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석 Aug 11. 2022

#16. 불편함이 자유를 제한하는 세상

내 주식처럼 사르르 녹는 층간소음


1.

‘내 주식처럼 사르르 녹는 바닐라버터샌드’가 발주 중단이 됐다고 한다.


버터샌드 빵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포장 문구 때문이다. ‘내 주식처럼 사르르 녹는’,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라는 표현이 주식 투자에 실패한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보기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 주식투자자 입장에선 이 빵 포장지를 보면 눈물을 훔쳐야 하거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 수 있는 거구나! 내가 잘못했다. 내가 니들의 그런 감정마저 헤아리질 못했구나!


‘기분이 아주 초코같네’는 지금 내 앞에서 욕한 거 아냐???

‘제발 날 찾지마, 연차 반차 녹차’는 아니 너 없으면 뭐 회사가 안 돌아갈 것 같아???

‘멘탈 바사삭 바사삭’이나 ‘이번주도 버텨라 버터’는 인생 하루이틀도 아니고 너무 수동적인데???



2.

나에겐 농담이 타인에겐, 타인에겐 농담이 나에겐, 비수처럼 꽂힐 수 있다.


“그 자식이 나보러 마스크 쓰고 다니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글쎄 자다가 벌떡 깨서 뭐지? 이랬다니까.”


전엔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너무 예민하게 굴 것 없어. 우리 모두가 마기꾼이야.”라고 쿨내를 풍길 수 있었다.


지금은 걔가 그렇다는데 내가 이렇게 토 달면, “뭐야? 쿨병 걸렸냐”고 되받아칠 수도 있겠다.


3.

입조심이란 말은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지만, 2022년 현재 스코어로 이토록 내 주댕이를 셀프 게이트키핑으로 단속해보긴 처음인 것 같다.


혹시…?


내가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진 않았을지 자기 전에 반성해보는 일도 허다하다.


전엔 말은 주어담을 수 없다고 했지만, 요즘 세상에선 글도 주어담을 수 없다. sns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박제되기도 하고, 그게 말인지 글인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짓는 것도 모호한 세상이다.


4.

어디 말과 글 뿐이랴. 나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가 궁금하다.


미투 운동이 오롯이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나,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짚어보고 싶다.


미투 운동은 자신이 입은 피해를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신에 입각하고 있었다.


역사는 강자의 논리로 흘러왔기 때문에 약자의 관점은 무시되는 경향이 컸다. 거대한 흐름 속에 피해자인 약자는 희생양이 되더라도 그러한 피해를 유발했다는 강자인 가해자의 의견이 부지불식간에 녹아들었다. 성범죄에 있어서 여성은 피해자임에도 마치 범죄를 유발한 주체로 주홍글씨란 낙인이 찍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부조리에 맞서는 미투 운동에는 100% 지지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이드이펙트가 있었는데, “피해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 이라는 만사 형통의 관념이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지지하든 반대하든, 다수의 뇌리에 각인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 “내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니들이 잘못한 것”이라는 도식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나의 피해, 나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당연히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자유란 가치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제한하게 되는지, 토론과 공감대 형성이란 과정을 건너뛰는 공론장의 부재가 문제이다.


5.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나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선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며, 누군가의 인권이나 목숨 등 다른 구성원들의 권한을 헤치지 않는 선에선 자유란 가치는 최대한 존중받아야 하며, 이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산다.


층간소음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 글에 층간소음이란 주제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 상당히 불리할 것임을 알지만, 용기내서 다뤄본다)


자율주행차가 다니고, 손안에 pc를 하나씩 들고 다니는 요즘 세상에

아파트 짓는 기술만 후퇴한 건가?


물론 건설사의 날림 부실 공사나 형식적인 감리, 미약한 법의 규제 등 정작 주범이 따로 있다는 점은 나도 주장하며 동시에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가해자와 피해자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전엔 별 이슈가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왜 이렇게 난리일까.


아파트에서 평생 살았던 내 기억을 더듬어 판단해보면, 전엔 소음이 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강했다. 부모님을 떠올려보면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장시간 반복되는 소음이 아니고서야 간헐적인 소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그럼 요즘 사람들만 유독 청력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걸까?


나의 사연을 하소연할 수 있는 채널이 늘어났고, 파급력을 갖기 좋아진 세상이 된 것 뿐이다.


문제는 해결하기도 쉽지 않은 층간소음의 피해자의 목소리는 절대화돼 가해자를 지목해 저격하면 상대는 개념없는 층간소음 유발자로 낙인 찍히고, 온라인 공간에선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조리돌림 당한다.


“니가 예민해서 그래”라는 싸가지 없는 응대를 옹호할 수는 없겠지만, 가해자 입장에선 공론장에서 의견 개진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불편하지 않고 아늑하게 휴식을 취할 자유이자 권리가 타인이 자신의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유와 충돌하게 된다.


자유롭게 내 공간을 쓴다는 의미가 내 집이니까 시종일관 발망치를 찍거나 뛰어다니고 밤에도 시끄럽게 음악을 틀거나 악기를 연주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주택에 사는 이상, 법으로 정한 소음의 잣대를 넘지 않는 수준에선 서로에 대해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해를 일으킬 수 있는 가구도 배려해야 하지만, 피해를 주장할 것만 아니라 가해를 일으킬 수 있는 집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 쪽으로 쏠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선 공론장을 건너뛰고 어느 순간 상대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당당해진다.


“지금 뛰셨죠? 우리 애 공부하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내가 실제로 뛰었는지, 그게 우리 집에서 난 소리라고 어떻게 확신했는지 모르겠으나 이해와 배려를 구하기보다는 이미 답을 정해두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건지.


6.

‘내 주식처럼 사르르 녹는 바닐라버터샌드’로 다시 돌아가보면, 결국 우리 사회는 불편함과 피해라는 잣대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유란 가치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꼭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든다’는 식으로 폄하한다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느낄 수 있는 불편함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응당 옳다고 느끼게 되는 사회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낀다. 누군가 느낄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성숙한 사회 시민으로서 스스로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요즘은 작은 실수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깨어 있는 시민’들이 너무 많아져서 과도함마저 느낀다. 공론의 장에서 타인들은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묻기보다 답을 정해놓고 저격과 비난을 일삼는 것에선 문제의식이 결여돼 있다.


한쪽으로 쏠린 사회적 분위기의 결과로,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정작. 우리. 스스로. 제한하게  수도 있다는  놓치는  아닐까.


-끝.

작가의 이전글 #15. “인생에서 거둔 성취라곤 결혼밖에 없는 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