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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마우지 Oct 12. 2023

가난한 고졸이 공기업까지 전편

나의 준비과정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90년대 부산의 기억은 피란의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 기억나는 처음 집은 방한칸에 주방하나 아버지는 항상 주방에서 주무셨고 화장실은 멀리 떨어진 푸세식 그리고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없는 그런 집이었다. 밤의 화장실은 어머니도 무서워 나랑 같이 다녔던 기억이 있는 그런 집이었다. 하지만 이 집은 행복한 기억이 더 많은 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 가족은 화장실이 집에 있는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이사가 끝나 있었고 어머니가 미리 집 위치를 알려주셔서 하교 후 본 집은 너무 좋아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꿈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집에서 20년간 이사 가지 못했다.


나의 기억 속 두 번째 집은 푸세식 집보다 행복한 기억이 많이 없다. 정말 드라마 같이 이사 후 1년도 안지나 아버지가 뇌졸중이 왔다. 어릴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병일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우리 가족은 그때부터 병들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의 수입이 끊기고 모아 놓은 돈은 전부 아버지의 병원비로 들어갔다. 어린 나는 당연히 아버지의 병이 다 낫는 병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간을 그리 길지 않았다.


중학생쯤 되니 자아가 생겨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술과 담배 피우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단지 이 두 가지 이유 말고는 없었다. 아버지가 아파서, 우리가 가난해서 원망한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담배냄새가 너무 싫고 술주정이 싫었다. 이런 이유로 사춘기의 나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마트로 일하러 가셔 막아 줄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진로의 갈림길인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담임선생님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인문계를 갈 성적은 되지 않았고 실업계 또한 내가 골라서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너무 바빠서 아버지는 내가 뭘 하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이 아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진로는 담임선생님이 정해주셨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는 다 안된다고 하셔서 그럼 갈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하여 정해진 모 실업계 고등학교의 자동차과로 원서를 넣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자동차과로 넣어도 성적순으로 잘린다고 하셔서 입학증을 받아봐야 한다고 하셨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식날 나는 지각을 하였다. 집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입학식을 같이 갈 어른이 없어 뭐든지 혼자 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90년대생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왜 지각했냐고? 버스를 반대로 타버렸다. 하하하... 아무튼 학교에 도착하니 나랑 같은 지각생이 있어 같이 교무실로 가서 입학증을 받았는데 나는 자동차과 입학증을 지각생도 자동차과 지원 했는데 떨어져 기계과로 갔다. 나도 공부 지지리 안 했지만 너는 더 안 했구나.


처음 맛본 승리였다.


실업계 자동차과 생활은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가정환경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기계를 좋아했다는 기억마저 까먹고 있었나 보다. 학업이 재미있으니 자연스럽게 목표가 생기고 실업계이다 보니 진로도 고등학교 때 어느 정도 정해진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자동차 정비소로 현장실습을 나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정말 열심히 달렸다.


돈을 버는 목적은 레저와 자가차량으로의 가족여행이었다. 우리 집은 내가 차를 사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차량이 없었다. 자동차 여행은 큰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우리 가족도 같이 태우고 다녀 주신 것 말고는 놀러 가본 기억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자차로 놀러 다니는 것이 로망이 되어버려 차량 구매를 목표로 현장실습을 갔다.


고등학교 2학년 수업 중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학교에서 조퇴하고 집으로 가보았다. 동생과 동생친구가 집에서 놀고 있었고 밖에서 쿵 하는 소리에 나가보니 아버지가 거실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잠시 뒤에 경찰이 집에 와서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구급차가 아버지를 실어갔다. 나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족의 병은 가족 전체를 힘들게 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우리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상을 시작하였다. 빈자리의 아픔은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와 동생은 그랬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왔다. 나는 목표한 대로 미쉐린 타이어에 현장 실습을 갔고 정말 열심히 일하였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사회생활은 쉽지 않았다. 월 60만 원을 받으며 현장의 거친 말과 그 당시 정비소는 알려주는 핑계로 폭력까지 쓰는 그런 업종이었다. 고등학생의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참고 일하였다. 지금 다시 만나면 그때 왜 그랬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현장 실습이 끝날 무렵 나는 사수에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가스라이팅이 무서운 게 그만둘 때 미운 정도 정이라고 눈물이 나더라 지금이었으면 쥐어박고 나왔을 텐데...


현장 실습이 끝나고 학교에도 그 업체 말고 다른 데 가겠다고 말했다. 그때도 인력 부족이었는지 바로 다른 정비소에서 나를 데리고 갈려고 직접 면접을 보러 왔다. 대부분 정비소는 요즘 말하는 좋좋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면접관은 사장 아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채용되어 19살에서 24살까지 5년간 정비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 나의 발판이 되어준 고마운 경력이다. 왜 24살까지 하고 그만뒀냐? 남자라면 다 가야 하는 군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미 전역한 친구들의 추천으로 공군 정비병으로 지원하려고 했지만 군대에서 똑같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여 건설장비운전병을 지원하게 된다.


예상대로 건설장비운전은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한번 시작한 직종의 변경은 쉽지 않았는데 군대로 환기시킬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군대에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아깝기 마련이다. 나는 최대한 군대를 이용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았는데 대표적으로 자격증과 특기병 경력 취득이다. 나는 최대한 많은 자격증과 경력을 위해 전문하사까지 지원하였다. 지원 동기는 자격증 취득과 관련 경력을 취득하여 사회에 써먹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 5년이 또 지나버렸다. 장기복무까지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몇 달을 영내 생활을 하며 전역을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정비 관련 자격증과 건설장비 관련 자격증 그리고 사회경력 10년을 얻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난한 고졸이 군대를 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


고졸의 가장 큰 단점으로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 좁다는 것인데 군대를 가면 나보다 잘난 사람을 넘어 정말 대단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것만으로도 군대를 갈 이유는 충분하다. 내가 정말 큰 세상을 경험하고 싶으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다녀야 하는데 군대에 가는 것만으로 다양한 인재들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재들도 모두가 다 군대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 사회니 병장만 되어도 물어보기 편하다. 내가 사회에서 언제 서울대생에게 질문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인생의 기회는 내가 만든다


인생의 기회는 공부에서 오는 것이 확실하다. 인문 공부가 힘들면 다른 길은 많이 있다. 노는 것도 공부다. 연애도 공부다. 기회를 잡으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공부해야 한다. 나는 그나마 재미있는 기술공부를 했다 물론 힘들었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 공부했고 내가 잘하는 것만 공부했다. 나중에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자본이 없다면 여자든 남자든 군대에서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업무와 훈련으로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하사에서 일 이년만 지나면 충분히 여유로운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경력(호봉)은 보너스다.


일자리 알아보기


내가 처음부터 공기업을 목표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특목고가 아닌 정말 개나 소나 다가는 고졸 주제에 공기업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뚜렷했다. 공항, 철도, 항만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고 로망이었다. 그래서 군생활을 오래 했나? 부사관 생활은 계획에 없었는데 막상 해보니깐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공항에서 일하기는 했으니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공항은 군 공항이 아니었기에 내가 쌓아둔 경력과 자격증으로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경력과 자격증이 쌓이면 그때부터는 자신감이 붙는다. 취업자리를 알아보면 경력직 뽑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취업자리 알아보는 것도 쉽지는 않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알아봐야 한다. 또 군대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정보를 얻기가 비교적 쉬웠다. 다양한 직업 및 공기업부터 공무원과 선생님등 군 휴직을 쓰고 온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물어보면서 준비할 수 있었다. 나는 잡알리오와 취업 사이트를 위주로 매일 봤던 것 같다. 가난한 고졸이 모든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 힘들고 비효율 적이다. 내가 쌓아둔 것 위주로 찾아보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경력 관련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공기업도 경력직 채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소수만 뽑았고 채용 공고도 자주 올라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관련 자격으로 갈 수 있는 모든 공기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찾아보는 것은 간단하다 각 공기업의 과거 채용공고를 보면 된다. 무수한 공기업 중 어떤 곳에 어떤 일자리가 있을지 모르기에 정말 웬만한 채용공고는 다 본 것 같다. 이때부터는 정보력 싸움이다. 경력직의 시험은 대부분 사람들이 가는 공채랑 시험 내용이 틀린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떤 곳은 실기시험이 있는 곳도 있고 관련 자격증과 경력이 필수이기에 공채보다는 경쟁이 적었다. 전공도 살리고 경쟁도 적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시험이라고 생각되어 일을 하면서 1년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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