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대하여
나는 비교적 폭넓은 유연한 사고를 하고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는,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읽고 물음표를 띄우지 않았다는 것이 있겠다. 장애인도 당연히 아파트에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책이 전개되는 초반, 장애인이 아파트에 사는 것에 대해 주민들의 원성이 있었던 부분을 보고서는 내심 안도했다. ‘나는 저렇게 차별하는 사고를 가지지 않았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나의 숨겨진 차별과 마주하게 되었다.
첫 번째 마주한 차별은, 장애인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처가 될 것이라고 무례히 짐작해왔던 나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마주친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에게 장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 마음 안에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장애인이라 칭하는 호칭이 무례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장애를 쉬쉬하고 있구나. 이런 나의 태도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겠구나. 반성했다.
두 번째 마주한 나의 차별은 장애인이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존재라고 치부해왔던 나에 대한 것이다. 규민 씨가 100만 원에 상당하는 핸드폰 요금 폭탄을 맞았을 때, 장애를 이유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규민 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 책임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특히 이때 복지사들의 행동은 나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은 규민 씨에게 왜 100만 원을 요금으로 납부해야 하는지 현금을 보여주며 반복해서 이해시켰다. 그리고 결국 규민 씨가 모든 것을 이해한 이 일화에서 느리지만 천천히 이들이 사회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애인들을 위한답시고 대신 요금을 내준다거나, 보호자의 동의 없이 유료 콘텐츠를 보지 못하게 한다면 순간에는 안 좋은 상황을 면할 수 있지만 장애를 이유로 이들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사회 복지사들의 노력이 참 진정성 있는 것 같다.
세 번째 마주한 나의 차별은 장애인들은 도움 없이 무언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념했던 나에 대한 것이다. 아파트에 산 지 6개월이 접어들자, 입주자들은 정도에 차이는 있어도 모두 한몫을 해내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회 복지사들이 얼마나 꾸준하고 친절히 일러주었을지 생각하면 깊은 감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사회 복지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집안일을 알려주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장애인들이 이들의 삶에서, 속한 공동체에서, 사회에서 주인으로 살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의 내 짧은 생각으로는, 장애인들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식주를 모두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얼마나 무지하고 편협한 사고였는지 알게 되었다.
네 번째 마주한 나의 차별은 장애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던 나에 대한 것이다. 은수 어르신 에피소드는 눈물이 나서 책을 잠깐 덮어 두어야 할 정도였다. 은수 어르신의 딸은 결혼 이야기를 전하러 오랜만에 은수 어르신을 찾아왔다. 딸은 아빠가 술을 마시고 때리려고 할 때 엄마가 이불속에 삼 남매를 넣고 오롯이 홀로 맞았던 그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지적 장애를 이유로 모성을 비롯한 많은 감정을 모를 것이라 여겼던 내가 부끄러웠다. 은수 어르신의 딸을 향한 마음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나는 모성에 감동을 받은 것인지 지적 장애를 무시했던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미 충분하게 어울려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생각해왔었지만, 그것이 나의 오만이었던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배려와 양보만이 그들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존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존중은 이들이 우리와 함께 어울려서 1인분의 역할을 하며 존재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것에서 실현됨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