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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Dec 14. 2022

40대의 기말고사 성적표

# 과목 : 건강


오늘은 햇살자리에 바투 앉아서 글을 쓴다.

어제 종합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서는 지금 당장 태양 아래 핀 조명을 받아도 모자랄 정도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급하게 앉아서라도 햇살을 흡수 중이다.  


한 해 동안 내 몸을 단련하고 치르는 기말고사 같이 (시험이 언제나 그렇듯) 잔인한 점수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그간 얼마나 내 몸을 귀히 여기지 않았는지 한눈에 읽혀서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2년을 주기로 종합 건강검진을 하고 그 결과지를 우편으로 받아본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방문하여 결과를 듣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간 기록만으로 존재할 때는 40대면 보통 이렇지 않냐며 낙관적인 태도로 관망했었는데 직접 육성으로 듣고 보니 낙제점이 따로 없다.




휴직을 하고 올해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어 여행을 좀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보여줄 세상이 많아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 놀이공원, 산, 바다 등을 섭렵했었는데,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 손을 떠나는 시기와 나의 체력이 떨어지는 시기가 교묘하게 맞아지면서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이것이 내가 직장생활에 사력을 다하다 보니 체력이 남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었고, 이제 쉬게 된다면 비축된 체력을 아이들과의 여행으로 채우겠다 다짐했었다.  


신랑이 없더라도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글램핑장 불멍도 하고, 고기도 구워 먹고, 별도 바라보며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보자는 심산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를 외치고 신랑에게는 내 행복에 감히 기웃대지 말라는 엄포를 놓으며 야심 차게 휴직을 맞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나는 좀체 집을 떠나지 못했다.


꾸역꾸역 버텨내던 체력은 이때다 싶어 병이 되어 한꺼번에 몰려왔고, 나는 병원 투어와 약물 복용으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건강검진 결과는 빈혈, 근골격 감소, 골다공증, 비타민 B, D 부족. 모든 수치가 표준이하를 가리켰고, 체지방 수치만 상승 곡선을 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뼈는 삭아가고 쓸데없이 지방만 쌓이는 저질의 몸이 된 것이다. 부드러운 질감의 고무 바지가 헐렁댈 때마다 마치 그 여유분만큼 내가 말랐다는 긍정적인 착각을 했었고, 체중계에 올라 체중이 수시로 달라질 때마다 체중계의 오류를 탓하며 가장 적게 나온 체중만 기억했었다. 물론 밥을 먹은 뒤 소화를 위해 커피를 마시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고,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다 보면 종일 먹고 있다는 느낌이 가끔 들기는 했다.


많이 먹어도 체중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라며 웃던, 사두고 못 입는 옷들이 조금씩 늘어나도 애써 외면하던, 자고 일어나면 홀쭉해진 배를 만날 것만 같은 어리석은 희망을 품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내가 내 몸을 홀대한만큼 점수가 되어 돌아왔다. 근력을 높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오늘 당장 헬스장이라도 달려갈 기세였으나 하필이면 한파가 와서 일단 내일로 미뤘다. 언제나 운동은 내일부터니까.


가수의 운이 노래 제목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던데 뭔가 골방에서 마른기침 해대며 골골댈 것 같은 나의 브런치 필명 때문은 아닌가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어느 날 내 필명이 '근육질녀', '쇄골미녀', '닭가슴살 덕후'로 변해 있더라도 부디 놀라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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