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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고 Feb 23. 2024

Restart, 그림을 그림에 대하여

그리다. 그 아름다움.

1. 그림을 왜 그리세요?


“선생님, 그림은 왜 시작하셨어요? “


“오빠는 왜 그림을 배우게 됐어요?”


“너는 그림이 그렇게 좋니?”


그리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연필이나 붓 등을 이용하여 선이나 색으로 나타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다.


동일한 뜻은 아니지만, ‘그리다’라는 단어에 대해 국어사전에 나타난 정의다.


내가 그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공부한 이후로, 무언가를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호의 또는 호기심이 섞인 반응을 꾸준히 보아 왔다.


그린다는 행위가 주는 신비감이 있는 것일까?

또는, 생산성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미적 행위에 천착하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눈에 다소 희한한 사람들로 보이는 것일까?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때때로 마주치는 질문들이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미술을 통해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좋아한다.

내가 바라보고 느끼고 만들어내는 세계를 사람들의 눈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행복하다.


내 작품을 보며 내가 바라보던 것을 함께 느끼는 사람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는 사람들,

의도와 다르게 보는 사람들 내면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계.


이 모든 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한다.

설레고, 떨리고, 두렵고, 즐겁고, 슬프고, 애달프다.


2. Now + here = nowhere


몇 년 전, 도쿄의 우에노 공원 근처에 있는 도쿄도미술관에서 코톨드 갤러리의 인상주의 컬렉션 전시회를 볼 기회가 있어 방문했다.


마네, <폴리 베르제르 술집>, 1882, 유화, 97×130cm
르누아르, <특별관람석>, 1874, 유화, 80 x 63.5cm



인상주의.

널리 알려진 그 이름답게,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작품들을 보며 전율했다.

마네의 작품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앞에서 보낸 시간,

르누아르의 [특별 관람석] 앞에서 얼어붙었던 나.


그때의 나는 마네와 르누아르가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의 그 장소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잠시 같은 시간을 보냈다.


대작가들의 손끝에서 힘차게 내달리던 붓질의 순간,

그러다 그들이 머뭇거리며 고민했던 어느 한순간,

그림을 마감하며 작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을 그 순간까지.


나는 잠시 1800년대의 어느 화실에 있었다.


작품을 만들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고, 작가들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100여 년.

그들이 작품을 만들었던 화실은 그곳이 아니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지금(now), 그리고 여기(here)는 없다(nowhere).

그러나 작품은 남아서, 그것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가의 시간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생물학적 의미와 다르지만, 작품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3. 불멸에 대한 욕구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은 먼 옛날부터 많은 이미지들 만들고 남겨 왔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는 생존을 위한 사냥으로 죽어간 동물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라스코 동굴 벽화, 이집트의 피라미드, 고구려나 백제의 왕릉 벽화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조들이 남긴 이미지들이 숱하게 전해져 내려온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약 18,000년 전, 스페인 칸타브리아 산티야나 델 마르


추측컨대, 죽어간 동물들이 다시 나타나 인간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기를,

사랑하거나 존경하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은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숯으로, 나중에는 돌에 새기고, 석회를 짓이겨 바르고, 수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온갖 기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일종의 그리움을 그린 것이 아닐까?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워하다.”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생명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세상에 남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불멸을 추구하는 것일 테다.

나 역시 그런 불멸의 대열에 동참하고 싶은 것이다.


4. 예술은 고통인가


“너는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냐?”


얼마 전까지 함께 작업하던 선배 작가가 물었다.

그에 대해 내 생각을 피력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아름답게 풀어내는 것이 아닐까.


“너는 작업하면서 행복하냐?”


이어진 그의 물음에 대해, 나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예술가가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예술은 끝없는 고통과 고민을 통해 나오는 거야.

고통스럽고 힘들고 끝없이 괴로운 게 작가의 삶이다.

즐겁다는 건 아직 예술가로서 살아온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야. “


그러면서 그는 내게 철학 서적, 이론서들을 추천해 줬다.

예술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알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과 함께.


그 말에 대한 지금까지의 내 대답은 글쎄요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즐겁다.

알기 위해 노력을 할수록 지적 포만감으로 뇌에 불이 켜진다.

그의 말대로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술이 반드시 진지하고 심각한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에는 심각한 우울이 충분히 넘쳐나고, 생기 잃은 사람들의 반복되는 걸음걸이로 콘크리트가 닳아 가고 있다.

적어도 내가 만든 작품, 그것들로 실행하는 전시는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기를 바란다.

우울의 바다에 한 바가지를 더하고 싶지 않다.


물론 대책 없이 행복하기만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작업을 하며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 에너지를 작품에 녹아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작가의 고통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행복을 원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원한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이미 행복하다.

그것을 위해 나는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Restart. 그림을 그림에 대한 그리움을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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