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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Apr 06. 2023

과몰입 비판

컨텐츠를 감상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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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 속해있던 연극의 세계에서 나는 예술의 엄숙함. 경건함. 그 형식적 숭배를 그토록 싫어했었다.

이름이 'ㅈ'인 어떤 극단의 대표를 만났던 일을 기억한다. '지읒' 극단.

"극단 이름이 왜 '지읒' 인가요?" 나는 물었었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중, 진실, 진정성. 세 가지 요소의 시작되는 자음 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실이란 건 뭐지. 진정성은? 집중이란 건 뭘까.


그런 유머 들어본 적 있는가.

여성이 남성을 소개받을 때 남성관에 따라 10대, 20대, 30대의 질문이 달라지는데 남성이 여성을 소개받을 때 질문은 한결같이 예쁘냐 밖에 없다는.

내가 만난 예술가들이 대체로 그런 셈이다.

어린 학생부터 백발 도인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뭐냐 물으면 한결같이 '모른다'라고 답한다.

예술을 아는 예술가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사실상 예술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제나 밤새 얼굴이 빨개져라 예술에 대해 토론한다.

그리고 결론은 항상 똑같다. '모르겠다'


나름 대학로 바닥에서 예술인 행세 좀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무대에 서보기도 올려보기도 하며 10년 정도 구르다 보니 비로소 나는 알 것 같다. 예술이 뭔지.

배신자로서 진실을 말하자면, 예술가들에게 예술은 모르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간지다.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상징체계 그 자체다.


바야흐로 컨텐츠의 바다를 우리는 표류하고 있다.

서로 똑같진 않지만 완전히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바다의 물결과 같은 컨텐츠들이 초 단위로 무한하게 쏟아져 나온다.

좋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변해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때마다의 '기준'만 있으면 나는 된다고 본다.

컨텐츠의 기준이 되는 건 관람객의 의식적 참여 정도다.

의식적 참여 정도라는 것은, 내가 창작물 안으로 깊게 빠져 들어가서 사유하고 공감하고 뭔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창작물이 의도하는 소스를 외부에서 바라본 다음 나에게 일어나는 작용을 맡길 것인지 여부를 말한다.

원시부터 고정된 특성이므로 여기서 시대는 중요하지 않다.

포르노를 보고 나서 출연자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극단 이름이 왜 '지읒' 인가요?" 나는 물었었다.

대표가 대답하길 자신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중, 진실, 진정성. 세 가지 요소의 시작되는 자음 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진실이란 건 뭔가요? 진정성은 뭐죠? 집중이란 건 어떤 건가요?" 나는 다시 물었다.

대표는 놀랍게도 외계의 언어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 만의 우주에서, 나의 우주에서 문답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ㅈ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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