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물든 쌀 포대

by 감동의 날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아이고 피곤해”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렇게 누워서 커튼이 열린 창문으로 밤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별 앞에 뜬 둥근 보름달이 하얀 구름에 반쪽이 가린 것이 마치 예식장 신부대기실에서 엷은

면사포를 쓴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저 구름만 걷히면 한 폭의 멋진

풍경화가 밤하늘에 펼쳐지겠는데” 했더니, 하얀 구름이 내 말이나 엿들은 것처럼 달 앞에서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나는 “와! 보름달 달이네!” 하니 그 말에 달이 응답이라도 하는지 둥근 보름달이 한껏 멋을 부리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읍내 영화관 뒷면의 영사실에서 관객의 머리 위로 빛을 쏘아 앞쪽에 무대 화면을 비추듯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포근한 달빛이 내가 누워있는 거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부분이 한 컷씩 바뀌는 무대 화면 같다고 생각하며 달빛이 냉장고를 비추어 내 시야는 냉장고 주위를 보고 있었다.

냉장고 밑에 쌀 포대가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쌀 포대는 40파운드짜리 큰 쌀 포대고, 두세 번째는 작은 20파운드짜리,
그리고 나머지 한 포대는 밥 할 때마다 조금씩 섞어 먹는 10파운드짜리 현미 찹쌀 포대였다.

나는 쌀 포대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 야, 우리도 이제 부자네”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저절로 나오고 말았다. 내 지금 사는 형편을 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엉겁결에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으니, 더군다나 기화만 있으면 나의 무능을 탓하며
궁지로 몰아넣은 무서운 아내가 옆에 있는데, “아차” 했을 때는 내가 뱉은 말은 이미 내 입술을 떠나 아내의 귀에 도달해 있었다. 설거지하는 아내가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 나에게 반문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당신 지금 뭐라고 했소” 해, 나는 “응 아니야!” 나 혼자 그냥 한 번

중얼거린 본말이야”라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발뺌해 봐야 무마시키기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는,

나는 “에라, 모르겠다”라고 호기를 부려 조금 전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응, 이제 우리 부자라고” 했다

아내는 설거지가 다 끝났는지 마른행주로 젖은 손을 쓱쓱 닦고는, 내게 한 판 대차게 따지려는지,
내가 누워있는 반대편 소파에 주저앉았다.

“당신 지금 우리가 부자라고 했소, 호, 호,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이 실없는 헛소리를 들으면 옆집 메리 할머니 산책하는 데 앞장서는 푸들 강아지가 자다가

배꼽 잡고 웃겠소” 하며 옆집 푸들 강아지가 자다 웃는 이유를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국 이민 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남들 다 있는 집 한 채가 있소,

젊은 애들도 잘 만 타고 다니는 고급 차가 한 대 있소,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 내 생일 때 메이커 있는 옷 한 벌을 사주었소,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나한테 어디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한 번 사주었소.”

여름날 장마철에 불어난 폭포수처럼 쉬지 않고 쏟아붓는 불평에 숨이 차는지,

숨을 들이쉬려고 잠깐 멈칫하는 사이, 내가 얼른 아내의 말에 끼어들었다.

“ 당신 그렇게 열 내지 말고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가 미국 생활 18년이 됐지만, 10년은 영주권이 없어 핸드폰 하나 내 이름으로는 살 수가 없는 처지라, 제대로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내가 아파서 병석에 있느라 거의 3년을 병상에서 누워 보냈으니,

제대로 미국 생활한 지는 한 5년밖에 더 되오, 폐일언하고 앞으로는 내 일도 잘 풀릴 것이니

지금부터는 당신 호강할 일만 남았소.”라고 말했다. 이 말 또한 혀를 꽉 깨물고 참아야 했는데,

그 순간을 못 참고 뱉어내는 바람에 아내의 화를 더 돋우고 말았다.

아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오른손을 내 쪽으로 크게 휘휘 내저으며,

“하이고! 가당치도 않은 말 그만 두시요, 당신 나이도 이제 예순이 내일 모래인데 젊었을 때

못 번 돈을 손발 풀기 다 떨어진 이 나이에 무슨 수로 돈을 벌겠소, 돈이 어디서 당신 기다리고

있다는 기별이라도 받았소, 당신이 돈을 좇아 십 리를 가면 당신에게 안 잡히려는 돈은 삼십 리는

앞서 도망칠 거니, 인제 그만 그런 헛된 꿈을 깨는 것이 우리들 늘그막에 신상에 좋을 것이요”라는 아내의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불평에 살짝 화가 나려는데, 구세주처럼 냉장고 밑의 쌀 포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당신 그렇게 막무가내로 흥분하면 정신 건강에 안 좋으니,

제발 흥분 좀 가라앉히고 저기를 좀 보라고, 냉장고 옆의 달빛 받는 저 쌀 포대를,

아내가 눈길을 돌려 쌀 포대를 보더니 한순간에 기세가 푹 꺾이었다.

금방까지 기세등등하게 나에게 자 장마철 폭포수처럼 몰아치던 불평을 멈추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하기야 그때 비하면 우리는 지금 엄청 부자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도 나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구먼,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요.” 했다.

우리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고요해지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뿌우하는 기적 소리를 내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 열차를 탔다.

타임 열차는 방금 나에게 무능한 남편이라고 면전에 대놓고 한바탕 속 시원하게 불만을 퍼부은
아내와 나를 나란히 태우고 18년 전 그때를 향해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아무 연고가 없는 워싱턴 교외에 위치한 메릴랜드주 프린스 조지 카운티의
그린벨트라는 동네 지하 셋방에 살고 있었다. 나는 1년 전쯤에 미국에 미리 입국했고 아내는

7살 5살인 두 아들과 함께 6개월 늦게 미국에 입국해, 이 지하 셋방에 5개월쯤 살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민 변호사가 말하기를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애들이 바로 학교에 들어가면 나중에

영주권 신청할 때, 자칫 거부당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영주권 심사관이 “당신은 입국하자마자

애들을 바로 학교에 보내는 것을 보면 미국 입국이 순전히 관광목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

미국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당신의 미국 입국 목적은 아예 여기에 주저앉아 살려고 들어온 것으로,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당신은 우리 이민국을 속인 것이 되기 때문에 영주권 신청을 거부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얘들이 6개월 기다렸다 학교에 들어가려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한

고 집사님 부부는 집에서 노는 우리 애들을 보고는, “애들이 저렇게 집에서 놀지 말고 빨리 학교에 다녀야 할 텐데”라며 걱정을 하셨다.

나는 학생비자 신분을 유지해야 했기에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 30분에 끝나는

ESL (제2외국어로서 영어) 코스 영어 학습반에 등록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이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이 방세가 한 달에 650$, 학비가 600$, 거기다가 네 식구 식료품비, 차 연료비 등 아무리 아껴 써도 매달 최소한 2.000$(약 220만 원)가 필요했다. 나나 아내도 한국에서 미국에

올 때 비행기 삯도 없어서 형제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주는 돈으로 간신히 비행기 표를 사 겨우

몸만 온 실정이어서 여윳돈이 있을 리 없었다.
아내와 아들들이 입국해 처음 서너 달은 한국에서 아내와 나의 형제들이 조금씩 송금해 주는

돈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다시피 버티며 생활했다. 그 생활을 하루빨리 면하려면 내가 빨리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내 바람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학생 신분이라 합법적으로 풀타임 일을 할 수가 없고 낮에는 학교에 가야 했다. 그래서 임금을 대개 현금으로 당일 주는 낮에 일하는 건축 일당 잡부 일도 더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밤에 일하는 식품 도매점이나 주류 소매점 같은데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그마저 쉽지 않았다. 친척이나 친구가 있어야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데, 그런 인맥이 전혀 없으니 쉽게 일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주 수입은 토요일과 일요일 건축 잡부 일해서 받는 일당이 전부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메릴랜드주에서 한 시간여 차를 운전해 그전에 내가

살았던 버지니아주 애난데일 7.11 편의점 앞에서 남미 노동자들 틈에 서 있다가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내 수입 전부였다. 하루 일해 봐야 고작 하는 일이 기술자들

도와주는 헬퍼 일이라, 어떤 날 밤늦게까지 일해 일당 100$(약 11만 원)를 받으면 그날은

운수대통한 날이고, 대부분 일당이 70$(약 8만 원) 선이었다.

한 달 내내 주말을 하루도 허탕 안 치고 8일 일해야 600$에서 700$(약 77만 원)가 총수입이어서,

한 달에 최소한 2.000$ (약 220만 원)이 들어가는 생활비를 맞추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 결석을 하고 일주일에 3.4일씩 하루 일당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일당 헬퍼가 필요한 대개의 건축업자가 한국 사람들이다 보니 나하고 일을 해 보고서는 말도 통하고 시키는 일은 곧 잘하니, 쉬지 말고 일주일 내내 계속하자고 했지만, 나는 학교 출석하는 일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놈의 학교만 안 다니면 지금의 생활을 그럭저럭 버텨 나갈 수 있겠는데

학교를 안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마저도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며칠 전에 학생과에 불려 갔다. 대부분 유학생은 학비를 6개월 치를 학기 시작 전 등록을 하며

한 번에 다 냈다. 나는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한 번에 못 내고 한 달씩 나누어 내는 데도 그것도

제때 못 내고 있었다. 얼마 전, 학비 연체 문제로 면담 요청이 또 있었다. 그전 두 번이나 면담해서 안면이 익은 50대 중반 금발의 백인 여성 학생 주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결석을 많이 하면 학교 규정상 어쩔 수 없이 이민국에 출석 일수 신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민국에 신고가 제출되면 나의 학생비자가 취소되어 불법체류자가 될 게 분명했다.

나는 앞으로 출석을 잘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용지를 한 장 주더니 사인을 하라고 했다. 내용을 읽어보니 학교에서는 충분히 이 사항을 학생에게 알렸고,

앞으로 다시 출석률이 미달이면 학교 규정상 어쩔 수 없이 퇴학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결석도 못 하게 됐으니,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설상가상으로 연 2주나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날씨로 인해 주말 일당 일을 못 해 수중에 돈이

없어져 가니, 애가 타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가 돈 걱정에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즈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기운이 하나도 없이 시무룩해 있었다.

어디 아프냐고 하니, 아내는 멈칫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애들이 밥을 안 먹어서”라고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집 뒤 지하 셋방으로 들어오는데 애들이 출입문 앞에서 공기놀이하는데

둘 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핼쑥해 보였다. 그래서 애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왜? 하고 물으니, 아내의 눈은 출입문 옆에 놓인 쌀 포대를 쳐다봤다.

애들이 아침에 저 쌀 포대를 보고 아침부터 밥을 안 먹는다고 했다.

쌀 포대 쪽으로 가서 보니 쌀 포대 속 바닥이 보일 정도로 쌀이 바닥에 조금 남아 있었다.

쌀 푸는 조그만 그릇으로 두세 그릇쯤 되는 우리 식구 한두 끼 먹으면 끝날 양이었다.

내가 내일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쌀값을 좀 꾸어 올 테니 애들한테 식량 걱정하지 말라 하고,

당신은 어서 밥 해 애들 먹이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학교에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한테 돈을 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염치없어서 그 짓도 못 할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일은 학교 끝나고 신문에 난 구인 광고란을 보고 밤에 하는 일을 잡아야겠다. 그래서 주인에게 내가 처한 사정을 잘 말해서 우선 당장 구해야

쌀값을 좀 가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신문에 구인 광고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난다는 걸 그즈음에야 알았다.

그래도 워싱턴 D.C 흑인 밀집 지역에 있는 주류 소매점이나 식품 도매점에 가끔 일자리가 났기

때문에 운만 좋으면 내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주류 소매점은 밤늦게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이 약이 취한 상태에서 많이 드나들어 가끔 총기 사고가 났다.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대부분 그런 일들은 피했다. 미국은 총기가 난무하기 때문에 대부분 흑인들이 마약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로 가게에 들어와 단돈 몇십 불 때문에 총을 들이대고 돈을 강탈해 가는

사고가 가끔 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리꿔 스토어"라 불리는 주류소매점

일은 될 수 있으면 다 안 하려 피했다. 식품 도매점은 저녁내 추운 냉동 창고에서 무거운 냉동 물건 상자를 정리하는 일이라 대부분 그런 일은 남미에서 건너온 불법체류자들 몫이었다.

이 판국에 힘들고 목숨이 위험하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애들이 식량이 없어 굶는 것을 생각하면

죽든지 살든지, 그것은 나중 일이고 나에게 지금 시급한 일은 어린 두 아들과 아내를 굶기지

않으려면 내일 당장 쌀 한 포대를 구해 오는 것이었다.

내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일자리를 잡아야 했다.

저녁 내내 내일 일자리 걱정 때문에 밤새 뒤척대느라 잠이 안 왔다.

이튿날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판대로 달려가 25센트 자리 코인 5개, 1$ 25센트를 넣고

한국일보 한 부를 꺼내 들었다. 신문구인난에서 주류소매점과 식품소매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 구한다는 가게 5개를 추려내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었다. 공중전화 부스로 가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는, 신문에 나온 번호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두 군데는 이미 사람을 채용했다고 했고, 나머지는 세 군데에서 두 곳은 조건이 나하고는 안 맞았다.

다 좋은 데 시간이 문제였다. 무조건 오후 2시까지는 가게에 도착해야 한다고 해,

아쉽지만 학교 출석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머지 한 군데는 나 사는 지하 셋방에서 거리가

제일 가까웠고 시급도 괜찮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학교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고 사정하며 시간을 조금 조정할 수 없겠느냐고 통 사정했더니, 우리 가게는 오후 2시 10분 전까지는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하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몰차게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일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인제 어쩌지” 하며,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어젯밤 거의 한숨도 못 자고 오늘 온종일 전혀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현기증이 나 어디 가서 좀 앉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몰 한쪽 모퉁이 나무 밑에 검정 페인트가 칠해진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어깨에 멘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넋 나간 사람처럼 두어 시간 그러고 앉아 있었던것 같다.

어디 손 내밀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일가친척 친구 하나 없는 이 땅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쌀 한 포대를 구할 길이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식량을 가지고 나타날 나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핏기 없이 핼쑥한 얼굴들, 7살 살 된 두 아들과 시름에 잠겨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이대로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늘 안에 쌀 한 포대를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눈앞이 캄캄해져 오고 온몸에 힘이 빠지며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늘어진 몸이 허물어져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막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네 가족은 지구 반대쪽 나라,

일가친척 친구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마치 조그만 통통배에 몸을 싣고, 불빛 한 점 없는 망망대해 난민처럼 표류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려 구조의 손길을

여기저기 보냈지만 허사입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식량이 없어 굶고 있습니다. 나는 빈손으로는 집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도와주세요, 제발 식량 한 포대만 어디서 구할 수 없을까요?” 이렇게

한참을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대낮에 나무 벤치에 앉아 중얼거리고 있는 제정신이 아닌 이상한 사람을 봤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꾸 뒤를 쳐다보며 지나가는 백인 노부부의 굽은 등이 보였다.

벌써 주위는 어두운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7시가 지나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고 집에 가려고 의자에서 일어서 옆에 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이제나저제나 쌀 포대를 들고 올 나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차마 집을 향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녁내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종일 애타게 기다릴 식구들을 생각해, 집으로 가기 위해 차가 주차된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발목에 천근만 근짜리 납덩어리라도 달린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참을 운전해 집에 도착해, 지하 현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니 온 집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얘들도 밝은 얼굴로 둘이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출입문 옆 쌀자루에 시선이

갔다. 어!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종일 쌀 포대를 생각해 헛것이

보이는가 보다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분명 쌀 포대가 두 개였다.

아침까지 쌀이 바닥나 헐렁하게 다 찌그러져 있던 빈 쌀자루 옆에 배가 불룩한 큼지막한

40파운드짜리 쌀 포대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때 믿기지 않는 일에 어찌나 놀라,

그 쌀 포대에 그려진 그림이 내 뇌에 강하게 각인되었던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쌀 포대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으로 그려진 둥그런

원안 벼 포기에 주렁주렁 달린 노란 벼 이삭이 탐스럽게 그려져 있는 “한국미”라는 상표를 가진

쌀 포대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내에게 물으니, 점심때쯤 교회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는

고 집사님 부부가 집에 들렀다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옥수수가 잘 여물어 애들 쪄 먹으라고

옥수수 몇 개를 그릇에 담아 가져오셨다고 한다. 부인 고 집사님이 엄마나 애들이나 얼굴이

창백하고 힘이 없어 보인다며, 아내에게 식구들 다 어디 아프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아내가 다들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고 둘러댔지만, 눈치 빠른 남편 고 집사님이

나가시면서 출입문 옆의 빈 쌀 포대를 보고 곧장 한국 마트로 차를 몰아한 포대를 사 오셨다고

한다. 빈 쌀 포대 옆에 새 쌀 포대를 놓아주시고는 부인 집사님은 아내를 꼭 껴안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했으니, 저 어린 얘들을 생각해서라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했단 말을 전하는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인척 관계가 전혀 없어 막막하던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주시는 고 집사님 부부의 사랑에

나도 가슴이 먹먹해 왔다. 이제 저 쌀 한 포대면 우리 네 식구는 며칠은 굶지 않고 살 수 있고,

내일부터 학교에서 돌아와 밤에 할 수 있는 일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어제부터 몇 끼니를 못 먹어 많이 시장했던 터라, 밥 한 그릇을 된장국에 말아 뚝딱 먹어 치우고

후식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옥수수 한 개를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고 쌀이 가득 담긴 새 쌀 포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거실 창문을 통해 비쳐온 달빛이 쌀 포대를 환히 비치고 있었다.

쌀 포대에 그려진 누런 벼 이삭에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은 포근하고 넉넉했다.

오늘 고 집사님 부부가 우리 가족에게 행한, 조건 없는 하나님 사랑처럼,

나는 그날 밤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쌀 포대에 그려져 있던 노란 벼 이삭이 나의 영혼에 깊이 새겨졌던지,

나와 아내는 아들 한 명씩 손을 잡고, 네 식구가 함께 나란히 손을 잡고,
누런 벼 이삭이 황금물결처럼 출렁이는 가을 들판 길을 신나게 뛰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한없이 이어지는 들판 끝나는 곳,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지평선을 보니,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이 땅을 박차고 일어나,

지상으로 힘차게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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