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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28. 2021

[가끔, 책] 페스트

알베르 카뮈

  페스트가 건넨 질문.




  ‘불가항력이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2021년을 살아가는 현재도, 알베르 카뮈가 살아가던 20세기 초반에도,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기원전에도 세상은 의문점이 가득했고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른 채 삶과 죽음을 맞아왔다. 몇 천년 동안 많은 학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인들이 삶의 시작과 끝을 연구해왔지만, '왜 삶을 사는지'에 관한 절대적인 대답은 알 수 없었다. 대신 각각의 인생관과 세상관을 제시했고, 사람들은 개인에게 합리적인 관점과 지혜를 선택해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한다. 그때나 현대나 삶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인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작가 알베르 카뮈의 글은 주로 실존주의의 향이 난다. (스스로 실존주의자라고 인정하는 것 같진 않지만) 실존주의란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펜’이라는 실존은 ‘글을 쓰기 위한 도구’라는 본질이 있다. 반면, 사람이라는 실존은 본질 즉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전제하에 어디서 굴러 떨어진 돌 같은 존재로 해석된다. 책에서는 삶이라는 숙제가 주어진 인물들을 페스트라는 갈등 상황에 몰아놓는다. 그리고 불가항력 앞에 놓인 각 인물의 생각 흐름과 반응을 조명한다다 다른 방법으로 상황을 마주하기 때문에 각 생각들을 읽는 묘미가 있다.





   


  

  의사 리외는 ‘성실하게' 반항하는 방법을 택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굳이 먼저 남들에게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비상식적인 세상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리외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분노, 슬픔, 기쁨을 느끼지만 매사 초연한 태도를 유지한다. 대항하기 어려운 적에서 비롯된 무력감 때문에 감정이 조금 무겁다. 


  청년 타루는 '죽음을 막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를 모순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에 대항한다. '죽음을 막기 위한 죽음'이라는 암묵적인 모순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을 타루는 페스트 환자라 부른다. 모순에 대해 물을 존재가 없지만 타루는 혼자서라도 이 룰을 절대로 수긍하지 않고 절대적인 대답을 찾기 위해 질문한다. 하지만 모순적인 죽음들을 끊임없는 책임 전가하는 세상이었고 타루는 외로움을 느낀다. 




 재앙의 편에 서는 것을 거부하고 희생자들 편에 서는 것. (pg.120-121) 



  리외는 체념의 모습을 보이고 타루는 이상향을 생각하며 납득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타루는 끝내 답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리외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저 의지의 영역 안에서 보잘것없지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기쁨이 찾아오더라고.




인간을 초월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pg. 182)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는 공통적으로 [사람 대 환경]을 잘 나타낸다. 다른 점이라면이방인』은 공허한 삶의 의미와 허무주의를 조명한 소설이었고,페스트』는 이길 수 없는 환경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던지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두 책 다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카뮈는 자신의 세상관과 경험을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증언할 뿐이다. 나는 카뮈가 타루의 과정을 거쳐 리외가 되었다고 느꼈다. 결국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관은 한때 카뮈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과 같은 작품도 존재한다. 타루의 생각의 흐름을 조명하는 소설이라면 이방인』과 꽤 비슷했을 것이다. 









  페스트』를 읽을 때 당시에는 나는 타루의 모습과 같았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질문뿐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모순과 존재 이유와 그에 따르는 복합적인 감정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때로는 질척거리고 어두워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지금 이 글을 다시 정리하고 있는 최근의 나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리외의 모습이다. 질문을 멈추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다듬어서 올린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보는 관점은 변화가 가능하고, 그 작은 관점에 동참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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