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 찾아온 성장통, 혹은 사춘기 같은 단어로 내 여행에 명분을 주고 싶지는 않다. 내 여행의 목적은 도피였으니까. 힘들었다기보다는 모든 게 귀찮았다. 주변에는 휴식이 좀 필요하다는 말로 적당히 퉁치고 길을 떠났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조건은 이렇다. 힘들어도 참는다. 하기 싫어도 한다. 재미없어도 웃는다.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 또 갈무리를 잘하는 사람. 그게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이다. 평소의 나는 꽤 긍정적인 편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어른인 척하며 살아야 하는 일상에는 신물이 났다. 무작정 나선 도피성 여행이 매일, 매 순간 즐거울 리는 없었다. 나트랑 해변에서 책을 읽다가도, 우붓 시장에서 사롱을 구경하다가도 돌아가면 반복될 일상이 불현듯 삐쭉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몸서리를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성취감을 견디며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어른의 숙명이라면, 나는 분명 미성숙한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여행을 통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은 건 아니었다. 그저 숨을 곳이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인간이란 모두 각자만의 모순을 품고 산다. 건조한 나에게 그 모순은 내가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고 다정다감한 성격은 못 된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슬픔에 같이 울어 주고, 기쁨에 격한 환호를 보내 줄 거라는 기대감이 따라온다. 나는 그 기대와는 어긋나는 사람이다.
나의 냉소적인 인간애는 여행 중 만나는 '인스턴트 우정'에서 특히 선명해진다. 기차에서 말을 텄던 이와 커피 한 잔을 함께 하고도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관계,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니고도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관계. 찰나에 불과한 인간관계가 나는 좋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무책임한 관계에 이끌리는 이유는, 그들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타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나는 그 아쉬움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때의 나는 치앙마이에 있었다. 치앙마이에는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미루고 미루다가 도착한 곳이었다. 이상하게 치앙마이에 가면 여행을 끝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치 않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만 같았다.
호스텔에는 늦은 저녁에 도착해서 다음 날 오후까지 잠을 잤다. 몇 주 간의 여행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지만 치앙마이 선데이 나이트 마켓을 놓치고 싶지는 않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야시장에서 산 망고스티키라이스와 땡모반을 들고 호스텔로 향했다. 야시장에 다녀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사실 더 이상 가 보고 싶은 곳도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아서 치앙마이는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도착한 거였는데. 한국에 돌아가기도 싫고 더 이상의 여행도 싫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약간 서글펐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우는 얼굴을 했다. 에에엥 하는 소리도 좀 내 봤다. 눈물이 안 나왔다. 사실 난 눈물이 정말 없는 편이다. 멋쩍어져서 그냥 분노의 샴푸칠이나 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땡모반은 시간보다도 더 참을성이 없다. 밖에서 내 소중한 땡모반이 녹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샤워를 마무리했다.
방에는 마땅한 테이블이 없어서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않고 다시 로비로 내려갔다. 이미 늦은 밤이었다. 어쩐 일인지 호스텔 주인아주머니는 주무시지도 않고 로비에 혼자 앉아 계셨다. 체크인이 늦어지는 사람이 있어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말을 걸어 주셨던 좋은 분이다. 웃기지만 영어가 짧은 사람끼리는 말이 잘 통한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다고 징징거렸다. 주인아주머니가 천천히 먹으라며 생수 한 병을 꺼내 주셨다.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헬멧을 벗으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마 호스텔 아주머니를 잠 못 들게 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남자는 체크인을 하고 곧장 자기 방으로 향했다.
야밤에 한 상 차려놓고도 막상 몇 입 먹지도 못 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남기기는 싫어서 꾸역꾸역 늦은 저녁을 입에 밀어 넣었다. 좀 웃기지만 한국에서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분명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분명히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꾸역꾸역 먹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일상은 뜬금없는 순간에 튀어나와 내게 인사를 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일 층으로 내려왔다. 아까 그 남자였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에게 아주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나는 주인아주머니 부부가 묵으시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무셔."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또 손가락으로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붙어 있는 벽을 가리켰다.
"내 것도 좀 해 줘."
어제 도착했지만 오후 늦게 일어나자마자 야시장을 쏘다니느라 와이파이를 연결할 틈이 없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창을 열고 내밀었다. 키득거리며 내 휴대폰을 받아 든 남자는 어쩌다 보니 나와 망고스티키라이스를 나눠 먹었다.
젓가락질을 못해도 너무 못했다. 밥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망고들은 남자의 서툰 젓가락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있었다. 쯧. 나는 뭐든 먹을 때 젓가락을 선호한다. 춤추는 망고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포장도 뜯지 않은 포크와 숟가락을 내어줬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라는 가사가 떠올랐다. 남자를 보니 젓가락질을 잘해야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약간은 한심한 듯 바라보고 있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자기는 젓가락질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이거 너무 어려워."
나는 또 속으로 혀를 찼다.
루카는 독일인이다. 망고스티키라이스의 맛을 알아버린 루카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내 저녁밥을 반정도 빼앗아 먹었다. 한입 먹을 때마다 미안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내 말에 노스 오얼 사우스?를 장난스레 물었다.
누군가 그랬다. North or South? 질문을 받으면 It depends on you.로 받아치라고. 10년 전 혼자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를 진지하게 궁금해했던 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회가 왔다. 루카의 질문은 농담이었지만 속이 다 시원했다. 드디어 이걸 써먹는구나.
"It depends on you."
루카는 내 말에 흐흐 웃었다.
포크와 숟가락을 내려놓은 루카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망고를 찍어 누르듯 집어 자랑스럽게 들어 올렸다. 약간 반칙이긴 하지만 그냥 봐줬다. 나는 반쯤 죽사발이 난 망고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녹아버린 땡모반을 한 모금 마셨다. 소화가 좀 되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