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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Dec 09. 2022

귀엽게 볼링 치던 친구

# 칩거 6개월 차 문득 사람이 그립다.


나는 MBTI가 I인 내향형의 인간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E에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사이에서 에너지를 얻곤 하던. 그랬던 내가 지금은 자발적 칩거생활 6개월이 되었다.  


물론 의도를 갖고 멀어진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지금 내 상황도 한몫을 하긴 했지만, 나는 그 이전부터 조금씩 많은 것들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익명으로만 나를 드러내는 지금이 제법 괜찮다.


하지만 그런 나날들 중에도 가끔, 한 번씩은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이렇게 아이를 느지막하게 학교에 보내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끝내고, 빨래를 탈탈 털어 널고 난 뒤 햇살을 등지고 앉아 커피를 한잔 하다가. 나는 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바람이 차고, 소란하기만 하던 일터가 한 번씩 생각나기도 한다.


나는 쉽사리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유형의 인간이지만, 그래도 두고두고 지켜본  뒤 서서히 마음을 열기에 한 번 열린 마음은 더 깊고, 진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쌀쌀하게 느껴지거나 굳이 친해질 마음이 없다고 느끼거나, 일정 거리 이상은 다가갈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 곁엔 결국 얕게 친한 사람 여럿과 오랜 시간 뒤 절친이 된 일부의 친구만 있다.


대체로 내가 맺는 관계는 상대가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시하지 않으면 전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먼저 나에게 열정적인 마음을 표하거나, 나를 억지로 끌어내는 등 상대가 먼저 다가와야 일보 진전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면 아주 깊어진 사이로 남거나, 한쪽이 일방적인 구애에 지쳐 멀어지거나 하는 결론에 닿았다.


몇 번쯤은 나도 적극적인 모습이었던 때가 있었겠지만 그런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다 보니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먼저 연락을 하거나 먼저 만나자고 하기보다는 연락이 오면 대답을 하고, 만나자고 하면 거절은 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저 깊은 곳 내 마음은 알겠지', '꼭 말로 해야 아니' 같은 경상도 사나이 마인드인데, 누구나 '오다 주웠다'에 감동하는 게 아니기에 나의 진심은 때로 퇴색되었다. 열거하고 보니 자신의 성향을 핑계로 인간관계에 애쓰지 않는 사람 같으나 이는 참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늘 내 마음은 진심 언저리에 있었다는 것.




내가 그나마 E에 가까웠던 시절. 지금 일터에 발령을 받고 어떻게든 적응을 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던 때였다. 그래도 같은 시기에 발령받은 동기들이 있어 우리는 서로 많은 위안이 되었었는데 그런 이유로 자주 뭉쳐서 어울렸다.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낯선 일터에서의 고단함이라는 공통분모로 우리는 금세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시절엔 그나마 젊었기에 일이 끝나고도 다른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은 일터-집-일터-집만 소화해도 체력이 다하는지라 저 시절이, 아니 저 시절의 체력이 그립다.)


그날도 가까운 바닷가에서 치즈를 얹은 조개구이에 소주를 곁들이던 날이다. 조개구이를 익히는 숯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갈 때마다 불멍을 하던 우리 얼굴도 붉어지고, 속내를 털어놓는 마음도 한없이 붉어지던 날이었다. 숯불의 얕은 열기는 우리의 어린 마음을 조금씩 풀어놓게 만들었고, 느슨해진 마음은 우리 사이를 경계 없이 드나들었다. 상사가 없는 한적한 그곳에서 우리는 어둠이 내리도록 웃고 또 웃었다. 취기가 오르자 돌아오는 차에선 선루프 위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치는 부끄러운 동기들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것마저 웃겨서 배를 부여잡고 웃곤 했다. 왜, 달큰한 바람만 불어도, 낙엽의 가녀린 손짓에도 꺄르르 웃곤 하는 청춘 아니던가?


얼굴이 발그레하니 볼터치를 한 우리는 알딸딸한 술기운을 끌어안은 채 볼링장으로 2차를 갔다. 볼링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친구들도 있어 그중 그나마 운동에 취미가 있는 한 남자 동기가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오른손을 쭉 뻗고 귀 가까이로 올리는 모션을 연신 반복하며 마지막 팔 처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며 소음을 가르며 소리쳐 알려주었다. 음악소리가 시끄러웠고, 주변의 말소리에 섞여 그 설명은 잘 전달되지 않는지 남자 동기는 자꾸 팔을 올려대는 시늉을 하고, 여자 동기는 볼을 들고 라인에 서서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힘껏 내던지고 오던 여자 동기가 소리친다.


"오빠!! 귀엽게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어떻게 귀엽게 치라고?!"


볼링을 하면서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남자 동기가 오른손을 쳐들어 귀 옆에 올리란 뜻으로 외친 '귀 옆에'가 깜찍하게도 '귀엽게'로 들린 것이다. 볼링을 어떻게 쳐야 귀엽게 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여자 동기. 우리는 바람만 불어도 꺄르르 넘어가던 시절 청춘이 되어 웃고 웃었다.


그렇게 귀엽게 볼링을 치던 친구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 결국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갔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마시고, 놀던 추억이 끈끈한지라 한 번씩 연락이 와도 어제 만난 것같이 썰을 풀곤 한다. 이 친구와는 깊고, 진한 사이가 된 것이리라.




나는 분명 여러 부서를 옮겨가면서 가는 곳마다 마음이 맞고, 잘 통하는 이를 한둘은 만났었는데 부서를 옮기고 나면 그 만남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저 깊숙이 마음은 있는데 도통 드러내지 않으니 전달될 리 만무했다. 직장에서는 진정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동료를 만나기가 어려운 것인지, 그들도 그저 함께 하는 동안 시기적인 우정을 나누었던 것뿐인지, 아님 나의 게으름 탓에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가끔 이렇게 헛헛한 마음이 들이칠 때면 귀엽게 볼링을 치던 친구도, 잠깐이지만 마음을 내주었던 동료마저도 그립고 생각이 난다.


그렇다고 내 감정에 취해 뜬금없이 연락을 취하는 정성 어린 행동까지는 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냥 헛헛한 마음이 들이쳤다 나갔구나 그러고 또 하루를 닫을 것이다.


나는 이 칩거기를 지나 또다시 E형의 사회화된 모습으로 일터를 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I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잠시나마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진다면 다음에는 귀엽게 볼링 치는 친구를 두서넛 더 만들어볼 생각이다. 고집스럽게 한 발짝도 나가지 않다가 마음에 바람이 차서야 후회하기는 싫으니까. 단지 지금은, 아주 조금만 더 이러고 골방에 있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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