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은 너무 많은 소리를 동시에 틀어놓은 것 같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말이 넘치고, 말들은 대개 누군가를 나누는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젊음과 늙음, 안과 밖.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얼굴보다 분류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보다, 어느 편인지가 더 중요해진 것처럼요.
그 과정에서 마음은 자주 소진됩니다.
이해하려 하기 전에 판단이 앞서고, 가까워지기 전에 거리가 먼저 생깁니다.
이런 시대에 이 노래는 가볍게 춤추는 척하면서도, 조용히 본질을 건드립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틀든,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는 목소리.
우리는 너무 자주 바깥의 소리에 휩쓸리며 살아가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다른 곳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소음이 길을 막게 하지 말라고, 노래는 속삭입니다.
그런데 이 소음이라는 게 꼭 세상의 소란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쌓인 불안, 비교, 조급함, 그리고 타인을 향해 쉽게 생겨나는 단정들.
그런 것들도 모두 작은 잡음이 되어 마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한 줄이 더욱 오래 남습니다.
이제는 머리를 뮤트하고, 심장 박동을 노래하라는 말.
생각보다 박동이 먼저인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 뒤에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늘 머리로 편을 나누라고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쉽게 갈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심장은 원래 경계를 세우는 기관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기관이니까요.
노래는 말합니다.
어디에서 왔든, 어느 쪽에 서 있든, 무엇으로 불리든 상관없이, 자기 삶의 진짜 결에 맞춰 춤추라고요.
이 대목이 참 묘합니다.
진짜 바이브라는 것은 결국, 내가 꾸며낸 정체성이 아니라 조용히 남아 있는 본연의 리듬일 테니까요.
사람은 그렇게 복잡한 이름들 이전에, 그냥 하나의 존재로 숨 쉬고 있는데도, 우리는 자꾸 그 위에 많은 라벨을 붙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중심에는 '모노'라는 단어가 놓여 있습니다.
세상을 모노로 틀어보라는 말.
스테레오처럼 좌우를 가르고 효과를 잔뜩 얹지 말고, 한 줄기의 소리로 돌아가 보라는 뜻입니다.
삶에도 그런 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해석과 주장과 증폭을 내려놓고, 단순한 본질로 돌아가는 순간.
사랑은 모노에서 더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참 이상한 문장인데, 곱씹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사랑은 원래 복잡한 장치가 아니라, 가장 단순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을 덜할 때, 판단을 늦출 때, 소음을 줄일 때 사랑은 더 선명해집니다.
너무 많은 소리가 사랑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갈라치기는 늘 효과음을 키웁니다.
분노의 볼륨을 올리고, 상대를 낯선 존재로 만들고, 거리를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 반대입니다.
상대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일단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 세상은 조금 덜 날카로워집니다.
아주 큰 변화가 아니라, 작은 숨 하나만큼.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이 말은 거창한 선언이기보다는, 오래된 속삭임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결국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분열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일 거라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을 단숨에 하나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의 소리를 조절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효과를 조금 줄이고, 소음을 조금 낮추고, 심장의 박동이 들리게 하는 것.
사람을 입장이 아니라 존재로 바라보는 것.
세상을 모노로 틀어보는 연습.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를 건너는 가장 조용한 저항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더 크게 들리도록.
아이들의 새로운 노래가 어제 공개되었네요.
소연의 색이 보이지 않아서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뮤비가...
정말 좋습니다.
작사, 작곡에 메인으로 이름을 올린 icebluerabbit가 소연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존 문법과 이렇게 다른 곡을 쓸 수 있다면...
정말 천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