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드라마 '하츠히매'를 보고)
사람들은 언제 행복하다 여길까?
부족함 없이 편안한 상태 또는 주어진 환경 여건 속에서 만족함이 주어질 때일까. 행복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를듯하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요즘 행복하다.
스마트폰에 티빙 앱을 실행하게 되면서 평소 대하드라마를 좋아하는 난 2008년 일본 NHK 대하드라마 <아츠히메>를 만나게 되었다. 일본 에도 막부 말기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 출신의 여인 아츠히메(훗날의 덴쇼인)가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이 되어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는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50부작 대하드라마를 보는 재미에 빠져 지내는 동안 가족들에게 살짝 미안했다.
사쯔마번의 방계 가문에서 그녀는 ‘오카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드라마 초반 어린 오카츠와 어머니 오유키가 들판을 거닐다가 꽃을 보며 대화를 나눈다.
“이런 꽃들은 왜 피어 있는 걸까요?” 오카츠가 물어본다.
“오카츠, 들판에 핀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조차도 이 세상에 태어난 데에는 반드시 ‘역할’이 있단다.”
발밑에 치이는 작은 풀꽃도 대지를 지탱하고 생태계를 유지하는 소중한 임무가 있다는 뜻이다. 둘의 대화는 지금도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역할, 이 단어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본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그녀를 양녀로 삼고, ‘아츠히메’라는 이름을 준 뒤 쇼군(천황의 임명을 받아 군사 사령관으로 실제 일본 전체를 다스린 최고의 권력자)의 정실로 보내기 위한 엄격한 신부 교육을 시킨다. 평범한 영애에서 막부의 거물로 자라기까지 그녀의 가치관과 신념에 지대한 영향을 준 핵심 인물이다.
나리아키라는 아츠히메에게 지구본을 보여주며 “일본은 이 넓은 세상의 작은 섬나라일 뿐이다.”라고 가르쳤다. 이는 그녀가 훗날 막부의 멸망 앞에서도 가문의 안위보다 일본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대인배적 기질을 갖게 했다.
방계 가문의 딸이 본가 번주의 양녀가 되고 또다시 공가(귀족)의 양녀로 신분이 수직 상승된다.
드디어 그녀는 에도성에 입성하게 되고 ‘다음 쇼군으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하라’는 밀명을 받는다. 남편인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겉으로는 어리숙해 보였으나, 그녀는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쇼군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미망인이 된 아츠히메는 ‘텐쇼인’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사쯔마를 중심으로 신정부군이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에도로 진격해 왔다. 자신의 고향인 사쓰마가 적이 된 상황에서 그녀는 신정부군 측에 선 옛 동료들에게 서신을 보내 에도성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넘겨주는 ‘무혈입성’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막부가 멸망한 후에도 에도(도쿄)에 남아 도쿠가와 가문의 후계자 교육에 힘쓰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여성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분명히 알고 흔들리지 않고 한 가문을 지켜나간다. 일본을 위해 에도성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기꺼이 내어주고 평범한 그 시대의 삶을 선택했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아츠히메가 어떻게 문제에 대처하는지 궁금했다. 세상을 깊고 넓게 보는 통찰력을 길러준 부모님과 나리아키라 번주, 교육을 담당했던 여인들, 옛 동료들이 그녀 곁에 있었다. 늘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보여주고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갔다. 무엇보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아 항상 책을 가까이했다.
한편, 드라마 초반에 뇌리에 박힌 ‘역할’이라는 단어는 나를 그냥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늘 주어진 나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에 대하여, 혹은 내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무엇이 나에게 맞는 역할일까?라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오고 갔다.
우리는 모두 큰 그릇이 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작은 종지 하나가 상차림의 화룡점정이 되기도 한다. 작은 화분 하나가 창가의 햇살을 완성하듯 작은 것도 소중하다.
누구나 똑같은 하루가 주어진다. 주어진 일들을 잘하는 것과 때론 달콤한 낮잠 같은 쉼도 괜찮다. 너무 달릴 필요 없이 뚜벅뚜벅 혼자 묵묵히,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아츠히매에게 영향을 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던 주변 사람들과 타고난 성품과 노력이 그녀 속에 있다. 쇼군의 정실부인으로서 힘들고 무거웠을 역할에 최선을 다한 그녀를 보면서 오늘 나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이름 없는 풀도 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