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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꿈

Einstein’s Dream by 앨런 라이트먼

by 분당주민

뉴욕 출장이 잡히고 광화문 인근에서 미팅 후 들린 교보문고.

기내에서 보기 좋은 책이 뭐가 있을까 10분여를 고민하며 돌아다니다 이쁜 커버, 적당한 책의 두께

그리고 아인슈타인이라는 익숙한 키워드를 보고 고민없이 집어 든다.


8.10일 뉴욕행 KE081편 좌석에 앉아 익숙하게 책을 꺼내고

망할 노안 때문에 돋보기를 챙겨 자리에 두고 가방을 선반에 올린다.

책의 두께를 확인하니 오며 가며 읽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까지는 14시간 15분이 예상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에 뉴욕 가다가 다 읽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륙하고 10여분 읽은 결과 어… 이 책 뭐가 이리 어렵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거지? 다 못 읽겠는데.


동해를 지나 일본 상공을 진입하기 전인 것 같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간에 대한 상상을 해본다.


저자인 앨런 라이트머 (Alan Lightman)은 물리학자이자 인문학자, 작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과학과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하고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와 MIT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는데, 지금은 MIT에서 인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뭐야…가끔 책을 읽으며 저자를 검색하다 보면 인간의 재능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인간들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꿈”은 저자의 첫 소설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아름답고 철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가? 과학적 상상력도 어려운데 여기에 아름다운 문체와 철학까지 담아내다니)


주인공은 젊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고 그의 절친한 친구인 미켈레 베소가 종종 등장한다.

(아인슈타인은 그를 "생각의 동반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소는 스위스 베른이고 책을 읽다 암트하우스 거리, 마르크트 거리와 같은 구시가지를 검색하게 된다.


1905년 4월 14일부터 6월 28일까지 아인슈타인이 매일 밤 다른 형태의 시간에 대한 꿈을 꾸고

이 책은 그 꿈들을 각각 짧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엮는다.


각 장은 "시간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보여주며

시간의 본질을 문학적,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책에서 시간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묘사한다.

1. 시간이 원이라서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간다고, 세계는 정확하게,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라는 가정.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자기 자신이 똑같은 삶을 되풀이하면 살게 된다는 것.

(무한한 타임 루프에 걸려 톰 크루즈의 영화 edge of tomorrow 같은 느낌인 것 같다)

2. 시간이란 이따금 조그만 흙더미에 부딪히고 미풍에도 방향이 바뀌는 물의 흐름과 같은 세계. 과거를 조금이라도 바꿔 놓으면 미래가 엄청나게 바뀔 수 있다는 것.

3. 서로 상반되는 세계에 살면서도 각각에 대한 이유를 알기만 하면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

4. 기계시간이 있고 체감시간이 있는 두 가지 시간이 있는 세계.

미리 정해진 그대로 변함이 없는 시간과 움직여 나아가면서 정해지는 시간.

5. 산위에서만 살고 있는 이상한 세계. 옛날 어느 때에 과학자들은 지구의 중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시간이 더디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젊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자 산으로 집을 옮긴 세계

(집들이 모조리 돔산이나 마테호른산이나 몬테로사산에 지어져 있다)

6. 시간을 볼 수 없는 세계, 시간을 재는 기구와 마주칠 일 없고 시간은 끝없는 지배자이며 절대군주인 세계, 종교가 있는 사람은 시간을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보는 세계

원인과 결과가 일정하지 않는 세계, 인과관계가 없는 이 세계에서 속수무책인 과학자들

7. 시간이 가기는 해도 그다지 벌어지는 일이 없는 세계. 시간과 경과가 일치한다면 시간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세계.

8. 세계의 종말이 닥치는 시간. 다들 같은 운명이어 평등한 세계.

9. 시간이 지날수록 질서가 잡혀가는 세계. 질서는 자연의 법칙이며, 우주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

10. 시간이 멈춘 세계.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고 사람들은 행복한 순간에 머물려 하거나, 두려운 순간에 갇혀 버리기도 한다

11.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세계. 오로지 고정된 상像만이 있는 세계.

12. 기억이 없는 세계는 현재의 세계댜. 과거는 책 속에서만 기록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억이 없으면 매일 밤이 첫 밤이고 매일 아침이 첫 아침이며 입맞춤을 할 때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때가 처음인 것이다.

13. 속도에 집착. 이 세계에서는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기 때문에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시간을 벌고자 한다.

14. 시간이 꺼꾸로 흐르는 세계

15. 단 하루만 사는 세계

16. 시간이 시각이나 미각 같은 감각인 세계에서 한가지 일은 빨리 일어날수도 느리게 일어날 수도 있고 원인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순서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17. 사람들이 영원히 산다고 생각해 보고 나중족과 지금족으로 갈라지는 세계

18. 시간을 잴 수 없는 세계

19. 미래가 없고 모두 현재에서 끝나버리는 세계. 미래가 없는 세계에서는 매 순간이 세상의 종말이다.

20. 시간이 중간중간에 끊어지는 불연속적인 세계

21. 지역에 따라 시간이 다른 세계, 시간이 지역에 따라 다른 이 세계에서는, 서로 따로따로 떨어져 사는 이 세계에서는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다양하다.

22.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세계, 우리는 우리 삶의 구경꾼이 되는 세계.

23. 기억이 삶이 되는 세계.


뉴욕에 있는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아서 틈나는 시간 돌아다는 대신 호텔 발코니에서 책을 읽었다


이렇게 다양한 시간이 존재하는 세계속에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간 이 하나의 단어로 이 책은 25가지가 넘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 기발하다.

물리를 좀 알면, 내가 좀 더 이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면 머리속에 그릴 이미지들이 많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이 책을 읽으며 이해가 안되서 잠깐 불행했지 나는 물리를 모른다고 불행해 하지는 않는다) 원하는 머리속에 이미지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인문학에 관심이 많고 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마케팅, 광고, 기획만 해본 나는,

이 책에서 시간에 대해 느낀 점을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이 책에서 가장 강렬했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연상된 챕터는

세계의 종말이 닥치는 순간, 다들 평등한 운명이어서 평화로운 풍경이다.

워낙 디스토피아 소설, 영화, 드라마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종말이라고 하면

좀비가 나타나고, 폭통, 방화, 약탈과 같은 혼돈의 세계가 그려질텐데

평등한 운명과 장엄하며 고요한 음악과도 같은 마지막을 그리는 모습에서 왜 이 책이 문학적인가를 느낀다.


시간은 흘러간다. 시계는 오른쪽 방향으로 큰 원을 그리며 멈출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시간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빠르게 나아가고,

모든 시간은 속도와 효율에 집착하게 되고 이 결과

내가 살아온 10대 20대 30대보다 시간과 시계에 쫓기며 살아가는 세대가 된 것 같다.

스마트폰이 나오고 시간은 더 빨라졌고 AI의 시대의 초입인 것 같은데

삶의 속도가 더욱 더 빨라지는게 느껴진다.

시간의 속도와 효율은 빠른 검색 도구를 통해 더욱 더 가속되는 느낌이고 인간은 수천년 전 늑대가 개로 사육되며 축소된 뇌용량과 비슷하게 사색하지 않고 비판적이지 않는

그런 인지적 축소의 과정을 거쳐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는 하루가 지나면 현실인지 잠깐 꿈을 꾼 기억밖에 없는 삶이 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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