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은 사랑이라 가장 완벽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변할 수 있다

by 사이



같은 동네에서 각자 자취를 하는 우리 커플은 주로 내 자취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사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남자친구의 집은 테이블조차 없어 서서 밥을 먹어야 할 정도로 살림살이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내 공간이 우리의 주된 아지트가 되었지만, 사실 그곳은 나만의 엄격한 규칙과 패턴으로 쌓아올린 울타리 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나름의 생활 질서가 분명했고, 혼자만의 취미가 확고했다. [가끔은 열람실 대신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충동구매 욕구가 들 때면 온라인 쇼핑 대신 시내로 나가 옷 구경을 하며, 해가 좋은 날엔 좋아하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거나 하는 그런. 세탁물을 분류하는 법이나 수건을 접는 모양, 식탁을 닦는 방식까지.]

남들에겐 유난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불안과 우울에 저항하며 하나씩 쌓아올린 나만의 소중한 지지대였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 지지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나만의 규칙들을 그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어느순간부터인가, 남자친구를 손님처럼 반겨주기엔 약속 없이 자고 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몰래 울기도 했다. 거절이 어렵고,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성격 탓에 나를 깎아내더라도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잠시동안만 참으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문제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혼자만의 방에 고립시키게 됐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보다는 오직 혼자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버티게 되었다.


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가 돼서야 겨우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꺼냈고 다음 날, 만남의 횟수를 줄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도 이번만큼은 강경하게 서운함을 표했다. 팽팽한 대치 끝에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다시 만난 날 남자친구는 고맙게도 내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우여곡절은 많았다.

약속이 흐지부지되기도 하고 생활 소모품 비용 문제로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네 고민은 내게 전혀 번거로운 게 아니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다 말해달라"는 그의 무한한 지지 덕분에 나는 조금씩 솔직해지는 법을 연습할 수 있었다.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때로는 거절하며 그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새로운 규칙을 정립해 나갈 수 있었다.


덕분에 요즘은 잃어버렸던 안정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유 모를 불편한 감정에 휩싸여 입을 닫아버렸을 상황에서, 내가 왜 기분이 상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준 것이다.

사실 문제상황이 일어난 당시에는 말을 못하고 귀가하는 내내 뚱한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뒤늦게 꺼낸 고백이었지만, 남자친구는 어김없이 “늦게라도 말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p.s 융의 분석심리학 수업 중.

완벽은 인간이 달성할 수 없는 영역입다. 고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가장 완벽한 인간이죠. 자신의 못난 그림자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사람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무조건적 수용을 받을 때 변할 수 있습니다. ‘괜찮아,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좋아. 지금도 충분해’ 이런 말들 말입니다.


<행복> 골목언덕 길에서. 같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