙판이 되는 바람에 가족들이 집 현관으로 드나들다 넘어지는 얼음판

낙상사고를 미리 방지하려고 하는 일이라고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집 창고에 비치된 사다리를

가져와 지붕 처마에 세우고 올라가 집 둘레 물통을 말끔히 치워주고 땅으로 떨어진 나뭇잎도

깨끗이 청소했다. 나뭇잎이 가득 담긴 8개나 되는 대형 검정 쓰레기봉투를 쓰레기 치우는 덤프차가 가져가기 좋게 집 앞 우체통 옆에 4개씩 두 줄로 나란히 보기 좋게 잘 쌓아 두었다.

그는 내가 한 일에 만족한 듯, 역시 한국 사람들은 일도 깔끔하게 잘한다고 칭찬하며 원래 일용직

인건비가 시간당 10$이니, 5시간 일했으니 50$만 주면 되는데 일을 흡족하게 잘했다며

팁 30$ 합쳐 80$를 주었다.

그때 내 형편은 조건이 안 돼 은행 계좌도 못 열고 현금을 지갑에 가지고 다녔다.

지갑에 있는 돈은 고작 3.40$가 전부인데 돈 80$(약 9만 원) 이란 거액이 지갑에 들어오니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미국에서 돈을 받고 한 첫 노동에서 “한국인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일도 깔끔하게(neat) 잘한다”는 중년 신사에게 들은 칭찬은 내게는 조그만 국위 선양을 했다는 한국인의 자부심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좋은 추억이다.

그런 날은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하루고, 거의 공치는 날이었다.

일이 없는 대부분의 날은 차를 자이언츠 몰 뒤 주차장 한쪽 구석 해가 비치는 담 옆에 주차하고,

어릴 적 고향 시골 마을 담장 옆에 서 있는 해바라기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종석이 형님

밤일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일과였다.

그런 반복된 생활이 두 달이 되어갈 때쯤 지금부터는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미국에 들어오는 공항 입국대에서 여행 목적이 뭐냐고 물어보면 친척 집 방문하러

온다고 말해야 여권에 체류 허가 6개월짜리 직인을 찍어 주는데, 나는 그런 정보를 누가 알려주지

않아 전혀 모르고 입국대에서 떠듬거리는 영어로 그냥 관광하러 온다고 하니 체류 기간 한 달자리 직인을 찍어주었다. 그래서 한 달이 되기 전 이민국에 연기를 신청하니 세 달 더 연기해 주었다.

연기해 준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시 이민국에 관광비자를 학생비자로 바꾸는 절차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으로 다녀야 할 학교에서 입학 허가서가 필요했다. 다행히 종석이 형님이

이 과정을 거쳐서 영주권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다녀야 할 학교에 가서 입학 허가서를 받아야 이민국에 관광비자를 학생비자로 바꾸는

비자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종석이 형님이 일 쉬는 날을 잡아 그가 다녔던 워싱턴

D.C에 위치한 학교에 갔다. 학교는 워싱턴 D.C 전철 유니언 스테이션 역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5층짜리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학교 학생처에서 이 학교 입학 허가서를 받으려면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를 물어보니,

여권 사본이니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니 그런 서류는 준비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는데,

제일 큰 문제는 은행 잔고 증명서였다. 학교에 다니려면 학비가 있어야 하니 학비를 충당할

은행 잔고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하냐고 하니 최소한

8.000$( 약 880만 원)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 꼭 내 통장에 있어야 하냐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친척이나 지인이든 누가 됐든지,
그 사람이 상황에 따라 너의 학비를 보조할 용의만 있으면 아무 사람이거나 상관이 없다고 했다.

내 수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은행 계좌를 개설할 자격 요건이 안 돼

은행 통장도 개설을 못 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이 일을 어떻게 하냐며 긴 한숨을 쉬며 걱정하니 종석이 형님이 나의 걱정이 너무 안 됐다 싶었던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확실히 된다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은행 잔액 문제는 자기가 어떻게 한 번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님은 미국 서민들은 통장에 여윳돈 2.000$( 약 220만 원)만 있으면 부자라며,

한 달 번 돈은 그달에 다 소비하게 빈틈없이 짜인 사회 소비 시스템상 일반 서민들은

그런 큰 여윳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종석이 형님이 8.000$(약 900만 원)이라는 큰 액수의 잔고 증명서를 어디서

구하기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이민국에 비자 신청 마감일은 닥쳐오는데 은행 잔액 서류가 준비 안 되어 애가 탔다.
며칠 후 종석이 형님이 자기가 5.000$짜리 잔고 증명서는 마련할 수 있겠는데, 나보고 나머지 3.000$짜리 잔고 증명서를 어디 부탁할 데가 없느냐고 했다.

나는 종석이 형님에게 전에도 말했듯이 미국에는 일가친척이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돈네 팔촌 한 사람 없고 내가 시골 출신이라 친구며 지인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며,

나를 여기로 오게 한 워싱턴 DC 플로리다 마켓 강 사장과 관계가 그렇게 된 이상 내가 지금

미국 땅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형님 단 한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종석이 형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야, 이 일을 어쩌냐, 큰일이네” 하며,

이민국에서 체류 허가한 기간의 날짜를 하루라도 넘기면 바로 불법체류자로 처리되고,

하루라도 불법 체류자가 되면 그 후는 서류 절차를 아예 진행할 수가 없는데,

하며 참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부터 은행 잔액 서류 때문에 저녁에 잠이 안 왔다. 내가 불법체류자가 되면 한국에 남은

가족들인 아내와 두 아들이 나중에 공항의 입국 심사대에 내가 이미 불법체류자가 된 신분으로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내 체류 신분이 이민국과 연계된 공항 컴퓨터에 분명히 뜨게 될 텐데, 그러면 아내와 아이들은 입국 심사에 걸려 미국 땅 밟지도 못하고 공항에서 바로 한국으로 되돌려 보낼게 자명한 일이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3.000$짜리 은행 잔고 증명서를 구할 길이 없었다.

신청 기한이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다.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그날 아침도 늘 내가 주차하고 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애가 너무 타서 그런지 식욕이 전혀 없어 어제부터 전혀 음식을 못 먹고 있었다. 음식을 못 먹으니 너무 속이 쓰리고 현기증이 너무 심해 7.11 편의점에서 평소에 좋아하던 초콜릿 우유 한 병을 사

차로 돌아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우유가 시커멓게 애가 탄 뱃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우유가 목을 타고 배속에 닿자 곧바로 속이 울렁거리면서 목으로 치올라 급히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7.11 편의점 뒤편 담으로 쳐있는 철조망을 잡고 다 토해냈다.

전날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거의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의 시간이 계속되니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흐릿한 정신으로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쪽에서 종석이 형님이 환한 얼굴로 바쁘게 걸어오며

내차 있는 데를 보고 손에 쥐고 있는 하얀 종이를 분주히 흔들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차 문을 열면서 남은 3.000$(약 330만 원) 짜리 은행 잔고 증명서가 준비됐다는 것이다.

정말 그의 손에는 5.000$(약 550만 원) 짜리와 3.000$(약 330만 원) 짜리 은행 잔고 증명서

두 장이 쥐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비엔나 페어팩스 롯데 옆 변호사 사무실로 가 학생비자 신청을 했다.

비자 신청을 하며 변호사 비용으로 1.000$( 약 110만 원)를 지불했다.

그동안 가끔 어쩌다 하루씩 하는 일당 일해 악착같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 1불 10센트 하는

커피 한 잔을 맘 편히 못 사 먹고 아껴가며 모은 돈 1.000$(약 110만 원)를 변호사 서류비용으로

주고 나니 지갑엔 총 재산 십몇 불이 남았다.

천만다행으로 종석이 형님 도움으로 비자 신청 마감 일보 직전에 서류 신청을 끝냈으니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종석이 형님은 그동안 동생, 네가 걱정하고 애타던 일이 잘 해결됐으니 어디 가서

맘 편히 밥이나 먹자고 했다. 내가 아, 형님! 고마워서 점심은 내가 사야 하는데,

나는 점심 살 돈이 없는데” 하고 머뭇거리니, 그는 “걱정하지 마! 밤값은 내가 낼게.” 했다.

우리는 곧장 애난데일 사거리 7.11 편의점 왼쪽에 있는 "예촌”이라는 한국 식당으로 가

종석이 형님은 해장국을 시키고 나는 김치찌개를 시켰다. 주문을 기다리면서 종석이 형님이

“야! 아무래도 동생 너의 앞길은 하느님이 좀 돌보는 같다”라고 하며,

종석이 형님은 3.000$짜리 은행 잔고 증명서를 어렵사리 구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어제까지도 도저히 3.000$짜리 잔고 증명서를 구할 길이 없었는데, 1년 전부터 자기 통장으로

돈 송금을 해오던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어젯밤 늦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형님이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한국의 형님 친구 가족이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유학시키려고 엄마와 아들들만 여기서 기러기 가족으로 산다고 했다. 그들도 나처럼 은행 계좌 개설할 조건이 안 돼 한국에서 보내는 돈을 형님 통장으로 받아 계속 전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달 돈 보낼 날이 아직 2주일이나 남았는데 그때 마침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매달 보내는 돈을 3일 전에 이미 보냈으니 통장 확인해 보라고 해서 오늘 아침 은행으로 가서 통장 확인해 보니 딱 3.000$ (약 330만 원)가 입금돼 있었다고 했다.

친구 부인에게 내가 처한 딱한 상황을 설명하니, 친구 부인도 흔쾌히 승낙해 은행으로 가

3.000$(약 330만 원) 짜리 잔고 증명서를 떼어 가져왔다고 했다.

종석이 형님은 “야, 놀랄 노 자다, 어떻게 이렇게 적시에 꼭 필요한 잔액 3.000$(약 330만 원)이

입금될 수가 있냐며 자기도 그동안 걱정 많이 했다며 잔고 증명서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어

마음도 후련하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미국 입국해 3개월 만에 먹어보는 한국 음식이었다.

종석이 형님이 선지가 둥둥 떠 있는 해장국을 저으며 오랜만에 해장국 먹는다고 입맛을 다셨다.
나도 김이 모락모락 하얀 쌀밥을 수저 한가득 퍼 입에 넣고 얼큰한 김치찌개를 수저에 가득 떠

입에 넣는데, 며칠 동안 잔고 증명서를 구할 길 없어 입에서 쓴 내가 날 정도로 애가 탄 뱃속에서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들이 겹쳤던 거 같다. 감정이 복받친 제일

큰 이유는 종석이 형님이 자기 일처럼 신경을 써주어 나를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하게 해 준

고마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울먹이느라 밥을 못 먹고 있으니,

종석이 형님이 “야! 아줌마처럼 왜 울고 그러냐?” 해, 내가 시치미를 떼며 “김치찌개가 너무 매워서”하고는 둘 다 허허 웃고 말았다.

내가 공깃밥과 김치찌개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뚝딱 먹어 치우자, 종석이 형님은 웨이트리스를

불러 여기 공깃밥 하나 더 주고 빈 국그릇 하나 주라고 했다. 웨이트리스가 밥과 빈 국그릇을

가져오자, 공깃밥과 자기 먹기엔 해장국량이 너무 많다며 다른 그릇에 갈라놓았던 해장국을

내 빈 국그릇에 부어주며, 그동안 동생 너 애 많이 탔겠다며 앞으론 가끔 여기 와서 식사하자 했다.

그러나 그날이 그 형님과 하는 마지막 식사 시간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입학 허가가 떨어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20년 만에

학생이 되었다.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제2 언어로써 영어) 코스 프로그램을 배우는

학교였지만 오랫동안 놓았던 공부를 다시 하게 됐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걱정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설렘과 기대도 컸다. 학교생활은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우선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교수 방법이 내가 20년 전 한국에서 받았던 학교 수업과는 판이하게 느껴졌다. 외우는 암기 수업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해하기 쉽게 자료도 많이 준비하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고 관심이 많은 어학 수업이라 더 재미가 있었다.

금세 서너 주일이 지나고 학교에 다닌 지 한 달여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거의 매주 그 주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에 종석이 형님을 만났는데 그날은 표정이 시무룩했다.

내가 형님 안색이 너무 안 좋다고 하며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요 며칠 걱정거리가 있어 상심했다고 했다. 그는 집안 형님이 있는 뉴욕으로 가게 됐다고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지금 같이 사는 여자 하고는 영주권 취득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고 처음 약속했던 대로 살림에

보태기로 한 거액의 돈을 이미 다 지급했는데, 최근에 어떻게 자기 앞으로 등기가 된 아파트 한 채가 서울에 있는지를 알았다고 했다. 그 후부터는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동원돼 영주권 받고 미국에 살게 해 주었으니 아파트 팔아서 돈 더 내놓으라고 온갖 협박을 하며 괴롭혀 왔다고 했다.

그런 곤란한 상황에 자기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뉴욕에서 그로써리를 크게 하는

사촌 형님이 마침 직원 하나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물건 계산대를 맡길 사람이 한 사람 급하게 필요하니 네가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뉴욕으로 가기로 마음을 결정하고 내일 아침에 뉴욕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종석이 형님이 떠나버리면 나는 정월 대보름 다음 날

허허벌판에서 끈 떨어진 연이 되어 지낼 일을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빠지며 금방 맥이 풀렸다.

종석이 형님이 풀이 죽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내 기분을 바꿔주려고 그랬는지,

“ 야, 동생! 너 오늘 주말 시험 봤지, 그 시험지 한번 내놔 봐” 했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시험지는요” 했더니, 그는 “ 잔말 말고 어서 내놔봐, 이번 주도 점수를 확인해야지” 했다.

나는 마지못해 가방에서 오늘 본 시험지를 내어주니 종석이 형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 야! 동생 너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 더 늦기 전에 꼭 공부를 한 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놈의 세상 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돈이 원수다, 원수”라고 했다.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에 종석이 형님도 다닌 적이 있어 그 학교 수업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매주 금요일에 그 주 배운 학습 내용을 평가하는 주말 평가 시험 내 점수를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치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시험지를 어머니가 확인하듯 내 시험 점수를 궁금해하며,
안 보여주려는 나를 채근하며 오늘 본 시험지 점수 좀 보자고 했다. 그는 주말마다 보는

내 시험지를 볼 때마다, 나는 이 학교 다니며 이런 좋은 점수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동생 너는 어학에 소질이 많은 것 같다며 칭찬했다.

그날 내 시험 점수는 주관식 열 문제에서 아홉 문제는 맞고 한 문제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동그라미 아홉 개에 세모 한 개를 받은 95점 자리 시험지였다. 종석이 형님은 그 시험지를 둘둘

말아 쥐더니 애정이 담긴 시선을 내게 보내며 시험지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툭툭 내리치며
“야, 동생! 너는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머지않아 한국에 있는 가족도 데려오고,

앞으로 꼭 좋은 날이 올 거야,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이런 고생이 네가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양분이 될 테니, 지금처럼 꿋꿋이 잘 견뎌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험지를 앉아 있던 자리에 놓고 일어나며 내일 아침 워싱턴 D.C 에서 뉴욕 가는

고속버스 첫차로 출발하려면 인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차 밖으로 나와 와락 껴안고 긴 작별의 포옹을 했다. 나는 내게서 멀어지는 형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 내 시야에서 형님 모습이 멀어지자,

내가 숙식하는 차 안으로 돌아왔다.

종석이 형님이 금방까지 말아 쥐고 있었던 시험지, 형님의 따스한 손 기운이 남아 있는 듯한

시험지를 집어 들고 펴서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시험지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그대로 쳐다보고 있으니, 춥고 힘들었던 지난겨울의 시간이 한 편의 기록 영상이 되어 시험지 위로 비치고 있었다.

종석이 형님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겨우내 붙어 다니며 보냈던 추운 겨울의 따뜻한 순간들이

시험지 위로 순차적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흐르던 영상이 딱 멈춰 섰다.

시험지 위에는 종석이 형님이 은행 잔고 서류 두 장을 들고 서서,

“동생! 너 이제 불법체류자 신세 면하게 됐다”며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뜨겁고 굵은 눈물방울이 시험지 위로 똑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