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생활과 2023년을 맞이하는 자세
2018년도에 유학을 나온 뒤, 때마다 고비가 아니었던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정말 우연히 행운과 행운이 깃들어서 어떻게든 버텨내고 극복해 냈다. 유학 2년 차 만에 팬데믹이 왔을 때에도, 어떻게든 해냈다.
그 이후에는 의사도 만났다.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은 훨씬 효과가 좋았다. 불안해서 잠을 못 자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고, 좀 덜 멍한 상태로 일에 집중할 수도 있었다. 의사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가 나에게 대답하듯 그게 내 마음에 어떤 작용을 하는 건지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도 내 마음의 상태가 정확이 어떻고, 그런 상태는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11월 말부터는 이런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한 번도 상상조차 안 해 본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아직 문장으로 쓰기가 어렵다. 말하고 나면 토할 것 같아지고 울렁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하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
그 일이 생긴 뒤에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의사와는 충분히 대화를 했고, 더 이상 외국인 의사에게 서로에게 외국어일 영어로 내 이야기만 열심히 쏟아 낸다는 것은 어쩐지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냥 그동안 살아왔듯이 어떻게든 삶을 살았다. 최대한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중 하나는 사경이었다. 인간은 어려울 때에 종교에 매달리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2022년 초에 시작했던 사경은 벌써 3회 차 필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나는 하루에 한 시간씩 사경을 했다. 마음이 복잡하면 한 시간 반도 했다.
요가도 마찬가지였다. 한 자세로 오랫동안 호흡에 집중하면서 한 시간 두 시간 우습게 요가에 몰두했다. 한 번은 후굴 자세로 너무 오래 있었는지 수카사나(정자세)로 앉았는데 앞가슴이 뻐그라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2023년 음력설을 앞두고서야, 나는 어쩐지 나에게 벌어지는 일에는 아무런 이유 같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을 떠나 왔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중엔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차마 알아볼 새도 없이 떠난 사람도 있다. 그런 일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 운명이라거나 숙명이라거나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의 영역에 있을 뿐이다. 현재를 직시하려면 사실만을 바라봐야 한다. 명확한 사실은, 이제 더는 그들이 내 곁에 없다는 것이고, 22년이 지나간다는 것뿐.
얼마 전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나는 내가 깨달은 사성제와 22년을 보내는 내 심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왕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감사하게도 어머니를 7일 만에 잃지 않았다. 서른몇 살이 넘도록 불특정 한 추종자를 몰고 다니지도 않으니, 골고다 언덕을 오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괴롭다고 여기는 내 생은, 어쩌면 그들이 가장 누리고 싶었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평범함이라는 것은 얼마나 흔하며 또한 얼마나 괴로운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고 무수한 이들이 선의 평범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돌고 돌아, 단 하나 남는 것이 바로 선하게 살기 위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어느 날 나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 속에도 부처가 있는 걸 깨닫는다. 부처라는 게 뭔가 종교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냥, 뭔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 명확한 어떤 선(善)의 실체 같은 거다. 모든 선함, 나의-우리의- 선함의 이유 같은 것.
드디어 달라이라마의 기도문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왜 나의 슬픔을 받아 들어야 하는지, 나의 행복도 내버려 둬야 하는지, 뭐 이런 것들이 모두.
이 모든 것을 깨달은 날, 나는 오랜만에 10시도 되지 않아서 잠에 들었다. 새벽 3시까지 잠들지 못하다 억지로 억지로 눈을 감았던 일들마저 다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잠들기 시작한 후부터는 5시쯤이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려 마시고 요가를 하면서 아침을 시작한다.
언젠가 일기장에 "행복한 기분이 되었더니, 위대해지겠다는 인간의 욕망 같은 것은 하찮게 느껴진다"는 문장을 적었던 적이 있다. 그날은 사소한 일로 소소한 행복감을 느낀 날이었다. 요새는, 행복하지 않을 때에도 위대해지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하찮게 느껴진다. 대신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선함만이 살아가는 목적이며 수단인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선하게 살기 위해 선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기한 게, 나는 전부 바뀌었고, 또 전혀 바뀌지 않았다. 먹고, 자고, 쓰고, 읽고.
그리고 언젠가는 지금 이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