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면하시길..
헤이그라는 도시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라는 걸 들어봤기 때문이다. 좀 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그 회의에 파견되었던 밀사 세 분(이상설, 이준, 이위종)도 생각날 것이다.
헤이그에 왔으니 1907년 만국평화회의 당시 우리 대표단의 흔적을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시내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었다. 그분들이 당시에 머물렀던 De Jong이란 이름의 호텔 건물이었는데 나중에 일반 가정집, 당구장 등으로 쓰이다가 1995년 이준 아카데미라는 곳에서 구입하여 현재 이준열사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그분들이 묵었던 방에도 가보고 유품들도 보고 싶어 찾아갔는데 이런..코로나 때문에 임시휴관이었다.
나중을 기약하며 집에 와서 1907년 당시 상황을 한 번 떠올려 봤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기고 여기저기서 항일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시기였다.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 고종의 밀지를 받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화란이라 불리는 먼 나라로 떠났다. 가는데 얼마가 걸릴지, 가서 출장 목적을 달성할 수나 있을지, 생각지도 않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 것도 확정되지 않았다. 일단 가는 것이다. 한줄기 희망을 품고(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세계 질서는 판이 짜여진 상태였다..).
그 분들의 주요 일정을 찾아봤다.
이준 서울 출발(4.22) -->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출발(5.21) --> 뻬쩨르부르크에서 이범진 공사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하여 헤이그로 출발(6.4) --> 헤이그 도착(6.25) --> 만국평화회의 의장 방문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함(6.29) -->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대표들에게 지원을 호소했으나 역시 거절당함(6.30) --> 대표단 비공식 모임에 참석해서 이위종이 연설(7.9) --> 이준 분사(7.14)
헤이그까지 오는데만 두 달 이상 걸렸다. 오는 내내 이상설, 이위종과 회의도 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 대표단을 설득할 문서도 작성했겠지. (아마도) 검사 출신인 이준이 초안을 작성, 출장단 대표인 이상설이 내용 검토 후 최종 컨펌, 통역관인 이위종이 영어 또는 불어로 번역..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헤이그에 와서도 회의 의장과 주요국 대표들을 만나려고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았을테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가는 길을 막고 호소하지 않았을까. 상대국 대표는 당황해 하면서 자리를 피하고 옆에 있는 떡대 똘마니들이 '어이! 니들 뭐야, 꺼져 시꺄!!' 했겠지. 일본이 이미 손을 써놔서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을 터.
분통터지고 열받아서 밥이나 넘어갔을지, 잠이나 제대로 잤을지. 당시 호텔에서 만국평화회의장까지 직선거리 900m정도 된다. 도보 13분 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20일간 온갖 스트레스 다 받았겠지. 그러다 결국 이준 열사는 식음을 전폐하다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싶다. 이준 열사의 죽음을 보통 분사(憤死)라고 표현한다. 분해서 죽었다는 말이다. 나도 과거 한 때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 잠을 못자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던 경험이 있는데..죽기까지 할 정도면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을지.
1963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시기 전 계셨던 묘역에 다녀왔다. 여기서 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 옆에서 56년간 쓸쓸하게 계셨다. 늦었지만..영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