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고니아 리뷰

by 글쓰는곰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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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꺼내 든 원작의 기억

나는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던 관객이었다.

십수 년을 두고 여러 번 다시 본 영화가 드물지 않은가.

그 작품을 ‘기괴한 상상력의 정수’로 마음 깊이 품고 있던 터라,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리메이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설렘이 아니라 경계였다.

과연 그는 원작의 광기를 어디까지 계승하고, 어디서부터 자기 색을 덧입힐까.

더구나 프로젝트 라인업에는 CJ ENM과 함께 스퀘어 페그(아리 애스터·라스 크누드센)가 연루돼 있고, 각본은 《서브세션》팀의 윌 트레이시라니—야심의 크기만으로도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자극했다.

그리고 실은, 이 영화를 처음 보러 갔던 극장의 온도와 냄새까지 떠오른다.

차가운 오전 회차였고, 극장 안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도시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옆자리에 앉은 이는 아마 나처럼 원작 세대였는지, 시작 전부터 “그 병구의 웃음, 다시 볼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의 표면을 아주 조용히 긁고 지나갔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이미 비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란티모스적 절제의 방향

결과부터 말하면 《부고니아》는 란티모스 필모그래피 중 가장 ‘얌전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설명적이고 직진하는 편이지만, 그 ‘절제’가 덜 흥미롭다는 뜻은 아니다.

원작의 날것 같은 블랙 코미디가 초반부터 산탄처럼 튀던 데 비해, 리메이크는 웃음을 의도적으로 걷어내고 두 인물의 대면 구조를 장시간 끌어가며 관객을 심문실 안으로 밀어넣는다.

엠마 스톤이 연기하는 미셸 풀러는 거대 제약기업의 CEO이고, 제시 플레먼스의 테디 개츠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양봉업자다.

테디는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미셸을 납치해, 그녀가 ‘인류를 위협하는 외계 세력’의 일원임을 자백하게 만들려 든다.

캐릭터의 직함과 관계·이름 표기는 영화의 크레딧과 공개 보도자료 기준으로 이렇다.



지하실의 호흡 — 카메라와 조명의 드라마

이 설정만 보면 《랍스터》나 《킬링 디어》의 잔혹한 우화가 떠오르지만, 《부고니아》의 흥미는 란티모스가 이번에는 ‘서늘한 표정의 극’보다 ‘서늘한 명료함’을 택했다는 데 있다.

테디의 지하공간에서 오가는 대화는 독회극처럼 길게 이어지는데, 그 장황함이 종종 루즈함을 부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지하실 장면들에서 란티모스는 아주 흥미로운 촬영 구조를 반복한다.

카메라가 테디의 뒤통수를 천천히 훑다가 측면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순간들—그 미세한 슬립은 마치 인물의 생각이 무언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번역해낸다.

그리고 미셸의 얼굴에 닿는 조명은 유독 차갑다.

색온도가 낮은 푸른빛 아래에서 그녀의 표정은 인간의 체온을 잃고, 하나의 기호·신호·의문으로만 존재하는 듯 보인다.

지하실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점차 ‘세계 전체’로 확장되는 듯한 착시를 유도한다.

마지막 파노라마 시퀀스—인류의 서식지와 생태가 순식간에 파열하는 이미지의 병치—는 기술적·자본적 위용의 과시에 그치지 않고, ‘벌집의 질서’와 ‘인류 문명의 질서’가 얼마나 다른 주파수에 놓여 있는지를 날카롭게 상기시킨다.

거대한 관점의 카메라는 마치 벌집을 내려다보는 여왕벌의 시점처럼 얼음장처럼 차갑다.



연기의 밀도 — 플레먼스와 스톤

원작 팬이 가장 먼저 감지할 변화는 톤의 교정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만화적 생기’—불쑥 튀어나오는 슬랩스틱의 환기—가 여기서는 철저히 제어된다.

신하균·백윤식이 빚어냈던 과장된 생동의 결을, 란티모스는 플레먼스의 미세한 근육과 호흡으로 바꿔 읽는다.

플레먼스는 이토록 ‘조용히 무서운’ 배우였던가.

그는 피해의식과 구원의지, 신념과 공포가 뒤엉킨 테디의 심리를 작은 눈짓과 말끝의 떨림으로 축적한다.

엠마 스톤은 이 ‘축적’의 대상이자 거울이다.

미셸의 태연함은 방어든, 거짓이든, 초월이든—해석의 여지를 준 채 균열을 늦게 드러낸다.

이 ‘늦게’가 영화의 관객 분화 지점이다.

어떤 이에겐 밀도, 어떤 이에겐 지체로 작용한다.



음악이 남기는 잔향

음악적 선택은 영화의 의도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엔드 크레디트에 흐르는 마를렌 디트리히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은 반전·반성의 서정이자, 멸종의 목록을 읊조리는 자장가다.

동시대 팝 넘버(〈Good Luck, Babe!〉, 〈Basket Case〉 등)가 몇곳에서 인용되지만, 결과적으로 기억에 남는 건 디트리히의 차가운 목소리와 펜드릭스의 실험적 악상이다.

‘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은, 극장 문을 나서는 발걸음의 방향까지 잠시 멈춰 세울 만큼 조용히 오래 마음에 머문다.




벌집의 은유와 신화의 회귀

서사 전체의 ‘정확한’ 지점들을 짚자.

《부고니아》는 원작의 큰 줄기를 따르되, 배경과 동기를 2020년대 미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맞춰 새로 적층한다.

테디가 양봉업자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상징이자 논증이다.

벌집은 질서의 은유인 동시에 절대 권력과 맹목적 복무, 효율과 소멸이 한 화면에 겹쳐진 구조다.

제목 ‘Bugonia’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자연발생한다는 고대의 믿음에서 따왔다.

영화는 이 신화적 역설을 결말의 이미지로 되살리며, ‘자연의 생존/인류의 소멸’이라는 역전된 진실을 조용히 펼쳐 보인다.

연출적으로는 란티모스가 자신의 장기—프레이밍의 냉기, 인물과 공간의 부조화를 통한 불안 고조—를 덜 과장하고, 촬영감독 로비 라이언의 유연한 카메라를 통해 ‘보는 자’의 위치를 끊임없이 바꾼다.

나는 한 장면을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한다.

테디가 잠시 말을 멈춘 순간, 환풍기 소음이 과장되게 부풀어오르며 화면이 숨을 멈춘 듯 정지하는 찰나—그 고요 속에서 두 인물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서로의 ‘서사적 증거’처럼 보인다.



원작을 사랑한 이의 마음으로

다만 이 영화가 모든 관객에게 매혹적일 거라고 말하긴 어렵다.

원작의 블랙 코미디적 환기, 병구(원작) 캐릭터의 ‘만화적 생기’에 기대어 있던 관객이라면 리메이크의 진지하고 장광설에 가까운 호흡을 답답하게 느낄 수 있다.

어떤 관객은 “결말의 파노라마 하나로 지탱되는 영화”라고 말했고, 또 다른 관객은 “원작의 광기를 세련된 이미지로 덮었다”고 평했다.

두 반응 모두 이해된다.

나는 ‘덮었다’기보다 ‘분산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부고니아》는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계보에서 드물게 성공적인 결과물로 남을 것이다.

원작의 이야기를 존중하면서도, 그 이야기의 주파수를 2025년의 세계에 맞춰 조정했다.

사적 광기와 공적 위기의 중첩, 생태적 재앙의 가시화, 정보 환경의 파편화—이 셋을 벌집이라는 하나의 문양으로 통합해낸 수작이다.

나는 여전히 《지구를 지켜라》의 ‘광기 어린 농담’을 그리워하지만, 《부고니아》의 ‘침묵하는 냉정’이 지금-여기에는 더 필요했다는 생각으로 극장을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노래가 묻는 질문을 한동안 되뇌었다.


“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