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5년이 완벽하게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까 나는 어느새 원고 제출을 마쳤다. 심지어 이런 모든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빠뜨리지 않고 집 계약도 마무리 했다. 새로운 세입자를 찾았고, 집주인 부부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드디어 다 끝났다. 이 지난한 시간이.
처음에 유학을 나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학교를 구하지 못한다면 1년 만에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찾고 나서는 5년이 지나도 목차가 나오지 않는다면 모두 포기하고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5년 반 만에 원고를 마쳤다.
원고를 출력하고 돌아오는 길, 내 연구가 대단한 연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학 과정에서 내가 맞이했던 상황은 내 생각과 너무 많이 달랐고,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처음에 기획한 연구는 그렇게 진행될 리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만, 내 연구는 이곳에도 없고 저곳에도 없는 - 다시 말해 독일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 둘을 얽으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연구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연구라는 건 나를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출근길에 갑자기 만난 봄
그 지난 5년 동안 나한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우선 코로나가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이 난리가 났다. 사람을 여러 만났고 사람을 여럿 잃었다. 요가 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언니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외할머니도 돌아가셨는데 이때도 엄마 옆에도 있어주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연락을 주고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미국의 사촌과 아주 긴밀하게 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다짜고짜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연구를 위해 무언가를 내놔달라고 졸라 보기도 했다. 영어가 늘었다. 독일어도 늘었다. 당연한 일과 당연하지 않은 일, 일어나길 소망한 일들과 절대로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섞여 있다.
5년 반 동안 독일에 날아온 모든 친구들의 편지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모두 잘 분류해서 가지고 간다. ㅎㅎㅎ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짐을 챙길 때 깨달은 것이다. 편지다.
나는 사실 내가 여기에서 받은 편지들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에도 거의 사과 과장 하나 분량으로 친구들을 편지가 있지만, 독일에서 5년 반이나 지냈으니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는 친구들과 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게 또 상자 하나 가득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아서 역시나 두고 가야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정리하려고 하나하나 펼쳐 다시 읽어보다가 결국은 사람 별로 분류해서 차곡차곡 싸 짊어지고 가기로 했다. 다시 읽어보니 참 한결같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책과 차와 달달한 주전부리들을 계속 보내주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응원과 위로와 사랑 같은 걸, 도저히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사람 하나가 사는 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다. 고마운 일이다.
다른 짐은 거의 다 챙겼지만 요가 매트와 차도구가 들어있는 찬장은 그대로 있다. 아마도 귀국 전 날이 되어야 그것을 다 포장해서 가방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쓰고 있어서 짐에 넣는 것이 무리다.
요가 짐은 이제 매트만 챙기면 되지만, 차 짐은 더 늘어날 것 같다. 여기에서 홍차를 좀 사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선물이다. 어차피 올 여름에 한 번 더 나와서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은 이 짐들을 다 들고 가는 게 문제다.
책은 더 문제다. 책으로만 20키로 상자로 두 상자나 미리 보냈지만, 여전히 10키로 정도의 책이 남았다. 비행기에서도 읽을 것 같은 소설책은 가방에 넣어 갈 것이고, 짐으로 부쳐도 되는 것들은 또 잘 넣어야 한다. 책을 가지고 가려고 옷을 엄청 버렸는데, 아무리 버려도 한계가 있어서 나는 몸이 하나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많은 옷이 필요한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가 웃었다.
아니, 나는 눈도 두 개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많은 책이 있나. ㅎㅎㅎ
사실, 원고를 제출하고 나면 브런치에 글을 많이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초고 출력을 해서 들고 온 날 밤부터 앓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난 주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어제부터 좀 힘이 난다. 드디어 움직일만 하다. 일단 열이 내려서 다행이다.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지난 5년 동안 여기서 뭘 한거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제 내 미래에 더이상의 '계획'이 없어서 좀 불안하다. 전에는, 학사 마치면 석사 하고, 석사 마치면 박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박사 과정을 끝내니까 이제 뭘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일이, 나에게도 드디어 할 일을 찾아 헤메는 일이 된 것 같다.
어딘가 내 자리가 있겠지.
살아 있는 한은 먹고 살 수 있겠지.
일단은, 근황과 함께 매일 일기라도 적어 보려고 브런치에 오랜만에 글을 써 본다.
글쓰기도 일종의 관성이라, 자꾸만 뭐라도 써야 써지니까. 연구가 그랬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