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으로 남은 사랑
오늘 아침, 책장을 넘기다 ‘행림회춘(杏林回春)’이라는 사자성어를 만났다.
살구나무 숲에 다시 봄이 돌아온다는 뜻.
짧은 네 글자 안에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옛 오나라에 동봉이라는 의사가 살았는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도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살구씨 하나를 뒷산에 심고 가게 했다.
처음에는 작은 씨앗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감사가 쌓이고 시간이 흐르자, 그 뒷산은 어느새 살구나무 숲이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봄이면 연분홍 꽃이 산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책을 덮은 채 앉아 있다.
‘돕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동봉은 돈을 받지 않았지만, 대신 씨앗을 남겼다.
당장의 보상보다 더 오래 남을 선물을 택한 것이다.
그 선택 하나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봄을 남겼고, 누군가의 산책길을 만들었고, 아이들의 소풍 장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인들의 봄놀이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자주 즉각적인 대가를 바라본다. 도와주면서도 계산을 하고, 베풀면서도 마음속 장부를 적는다. 하지만 동봉은 달랐다. 그는 씨앗을 심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주는 기쁨’을 직접 경험하게 했고, 동시에 모두가 함께 누릴 숲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야말로 옛사람들의 지혜가 아닐까.
만약 지금도 어딘가에 그 살구나무 숲이 남아 있다면, 나는 꼭 봄날 도시락 하나 들고 그곳으로 봄놀이를 가고 싶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해 보고 싶다.
이 숲은 한 사람의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여 완성된 풍경이라는 것을.
오늘 아침, 행림회춘이라는 네 글자가 내 마음에도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봄이 되어줄 수 있을까.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 누군가의 삶에 꽃이 피는 그런 씨앗을 심을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남긴 작은 친절 하나가 살구나무 숲처럼 자라나 누군가의 봄놀이 장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오늘은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보기로 한다.
한창 봄의 땅속에서 벌어지고 있을 새싹들의 잔치를 조용히 기다려본다.
봄은 그렇게, 살며시 살구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