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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난테 May 15. 2022

우리는 악당이 아니다

토트넘전 이후 아스날 팬의 넋두리

    이번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손흥민 선수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죠.

저는 손흥민 선수의 함부르크에서의 데뷔전과 데뷔골을 기억합니다. 해외축구를 갓 보기 시작할 무렵 박지성의 경기와 EPL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빠지면서 동시에 잘 챙겨보지 않던 독일에서 어린 선수가 데뷔하는 것을 다들 눈여겨보았기 때문이죠. 레버쿠젠을 거쳐 토트넘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가슴이 렁했습니다.

 

    아스날과 한국 인터넷과의 관계가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게 명약관화이기 때문이었죠. 이미 박지성이 소속된 맨유와의 라이벌리로 미운 털을 샀던 데다가 박주영의 이적 후 부진으로 벵거 감독에 대한 비판과 아스날 구단에 대한 비아냥이 넘쳐나는 것에 넌더리가 났었습니다. 그래서 손흥민 선수가 EPL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17-18 시즌 무렵부터, 일부러 축구 보는 것에 관심을 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북런던 더비가 5월로 미뤄진 것이 미치도록 부담스러웠습니다. 이토록 많은 것이 걸려 있고 더군다나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에서의 경기라니, 근래 북런던 더비의 특성상 이길 수가 없는 경기에 가깝기 때문이죠.

 

    홀딩의 손흥민에 대한 맨마킹은 과했고, 퇴장감은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첫 골이 나온 페널티킥 파울 판정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는 과한 감이 있다고 보지만, EPL 주심의 일관성이 결여된 판정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홀딩과의 충돌 과정에서 팔을 휘두른 것은 카드가 나오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경기 자체는 토트넘이 모든 수를 써서 분위기를 가져가 승리를 따냈다고 생각하고 대체로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한국어로 된 기사들과 유튜브를 보기 전까진 말이죠......



    아스날 커뮤니티에서 자주 쓰는 밈 중에 '악당 출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슬램덩크에서 주인공인 북산이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는 산왕과 경기를 치르기 위해 등장하는 부분에서 기꺼이 악당을 자처하고 나서는 결연한 장면이죠. 세대를 막론하고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 중에 안 읽어보신 분이 없으시겠지만 그 유명한 '그러나 이 사진이 쓰이는 일은 없었다..'가 나오기 직전의 역전승이 바로 산왕 고교와의 경기이죠.

무엇보다 아스날 선수들의 표정이 정말 악당스러워 보이는 것이 포인트...

    즉, 이 밈을 쓰는 맥락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팀이 응원받지 못하는 언더독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팀이 업셋을 일으켜 불가능이라 여겨지는 승리를 가져올 것을 기원하는 것이죠. 아스날 팬들이 쓰면 자조적이면서도 무언가 보여줄 듯한 '악당'이라는 워딩이 주는 재미가 있죠. 하지만 이번 북런던 더비는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홈에서 경기를 치르는 토트넘이 이를 악물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 홍보영상. We were ready in january라는 말이 유달리 눈에 띕니다.

     

    토트넘 팬들을 응집시키기 위한 카드섹션과 슬로건 'Dare Dream Do'는 꽤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일정 연기 부분에 대한 화를 푸는 상대로 아스날을 생각하고 있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로 토트넘은 이번 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연달아 경기를 치러야 하죠(일요일 번리전에서 방금 전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스날 또한 첼시와 맨유를 상대하는 일정 간 간격이 짧았을뿐더러, FA의 규정에 따라 정해진 것이므로 일정 연기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FA에 있습니다. 이를 더비 상대에게 푸는 것만큼 홈팬을 응집시키는 것은 없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러한 토트넘 구단이 깔아버린 아스날에 대한 증오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미디어로 소비되는 소재로 활용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차마 보여드리고 싶진 않지만 몇 가지 예를 제시해보겠습니다.

특정 유튜버를 지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려두었습니다만, 이와 같은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콘테 감독의 경기 후 인터뷰는 굉장히 자극적이었습니다. 아르테타 감독은 판정에 불만을 나타내고 상대에 대한 직접적인 워딩을 피했지만, 콘테 감독은 이때다 싶은 기세로 공격적으로 일정 연기에 대한 부분과 판정에 대한 불만을 제시하는 것의 경험 부족을 비난했죠. 이것을 다루는 것이 '후련하다'라고 한국의 대표팀 주장이 소속된 팀이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의 기사는 실제로 있었던 것도 아닌, 토트넘 팬이 스냅챗 필터를 사용하여 조롱한 것을 기사화하였고 많은 포털에서 꽤 높은 순위에 위치해있었죠. 스냅챗과 같은 쇼트 폼 미디어와, 필터로 위시되는 딥 페이크 기술의 위험성은 논외로 두더라도, 이를 다루는 방식은 위의 이미지에 보이는 유튜버들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이미 수많은 기사와 축구 전술을 다루기보다는 현장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들은 손흥민이 소속된 토트넘을 '무한정 선'으로, 그 외를 '악'으로 규정하고 콘텐츠가 제작되고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더비 상대이자 승점을 쫓아가야 하는 아스날은 '절대 악'인 것이죠.


    사실 스포츠 보도만큼 저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영역이 없기 때문에, 또한 뷰 수가 곧 수익인 미디어 환경에서 그들의 자세를 비판하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을 담고, 더욱더 넓은 관점과 비주얼을 표방하는 그들은 어째서 북런던 더비 후의 과격해진 팬들의 반응은 다루지 않을까요.


    구단 자체에서 공론화가 되지는 않았지만, 경기 후 양 팬이 과격해지면서 유리병을 던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아스날 구단의 스태프가 장애인 팬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도와주다가 피를 흘렸다는 기사나 한국 유튜브의 동영상은 쇼츠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경기가 열린 장소와 대상이 반대였다면, 대서특필 되었겠죠.


    아스날과 토트넘의 관계와 더비에 대한 열정을 생각했을 때, 역사적으로 승자=정의라는 논리는 꾸준히 이어져왔습니다. 03-04 시즌 무패 우승 당시, 토트넘 당시 홈 경기장이었던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우승을 확정 짓고 나서 아스날 팬들이 부르기 시작한 "We won the league at XXite Hart Lane"라는 토트넘의 "when the saints go marchin' in"을 패러디한 응원가가 계속 불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 힘의 논리는 달콤하고 또한 그다음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위치는 꾸준히 바뀌기 때문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승자임을 담보할 수 없고, 오늘의 악당이 내일은 정의의 사도가 될 수도 있는 부분 때문에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제작되는 '토트넘을 상대하는 악당 아스날'의 구도가, 손흥민 선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것은 내셔널리즘의 증폭 외에는 스포츠 문화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저 한 아스날 팬의 넋두리일지도 모릅니다. 손흥민 선수의 득점왕은 개인적으로 응원하면서도 아스날의 완패에 대한 허탈함이 불러온 삐딱한 시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북런던 더비에서 아스날은 '악당'이 되기를 자처한 적도, '악당'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에게 과격한 파울을 한 롭 홀딩은 사적인 감정을 담아 공격하지 않았고, 아스날 구단이 공식적으로 한국의 스퍼스를 도발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더 좋은 축구를 하고, 더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고, 더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라며 노력하는 과정에 있어 상대가 토트넘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아스날이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악당으로 불린 것입니다.    
  

21-22 시즌에 바뀌기 전에 붙여졌던 RESPECT 패치

      EPL에서 4위를 차지하면 얻어내는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하는 팀들의 옷에는, 이번 시즌 바뀌기 전까지 UEFA에서 인종, 성별, 종교, 능력에 관계없이 상호존중을 다짐하는 패치가 붙어있었습니다. 더 이상 유니폼에는 부착하지는 않지만, 그 함의는 계속 지켜지는 축구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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