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고?
목적 없는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한 고민? 헛돌기만 하는 내 마음이 어딘가에 자석처럼 착 붙어서 다시 어른 흉내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물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니다. 세탁기 안에서 힘차게 돌아가는 빨래더미를 보며 생각한다. 빨강은 빨갛다, 노랑은 노랗다, 파랑은 파랗다. 그렇다면 주황은? 주황타. 주황하다. 초록은? 초록타. 초르르다. 아무래도 초르르다가 마음에 든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뻘뻘 나는 태국의 날씨 때문에 세탁 주기가 짧다. 빨래방에서 요란스레 제 할 일을 하는 세탁기는 무용한 생각들의 좋은 파트너가 된다.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루카였다. '저녁 같이 먹을래?' 전날 밤 내 망고스티키라이스를 반이나 먹은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좋아. 저녁 먹고 같이 무에타이 보러 갈래? 나 티켓 끊어둠.'
무에타이 관람은 태국에서 하고 싶었던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어디든 혼자 잘 다니고 뭐든 혼자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나도 무에타이를 관람할 때만큼은 동행자가 있었으면 했다. 애석하게도 여태 적절한 동행을 찾지 못했다. 혼자서라도 보러 갈 요량으로 빨래방에 오기 전 미리 표를 끊어두었다.
루카는 무에타이라는 말에 어째 나보다 신이 난 것 같았다.
베지테리언 루카는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베지테리언의 종류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아쉽게도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모든 문장을 흡수할 수 없었다. 나는 반쯤 알아듣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두꺼운 머시룸 버거를 고상하게 썰어먹느라 고생을 좀 했다. 버섯에 대한 사랑을 구구절절 쏟아내는 나를 가만히 보던 루카가 소매를 걷어올렸다. 버섯 타투가 있었다. 내가 졌다. 버섯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내 다이어리를 챙겨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툭툭이 비에 젖은 거리를 가로질렀다. 눅눅했던 밤공기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끼어든다.
경기장은 생각한 것보다 더러웠고, 조악했다. 또 생각한 것보다 열정적이었고 훨씬 뜨거웠다. 라운드가 바뀔 때마다 누가 이길지에 대해 내기를 했다. 딱 한 번을 빼고는 내가 고른 선수들이 내내 졌다. 상관없었다. 나는 환호에 묻히지 않으려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진짜, 여기 있어서, 너무 행복해!"
치앙마이의 일주일은 매일 똑같은 박자로 흘러갔다. 오후 한 시에 일어나 두 시쯤 첫 끼니를 먹었다. 일주일 동안의 혹독한 트레이닝 끝에 루카의 젓가락질은 꽤 봐줄 만했다. 밥을 먹고 나면 박물관, 절, 야시장을 배회했다. 호스텔로 돌아와 로비에 있는 기다란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드러눕는다. 둘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영국인 매튜가 로비로 내려온다. 그는 절대 웃는 법이 없다. 엔지니어인 미국인 앤디도 슬쩍 이야기에 끼어든다. 셋, 또는 넷이 되어 같이 떠든다. 나를 배려한 느리고 짧은 문장의 영어도 놓칠 때가 많아 의도하지 않은 성의 없는 대답을 내뱉는다. 매튜와 앤디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야식을 주문한다. 야식을 먹고 나면 세븐일레븐에서 주전부리를 한가득 산다.
먹는다. 먹는다. 먹는다.
새벽 3시, 4시가 될 때까지 영화를 본다. 어떤 날은 아침까지 밤을 꼴딱 새워 영화를 봤다. 다음 날에 대한 계획은 늘 장대했으나 막상 실천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구글 지도를 켜서 서로의 집 앞마당을 구경시켜 주는 데 시간을 썼다. 나는 10년 전쯤 갔던 독일을 랜선으로 다시 한번 여행했다. 루카가 보여준 가족사진은 상상했던 독일인 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웃음이 터지기도 전에 루카가 선수를 쳤다.
"알아. 진짜 전형적인 독일인 가족 같지."
자신을 'Technically' 기독교인이라고 정의한 루카는 매주 교회에 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무교인 내 손목에는 염주가 세 개나 걸려 있었다. 그중 두 개는 똑같은 모양이었다. 내 염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고무줄이 헐렁해진 염주를 하나 줬다. 루카는 '진짜 내가 가져도 돼?' 물으면서도 얼른 손목에 염주를 끼워 넣었다. 낡은 고무줄 덕에 루카 손목에 잘 맞았다. 기독교인 손목에 걸린 염주가 예수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지도 모르겠지만, 베트남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왓츠앱을 하는 스님을 친구로 둔 루카라면 염주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대학을 중퇴했다. 전공은 독일어였다. 처음 만났던 날 밤, 루카는 나의 전공을 반가워하면서도 왜 독일어 배우기를 중단했냐고 물었다. 대학 자퇴에는 딱히 대단한 사연이라거나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냥'이다. 하지만 눈앞의 독일인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딴지를 걸었다.
"가방이 여자고 테이블이 남자인 것까지는 좋아. 근데 중성? Das Buch? 장난해?"
독일어 명사에는 성이 있다. 가방(Die Tasche)은 여성이다. 테이블(Der Tisch)은 남성이다. 책(Das Buch)은 중성이다. 투 머치다.
루카는 나의 항의에 망고스티키라이스를 살짝 뿜을 뻔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모든 독일인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나는 진짜 독일인에게 대학 중퇴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냈다.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를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용서해 주겠노라 말했다.
나의 독일어 실력은 'Guten tag'에서 멈춰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카는 매일 내가 독일어를 얼마나 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했다. 'Ich weiß nicht.' 몰라. 저 문장은 내가 아는 독일어 문장 중 가장 긴 문장이자, 내 밑천의 전부다. 사실 제대로 된 문장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도 읽을 수는 있지?"
집요한 질문이 계속 들어온다면, 나도 내 실력을 뽐낼 수밖에 없다.
"너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노래 뭐야?"
AnnenMayKantereit의 Vielleicht Vielleicht. 보컬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미 내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Tom's diner라는 곡을 부른 보컬이었다. 희미한 기억에 의존해 가사를 더듬더듬, 하지만 아주 열심히 큰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음이 영 안 좋았는지 루카가 소파 쿠션을 팡팡 치며 자지러졌다. 무례한 독일인을 흘기다가 나도 따라 웃었다. 대학 중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웃음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대학을 그만뒀을 거다. 공짜 독일어 과외 선생님은 엉망인 내 발음을 열심히 교정해 줬다.
일주일 동안 독일어가 조금 늘기는 했다. 딱 한 문장 배웠다. Was denn. 뭐 어쩌라고.
내 인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Was d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