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오늘이 아니라 숫자였다.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 나는 그 숫자를 생각했다.
어제의 저녁이 어땠는지.
잠들기 전의 마음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는지.
더듬듯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가늘게 누워 있었다.
그 위를 맨발로 지나 주방으로 갔다.
마룻바닥은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발바닥을 통해 천천히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식탁 위에 놓인 혈당 측정기는 늘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누가 일부러 맞춰 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
손을 씻고, 소독 솜을 집어 들었다.
알코올 냄새가 공기 속으로 번졌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바늘을 누르기 전의 그 짧은 순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손끝을 내밀고 바늘을 눌렀다.
찌릿. 아주 짧은 감각이 스쳤다.
매번 같은 자리, 같은 동작인데도 그 느낌은 늘 조금씩 달랐다.
오늘은 어제보다 덜 아팠다.
아니 괜히 더 예민해진 건지도 몰랐다.
피 한 방울이 맺혔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그 작은 방울에 이렇게 많은 의미를 담아도 되는 걸까 싶으면서도, 이미 나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기계에 혈액을 묻히고 숫자가 뜨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묘하게 늘어졌다.
화면이 깜박이는 그 몇 초 동안, 오늘 하루가 미리 요약되었다.
결과가 좋으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고,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내려앉았다.
숫자는 언제나 단정했다.
어느 날 아침, 화면에 '112' 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을 때, 나는 잠시 그 숫자를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쁘다고 하기엔 애매하고, 좋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수치.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숫자처럼, 나 역시 중간쯤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더 내려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오늘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 마음이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 문득 서늘하게 다가왔다.
아내는 내가 혈당을 재는 모습을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예전에는 옆에서 서성이다가 오늘은 좀 어때 하고 물어보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각자의 아침을 살았다.
아내는 아내의 일로, 나는 나의 숫자로.
그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침묵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말이 줄어든 자리를 아내는 반찬으로 채웠다.
짜던 음식이 사라지고, 국은 점점 싱거워졌다.
처음엔 숟가락이 잘 가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담백함이 입 안에 오래 남았다.
맛이라는 것도 결국은 시간이 가르쳐 주는 건지도 몰랐다.
혈당 수첩을 펼쳐 숫자를 적었다.
날짜와 숫자가 나란히 적혀 있는 페이지를 넘겼다.
이게 내 몸의 일기였다.
특별한 사건은 없고, 다만 조금씩 오르내리는 흔적들.
회사에서 서류를 정리하듯, 나는 이 수첩 앞에서만큼은 성실했다.
기록하고, 확인하고, 넘겼다.
하지만 수첩을 덮는 순간, 숫자들이 나를 전부 말해 주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몸은 숫자보다 느렸다.
마음은 그보다 더 느리게 따라왔다.
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을 보았다.
셔츠 단추를 잠글 때 배 쪽이 전보다 불편했다.
허리를 숙이면 숨이 먼저 찼다.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출근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 어딘가에는 설명되지 않는 피로가 얹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차 문을 열 때까지 나는 다시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혈당 이야기는 집에 두고 나왔다.
회사에서는 몸보다 역할이 먼저였다.
나 역시 그 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다.
퇴근길, 신호등 앞에 멈춰 서면 편의점 불빛이 괜히 눈에 들어왔다.
밝고, 따뜻하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예전 같으면 별생각 없이 차를 세웠을 텐데 이제는 잠시 망설여졌다.
오늘 아침의 숫자와 내일 아침의 숫자 사이에서, 나는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았다.
그냥 지나쳤다.
그 선택이 대단한 결심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고 나서야 작은 허전함이 남았다.
밤이 되면 하루를 돌아보았다.
크게 잘한 것도,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날.
혈당은 무난했고, 일은 평소와 같았고, 집은 조용했다.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는 것이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다가도, 문득 안심이 되었다.
침대에 누워 불을 끄면, 아침에 찌릿하던 손끝의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내일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하겠지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아침 공복 혈당을 재며 하루를 가늠하는 삶은 생각보다 소리가 없었다.
큰 깨달음도, 뚜렷한 결론도 없이 다만 숫자 하나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일.
그 멈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그냥 흘러가게 두지는 않았다.
나는 내일 아침에도 같은 자리에서 손끝을 내밀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숫자를 적어 넣으며 말로 하지 않은 하루를 조용히 마음속에 남겨 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