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미덕

<창작자를 위한 픽사 스토리텔링>을 읽고

by 끄루쓰

"요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은 너무나 성급하게도 시나리오 집필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지도 않은 채 타자기 앞으로 달려간다.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 p.29)"




옛날 옛적에 실력도 없으면서 예술가병이 씨게 온 한 소설가가 있었다.

클래식을 즐겨 읽던 그는 시나리오 작법, 이야기의 구조, 스토리텔링 공식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인간사가 어떻게 공식으로 설명될 수 있으랴. 정답이 없는게 인생의 본질인데, 인생이 와글거리는 소설에 공식을 부여하는건 기만 아니겠는가. 마르께스, 보르헤스, 피츠제럴드가 서사의 공식을 운운했을까. 그럴리가 없다는 굳건한 믿음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작법서 읽을 시간에 차라리 문학 전집 한 권을 더 읽는 게 더 나을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이미 중단편 소설 하나를 완성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단편 쓰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얼마 전 우연히 집 근처 카페에 갔다가 그림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 악어는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작은 악어새는 악어 입에 들어가 한참 이에 낀 고기를 쪼고 있었다. 악어새를 향한 악어의 사랑은 눈물겨웠다. 입을 닫으려는 본능을 억제하면서까지 악어새가 입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빨 사이의 고기를 쪼아먹도록 허락하는 것이니까.

그는 결심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 착안한 사랑 이야기를 써보기로.


주인공은 같은 잡지사에 다니는 두 여성으로 정했다. 한 명은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 또 한 명은 그런 차가움을 꽃같은 웃음으로 녹일 수 있는 사람으로 정했다. 악어와 악어새는 결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연적이 없군. 삼십대 대형 로펌 출신 남주인공을 추가했다. 삼각구도는 뭔가 아쉬워 가상의 남자 캐릭터 하나를 또 추가했다. 세계관의 규칙을 정하기도 전에 벌써 인물이 넷이나 생겼다.

그는 당황했다. 둘은 순식간에 넷이 되었다.

마음 속에서 마구 질문이 샘솟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어떻게 보여주려고? 남자가 둘이나 들어가서 뭐 할건데?

하나하나 답을 고민하다 지친 그는 컴퓨터를 끄고 책을 폈다.

마르께스의 명작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으며, 사랑에 대한 원론적인 감성을 충족하려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이년이 지났다.


마르께스는 소설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소설가는 스토리텔링 작법서를 펼쳤다.

그는 깨달았다. 그건 신념이 아니라 자만이었다는 것을.

끄루쓰, 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작법 공부부터 해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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