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살아봤습니다-28(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가족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

by AMAP

약 30년 전 당시 80대 후반이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집에서 식사하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그러고는 딱 이틀 평안히 누워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집에서 돌아가셨어도 할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


외국 영화를 보면 주로 집에서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은 거 같다. 가족들이 침대에 빙 둘러선 상태에서 곧 망자가 되실 분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 컨디션으로 가족과 지인들에게 명확한 언어로 작별을 고하긴 어렵겠지만 서로 손잡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는 것은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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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스클레피우스 치료 장면(책), (우) <알쓸신잡>의 한 장면

그리스에 있을 때 하루는 영어 잡지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이 새겨진 부조물 사진을 봤다. 아래 설명을 보니 피레우스 고고학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피레우스에 고고학박물관이 있었어? 바로 피레우스로 출동했다. 이런 건 곧바로 실물로 봐줘야 직성이 풀리니까. 피레우스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항구로 예전에 '알쓸신잡' 프로그램에서 그리스에 왔을 때도 피레우스 어느 식당에서 녹화를 한 적이 있다.


아스클레 실물.jpg 아스클레피우스 치료 장면 실물

불과 1시간 전 책에서 봤던 작품을 실물로 영접했다. 정확한 연도는 나와있지 않았지만 뭐 대략 기원전 4~5세기 정도 되겠지. 2,500년 전 그리스에서 의사가 환자를 보는 장면을 보다니! 환자 발치에서 가족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고, 의사 뒤에서는 엄마로 추정되는 여인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환자를 바라보고 있다. 딸이 아파서 치료받는 과정을 지켜보는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런데 원래 보고자 했던 아스클레피우스의 작품 외에 생각지도 않은 다른 것들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묘비이다. Stele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 석판 묘비들 여러 개가 전시되어 있었다. 돋을새김으로 표현된 내용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거의 대부분이 돌아가시는 분과 가족들이 서로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악수하는 장면이다.


남편이 아내에게.jpg 남편이 세상 떠나는 아내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

길쭉한 항아리 모양의 묘비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내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고 김광석님의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중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라는 맘 아픈 구절이 생각난다. 이때는 평균수명이 낮았을테니 떠나는 아내도 어리고 남은 남편도 젊었을 것이다. 어쩌면 남편은 아내 앞에선 눈물 흘리다가 화장실 가서 빙그레 웃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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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들이 아버지에게, (우) 아들이 어머니에게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는 모습도 있었다. 때가 되어 떠나지만 부모들은 그 상황에서도 남은 자식들이 걱정됐을 것이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얘들이 잘 지낼라나..' 그나마 남은 자녀들이 장성한 후라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그 당시에 어떻게 저렇게 생생한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기원전 4~5세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 채로 가족들과 인사하고 떠난 사람들도 있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별의식 없이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의 모습은 다 달랐겠지만 사람들의 소망은 동일했나 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바라보며 손잡고 작별인사를 꼭 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탄생했겠지.


죽음은 모두가 언젠가 맞이할 순간이다. 나도 몸과 마음이 허락한다면 '그동안 행복했다. 먼 훗날 다시 만나자'라는 인사를 가족들에게 건네며 헤어지고 싶다. 먼 옛날 지구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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