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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Dec 28. 2021

유학 갈래?

태평양을 건너, 미국

벌써 처음 유학을 시작한 2014년으로부터 7년이 지났다. 유학을 통해서 많은 부분을 얻고 많은 부분을 잃었다. 감정의 고난 시기가 분명했지만 세상을 보다 넓게 보는 시야를 얻었다. 그래서 불평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의 버거웠던 경험들은 차곡차곡 쌓이다가 완전히 나를 깔아뭉개기도 했다. 유학 때문만은 아닌 가정사도 복잡했던 시기였지만, 그 기억은 아팠기에 굳이 그 시간들을 들쳐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문득, 그 기억들이 덜 아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내 마음이 튼튼해져서 인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그 경험들을 손에 올려두고 찬찬히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만의 이야기인 미숙하고도 애썼던 나의 유학 생활. 내 인생의 큰 비중이었으니, 이제 조금씩 끄적여보고 싶은 마음이다.





"유학 갈래?"



아버지가 물었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인 질문이었지만, 핵심은 딱 저 문장이었다.



15살이었던 나는 그 질문을 듣고 두 달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중학교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1학년 때 친해진 여섯 명의 친구들과 매번 급식실을 향해 경주를 벌였고, 밥 먹고 운동장을 돌면서 수다를 떨었고, 공부는 싫었지만 친구와 노는 게 좋아 학원도 즐기며 다녔다. 그런데 뭐랄까. 그 즐거움에 비례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학교 진도는 내 선행 학습 진도를 점점 따라잡고 있었다. 10시까지 하는 학원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는데 학교 진도는 왜 이리 빠른지. 지금도 역사 선생님의 억양 센 래핑으로 시험에 나올 내용들만 훑던 수업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유학을 권장하셨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 방식은 틀렸다고 생각하셨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중요시하는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으면 하신 마음이었다. 그 자신도 무역 일을 할 때 해외에 나가서 보고 배운 것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많이 바꾸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두 달 정도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 뒤,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어떤 이유가 결정적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점점 치열해지는 학업 경쟁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땅덩어리의 분류조차가 다른 아메리카로 태평양을 건너가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먹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몰랐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삼선 슬리퍼와 학교 근처 분식집, 그리고 동거 동락했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마음은 몽글몽글해졌다. 보이는 모든 자연과 건물과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서글펐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한 두 달 전에는 수월한 적응을 위한 단기 영어 과외를 들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교육 방식이 재밌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영어로 수업은 이루어졌고, 인생 그래프를 만들어 설명하거나 유명한 연예인의 외모를 상대에게 설명해 누구인지 맞추게 하는 놀이 같은 수업이었다. 사실 문법이나 단어의 실력이 크게 향상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영어를 즐겼던 시간이었다. 그 분과 함께 공부했던 노트는 지금도 내 방 책장에 꽂혀있다. 






그렇게 7월 즈음 미국으로 향했다. 대한항공 비행기에 이미 몸과 짐을 싣었고 적어도 6개월 동안은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하자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미국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던 결정이 취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살짝 당황했지만 이런 경우도 종종 있다고 설명을 들었다. 다행히도 금방 한국인 가정으로 배정이 되었고, 준비한 한국적인 선물을 주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이런 중간 연결을 해주는 유학원을 잘 선별해서 골라야 하는 게 밥을 안 챙겨주거나 냉장고에 자물쇠를 채워두기도 하고, 심지어 인종차별을 하는 가정으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이용한 유학원은 책임을 갖고 재빨리 손 쓴 탓에 나는 공항에서 한국인 가정의 주소를 받아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내가 배정받은 가정은 학교 선생님인 교포 남편 분과 20살 때 미국으로 넘어온 아내 분, 그리고 그 부부의 어린 세 자매가 있었다. 나는 그분들을 각자 쌤, 그리고 이모로 호칭하기로 했다. 내가 들어갈 시기에는 나보다 세 살 많은 한 명의 여자 유학생도 함께 살고 있었다. 그 가정은 거의 7년 동안 홈스테이를 운영하면서 여러 한국 유학생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모는 초반의 어색함을 다소 직설적이지만 쾌활한 표현 방식으로 풀어주셨다. 그렇게 나는 2년 동안 인연을 맺게 될 가정을 만났다. 



집, 학교, 학원뿐이었던 15살의 나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외모 차이를 분별하기 어려운 외국인, 아니 미국인 (이제는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3층짜리 주택, 영어 간판은 그동안 보았던 세상의 풍경과 많이 달랐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의 감정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새 학기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미국인 친구들은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키도 크고 리액션도 클까? 친구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영어로 수업은 따라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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