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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04. 2022

극부부도#6. “응, 엄만 닭목 좋아해”

흔한 엄마의 사랑 글

1.

11살쯤 되던 해, 해가 넘어가기 직전 겨울날이었다.

시골의 외할머니 댁, 온돌방의 온기가 부족했는지 그날따라 두꺼운 솜이불을 무릎 위에 두르고 가족들이 모여 앉았다.

막내 삼촌이 돌아가신 지 이제 막 수개월, 침묵은 무거운 공기가 돼 방을 짓눌렀다.

 

해병대 출신인 막내 삼촌의 빨간 보석 반지가 항상 탐이 났다.

삼촌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곧잘 주곤 했지만 그 반지와 ‘탑건’ 포스터만은 주지 않았다.

나이 차는 띠동갑 정도였으려나? 형제가 없던 난 삼촌을 형처럼 따랐는데, 삼촌이 제대 후 서울 구경한다며 집에 놀러 왔을 때 멋 부리듯 안경을 낀 모습에 엄마가 멋지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를 오토바이에 태워 한적한 지방도를 달리며 저수지로 가던 때, 얼굴을 스치던 바람결도 기억한다.

여자 친구 생겼다고 자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삼촌의 반지가 어디 있을까 궁금해 방에도 몰래 들어가 봤지만 '탑건' 포스터도 이미 벽에서 뜯겨나가고, 삼촌의 잔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재홍이 물건은?" 엄마가 물었다.

"다 태웠쓰야" 외할머니 얼굴엔 그림자가 내려앉은 듯했다.

 

이윽고 엄마가 침묵을 깨며 외할머니를 주신다며 사 오신 닭강정 포장을 풀었다.

나는 튀김옷이 두꺼워 차게 먹어도 바삭한 닭강정을 좋아했다.

 

외할머니는 도통 입맛이 없으시다며 손사래를 치셨는데 나에게 먹으라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당연한 듯 닭다리부터 집어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다음에 먹을 부위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엉덩이살인지 알고 입에 넣었는데 가슴살이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가냘프게 생긴 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닭목이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부위다.

먹는 모습만 말없이 보고 계신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에서 누구를 줄까 고민하다, 외할머니는 안 드시겠다고 하셨으니 엄마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치킨을 먹거나 닭백숙을 먹을 때나 여지없이 닭목부터 집어 들던 엄마였다.

닭목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전에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닭목이 좋아?”

"응. 엄마는 닭목 좋아해."

 

내가 건넨 닭목을 받아 들고는 갈치 뼈를 바르듯 이빨 끝으로 살점을 더듬는 엄마를 보더니 외할머니가 혀를 차셨다.

 

"얘끼 놈아, 엄마를 주려면 다리를 줘야지, 댓 저녁부터 닭 모가지가 머다냐?"

"엄마 닭목 좋아해. 몰랐어 할머니?"’

"느그 엄마가 머단디 닭 모가지를 좋아혀?"

 

외할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훔치시며 나지막하게 읊조리셨다.


"슥들 키우는  원래 그래야.."


2.

시간이 흘러 내게도 아이들이 생겼다.


아내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내쪽을 흘겨보며 코를 찡그리곤 흉을 본다.


엄마가 임신했을  너무너무 서운한  많다? 도넛이 먹고 싶다는데,  닫았을 거라며 나가보지도 않고 게임만 하지 않나고기 먹을 때는 익은 것부터 자기가 홀랑 먹어버리지 않나 아껴둔 와인도 어느  갑자기 마신다고 까버려서 엄마는 마셔보지도 못했다니까.”


그랬나 보다. 솔직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먹을 것을 나눈다는 것이 나에겐 익숙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렇게 법도에 까다로운 분이 아니셨다. 밥상머리에 앉아 내가 먼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고 해서 나무라시지 않았다.


“아빠 젤리에 손도 대지 마라”

“아빤 욕심쟁이야!”


우리 집에서 자주 벌어지는 대화 중 하나였다.

먹을 것 같고 치사하게 구는 처사일 수도 있겠다.


외할머니 집에서의 닭강정 에피소드는 내게 혼란스러움만 남긴 채 잠시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대학생이 된 이후 어느 날 문득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 엄마가 닭목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의미를 상기했다.

그리고 지금 와선 닭다리를 집어 들던 내가 무슨 낯짝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럴 수 있는 건가 생각한다.


형제가 없어 양보할 이유가 없었고,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은연중에 믿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파악해보니, 엄마의 닭목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날 위해 당신께서 희생하셨지만, 역설적으로 나를 이기적인 데다 배려심이 부족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어떻게 키웠어도 이리됐을 것이라 말한다면, 내 됨됨이가 부족함을 사죄드리는 수밖에.


아이들이 사랑 속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사랑을 주라는 말이 부모에겐 희생과 양보를 감내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호이가 반복되면 둘리인 줄 안다고…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막돼먹은 놈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나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지경이니.


요즘엔 치킨을 시켜도 먹기 좋게 순살만 발라져 있거나 좋아하는 부위만 고를 수 있게 돼 있는 경우가 많다.

시절이 풍부해 닭목은 찾아보려야 찾을 수도 없다. 닭강정에 닭목이 있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오히려 닭 사이즈를 갖고 미각이 후진적이네 어쩌네가 논란일 정도이니, 닭목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다.

닭목이 들어있다고 해서 “아이 뭐 이런 걸 넣어놨어?” 라며 가볍게 밥상머리에서 불만을 표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외할머니는 닭목을 뜯는 당신의 딸과 닭다리를 집어 든 손자를 보며 막둥이 삼촌을 떠올렸을 거다.

닭다리가 됐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이 미덕이자 당연시하던 세대셨다.


희생에는 대가가 따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해본다면 부모의 희생은 그만큼 더 높은 기대와 개입에 대한 대가로 여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이만큼 양보했는데, 이 정도도 요구 못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 자식 간에도 통용되는 심리이다.


이젠 부모가 닭목을 뜯으며 닭다리를 자식에게 양보할 경우와 필요, 명분 모두 미약해졌다는 얘기이다.


닭목을 뜯던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부터 차오르는 애잔함을 느끼지만, 내가 닭목 뜯는 게 당연하게 아이들이 받아들이도록 놔두진 않겠다는 거다.


이런 내 선포에 아내가 던진 한 마디.


“참, 대-단한 아드님 나셨어요.”


그렇구나. 이건 고해성사였어야 했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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