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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고 Feb 23. 2024

그림을 배워볼까?

지금부터 시작해도 될까?

1. 도서관이 좋다


나는 고교 시절에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곤 했다.

집에서도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지만, 굳이 도서관에 다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기도와 같은 것이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은,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 이미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

편히 눕거나 아무 데나 앉아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기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도에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 1880~1882년, 브론즈, 68.6×89.4×50.8㎝, 파리 로댕미술관.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시험 삼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흉내 내 보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절로 생각에 잠길 것이다.

그런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도서관에 가는 것은 행위 자체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쐬는 신선한 나무 향기가 좋았다.

도서관 입구에 진입하면 벌써 느낄 수 있는 정숙한 분위기, 책의 냄새가 좋았다.

열람실의 사람들이 조용히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소리까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도서관에 가는 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날도 특별히 다를 바 없었다.


2. 만남의 순간


내가 다니던 도서관의 1층 열람실에는 잡지와 신문, 기타 잡다한 정보지 코너가 있었다.

카메라와 영상에 관심이 있던 나는, 그곳에 들러 월간 사진 잡지를 보고 영화 소식지를 본 뒤 2층의 열람실로 가서 공부하는 것을 일종의 루틴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그날은 실망스러웠다.

늘 보던 사진 잡지가 출판사 사정으로 발간일이 늦어진 것이다.

루틴의 시작이 깨지자 다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별 수 없이 공부할 학습지를 들고 열람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책의 커버가 눈에 들어왔다.


[미술신서 - 인체소묘]


김강학 著, 90년대의 <인체소묘>는 절판, 같은 저자가 2007년에 새로 낸 책


그 순간 학교 미술 선생님과 급우들이 내게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너,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미대 지원해 보는 건 어떠니?”


“와, 너 그림 잘 그린다. 어디서 배운 거야?”


사람은 타인의 평가로 인해 행동이 제약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새로운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내게 그날의 그 순간은 새로운 행동이 펼쳐지는 시간이었다.


3. 감동의 순간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 들고 첫 페이지를 넘기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일요일 아침의 따사로운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들, 그리고 빛에 비쳐 보이는 약간의 먼지들.

떠돌아다니는 은빛의 먼지들이었다.

깃털처럼 날다가 책 위에 아주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것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흩어져 갔다.


내 두 눈이 흐려졌다.

눈물이 솟아나며 눈가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나를 바라보며 웃거나 울거나 생각에 잠긴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었다.

연필선의 움직임에 따라, 피부 표면의 결이 그대로 나타났다.

야구 선수 복장을 한 사람이 쓴 안경에 비친 창문이 나를 그 순간으로 이끌었다.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연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나타난 부분들을 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이렇게 그리고 싶다. 평생 그림으로 먹고살고 싶다.”


공부하러 간 도서관에서 그림에 대한 열망을 이식받은 순간이었다.


4. 미대에 들어가다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흔히 존재하는 편견이 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니 미술로라도 대학을 가는 거 아니냐.

그런 사람들도 분명히 다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나, 내신 성적이나 수능과 실기의 균형이 제대로 잡지 못하면 좋은 대학교에는 진학할 수 없다.

또한, 소질이나 적성은 저마다 달라서 공부보다 실기에 특화된 아이들, 또는 손보다 발상의 능력이 좋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진학을 준비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우수한 선택이다.


그러나 우수한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균형감이 중요하다.

미대입시학원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성적은 학교를 결정하고, 실기는 합격을 결정한다."

그 말은 대체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편견은 여전히 유효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공부를 제법 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미술을 진로로 선택하겠다는 말에, 담임 선생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집에서는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쳤다.


“누가 널 꼬드겼니?”


선생님과 부모님 및 여러 어른들이 이런 의문을 나타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손가락이 부러져도 좋아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내 말이 어른들에게 참 치기 어린 열정으로 보였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내 치기에 대해, 며칠을 고민하신 부모님은 봉투 하나를 내미는 것으로 화답하셨다.


"내일부터 미술학원 알아봐."


태어나 그때까지 자라면서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린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다음 날부터 학교 미술부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미술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군데를 알아보고 가장 마음에 끌린 서울의 모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그렇게 1년 반의 미대입시로는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운 좋게도 초수로 서울 소재 대학교 합격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껏 미술가로서 살아오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


5. 미술, 지금 시작해도 될까?


이후로 여러 가지 우연과 인연이 거듭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을 쌓아 왔다.

예중예고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어린 친구들, 미대 입시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는 고교생 이상의 학생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예비 교사들, 적당한 취미를 찾고 싶어하는 주부 또는 직장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여러 사설 기관을 거치며 가르치는 경험들을 통해 느낀 것이 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든 배우게 된다."


이십 년 쯤 전에 가르친 학생이 생각난다.

그녀는 결혼 후 아이를 가지고 퇴직해서, 자녀를 대학교까지 보내고 나서 본인의 인생을 돌이켜 보니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미술 전공이었다는 분이었다.

 서울 소재 유명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신 분이었는데,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꿈을 이루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배움에 임했고 유명한 대학교 편입 입시에 성공했다.

 

 강원도 소재 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도 떠오른다.

패션과 미용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직장에 다니면서 비로소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그녀 역시 열심히 준비해서 포트폴리오 전형으로 나름대로 괜찮은 4년제 대학교 편입에 성공했다.


물론 성공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재주와 능력에 비해 처참하게 깨지는 경우도 왕왕 목격했다.

상당한 손재주와 학업 성적에 비해 현장에서 본인의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는 심심찮게 존재한다.

그럴 때면, 학생의 좌절감에 비례해 자책감도 심하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례는 미술을 제도권에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좁은 문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에게 경쟁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

다만, 나는 그것만이 미술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지하게 전시를 하는 작가가 되느냐에 대한 답은 아니다.

왜냐면, 그것은 본인의 선택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을 즐기는 여러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다.


미술, 지금 시작해도 될까?


물론이다.



※메인 화면 이미지 : 강무련, <비내리는 숲>, 410X530(mm), 캔버스에 목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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