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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이 Apr 17. 2024

떠날 준비

5년 반

드디어 5년이 완벽하게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까 나는 어느새 원고 제출을 마쳤다. 심지어 이런 모든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빠뜨리지 않고 집 계약도 마무리 했다. 새로운 세입자를 찾았고, 집주인 부부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드디어 다 끝났다. 이 지난한 시간이.






처음에 유학을 나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학교를 구하지 못한다면 1년 만에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찾고 나서는 5년이 지나도 목차가 나오지 않는다면 모두 포기하고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5년 반 만에 원고를 마쳤다.


원고를 출력하고 돌아오는 길, 내 연구가 대단한 연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학 과정에서 내가 맞이했던 상황은 내 생각과 너무 많이 달랐고,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처음에 기획한 연구는 그렇게 진행될 리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만, 내 연구는 이곳에도 없고 저곳에도 없는 - 다시 말해 독일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 둘을 얽으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연구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연구라는 건 나를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출근길에 갑자기 만난 봄



그 지난 5년 동안 나한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우선 코로나가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이 난리가 났다. 사람을 여러 만났고 사람을 여럿 잃었다. 요가 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언니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외할머니도 돌아가셨는데 이때도 엄마 옆에도 있어주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연락을 주고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미국의 사촌과 아주 긴밀하게 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다짜고짜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연구를 위해 무언가를 내놔달라고 졸라 보기도 했다. 영어가 늘었다. 독일어도 늘었다. 당연한 일과 당연하지 않은 일, 일어나길 소망한 일들과 절대로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섞여 있다.






5년 반 동안 독일에 날아온 모든 친구들의 편지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모두 잘 분류해서 가지고 간다. ㅎㅎㅎ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짐을 챙길 때 깨달은 것이다. 편지다.

나는 사실 내가 여기에서 받은 편지들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한국에도 거의 사과 과장 하나 분량으로 친구들을 편지가 있지만, 독일에서 5년 반이나 지냈으니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는 친구들과 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게 또 상자 하나 가득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아서 역시나 두고 가야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정리하려고 하나하나 펼쳐 다시 읽어보다가 결국은 사람 별로 분류해서 차곡차곡 싸 짊어지고 가기로 했다. 다시 읽어보니 한결같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책과 차와 달달한 주전부리들을 계속 보내주었다. 안에 들어있는 응원과 위로와 사랑 같은 걸, 도저히 '버리고' 수가 없었다.


사람 하나가 사는 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다. 고마운 일이다.






다른 짐은 거의 다 챙겼지만 요가 매트와 차도구가 들어있는 찬장은 그대로 있다. 아마도 귀국 전 날이 되어야 그것을 다 포장해서 가방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쓰고 있어서 짐에 넣는 것이 무리다.


요가 짐은 이제 매트만 챙기면 되지만, 차 짐은 더 늘어날 것 같다. 여기에서 홍차를 좀 사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선물이다. 어차피 올 여름에 한 번 더 나와서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은 이 짐들을 다 들고 가는 게 문제다.


책은 더 문제다. 책으로만 20키로 상자로 두 상자나 미리 보냈지만, 여전히 10키로 정도의 책이 남았다. 비행기에서도 읽을 것 같은 소설책은 가방에 넣어 갈 것이고, 짐으로 부쳐도 되는 것들은 또 잘 넣어야 한다. 책을 가지고 가려고 옷을 엄청 버렸는데, 아무리 버려도 한계가 있어서 나는 몸이 하나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많은 옷이 필요한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가 웃었다.

아니, 나는 눈도 두 개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많은 책이 있나. ㅎㅎㅎ






사실, 원고를 제출하고 나면 브런치에 글을 많이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초고 출력을 해서 들고 밤부터 앓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난 주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어제부터 좀 힘이 난다. 드디어 움직일만 하다. 일단 열이 내려서 다행이다.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지난 5년 동안 여기서 뭘 한거지?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제 내 미래에 더이상의 '계획'이 없어서 좀 불안하다. 전에는, 학사 마치면 석사 하고, 석사 마치면 박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박사 과정을 끝내니까 이제 뭘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일이, 나에게도 드디어 할 일을 찾아 헤메는 일이 된 것 같다.


어딘가 내 자리가 있겠지.

살아 있는 한은 먹고 살 수 있겠지.


일단은, 근황과 함께 매일 일기라도 적어 보려고 브런치에 오랜만에 글을 써 본다.

글쓰기도 일종의 관성이라, 자꾸만 뭐라도 써야 써지니까. 연구가 그랬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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