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여행기
"후…," 공항 문 앞에 다다르니 페 깊숙한 곳으로부터 긴 숨이 흘러나왔다. 긴장을 했나 보다. 일본 여행이 처음도 아니면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공항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매케하고 건조한 공기.
상기된 얼굴로 이리저리 공항 사이를 바삐 오가는 여행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겁게 보이는 캐리어. 한 손엔 여권, 다른 손엔 핸드폰을 쥔 채다. 두 손은 짐에 묶여 버거워 보였지만, 발걸음은 가볍고 들떠 있었다. 다들 이미 마음은 목적지에 닿아 있겠지.
공항을 가득 메운 후끈한 열기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활기찬 풍경 속에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안하고 서먹서먹한 눈빛의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마치 목적지를 잘 못 찾은 이방인처럼.
'나,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날은 언니와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언니의 쉰을 기념하기 위해서. 오십은 그런 숫자니까.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를 자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에너지를 축척하는 시기. 그럴 때 여행은 좋은 선물이 된다. 여행만큼 마음을 재충전시키고 삶의 원동력을 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인파 속에서 진청바지에 산뜻한 푸른색 셔츠를 걸친 언니가 보였다. 옷차림에서부터 설렘이 가득 묻어나는 오늘의 주인공. 특별한 여행이어서일까. 더욱더 기대감에 들뜬듯했다. 그런 언니를 보면 같이 신나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더 움츠러 드는 나.
그렇다. 사실, 얼떨결에 이번 여행의 가이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일본을 여행했던 나와 달리, 일본이 처음인 언니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노련한 가이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일본어에 능통한 동생과 함께였고, 그런 연유로 나는 생각보다 이 나라에 대해 무지했다. 평생 관광객으로 동생만 따라다녔는데, 갑자기 뒤바뀐 처지에 심리적 부담이 크게 다가왔다. 왠지 쉽지 않은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오사카 시내에 발을 디디기도 전, 난관에 부딪혔다. 간사이 공항에서 호텔이 있는 난바 역으로 가기 위해 한국에서 미리 라피트 열차를 예매했다. 그리곤 개찰구 앞에서 핸드폰에 있는 큐알코드를 찾는데, 웬일인지 큐알코드가 보이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하기 10분 전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역무원에게 바우처를 내밀며 상황을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예약 페이지를 들락날락 한끝에 겨우 티켓을 찾아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폭풍우는 쉬지 않고 몰아쳤다. 호텔에 짐을 풀고 동양적( 오사카의 유명 맛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갔다. 사전 조사로는 지하철을 타고 네 정거장만 가면 우메다 역에 갈 수 있다고 해서 내심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하철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야 할 노선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난바 역은 서울역처럼 기차와 지하철이 함께 있고 꽤 복잡한 구조였다. 그리고 하필 우리가 타야 할 노선은 가장 끄트머리에서 지하 4층까지 내려가야 있었다. 결국 역사 안에서 30분 이상을 헤맨 끝에 겨우 지하철에 오를 수 있었다.
고생 끝에 만난 스테이크는 유난히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날의 모든 노고를 잊게 할 만큼. 하얀 거품이 가득 올라간 생맥주와 함께 돌판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스테이크를 음미하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모든 위기가 종결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진짜 사건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터졌다.
전 세계에서 찾는 놀이동산인 만큼 우리는 대기가 길 것을 대비해 미리 호텔에서 티켓을 구매했다. 어눌한 영어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프런트 직원이 한국말을 해서 안심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오픈런을 했음에도 대기 줄이 어마어마했다. 일찍 오길 잘했다고 셀프 칭찬을 하며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속에 녹아들었다. 태양은 세상을 불살라 버릴 듯 뜨거웠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40분여를 땡볕에서 기다린 끝에 드디어 바코드를 찍고 입장하려는 찰나였다. 티켓을 바코드 인식기에 갖다 댔는데 '삐삐'하는 불길한 신호음이 들렸다. '설마, 내가 잘못 접촉한 거겠지' 하며 다시 한번 인식 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 초조하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멍하게 서있으니 직원이 다가와 티켓을 확인했다. 그리고 듣게 된 청천벽력과 다름없는 말.
'티켓 오픈일이 오늘이 아닙니다. 다른 날짜로 되어있으니 서비스센터에서 날짜 변경이 가능한지 확인하세요. '
탁,하고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무려 티켓값이 18만 원. 변경이 안된다면 다시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지 꽉 막힌 고속도로에 줄지어 선 차들처럼,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족히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휴…. 일찍 들어가려고 오픈런에, 택시까지 탔는데. '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직원 말만 믿고 날짜를 미리 확인하지 않은 내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초조한 마음으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 티켓 날짜는 변경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분이 이런 걸까. 그제야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숨이 나갔다. 무사히 어드벤처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여행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다이내믹 했던 3박 4일.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유니버설을 갈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매일이 엉덩이가 연실 들썩이는 롤러코스터위에 있는듯했다. 내리고 싶지만 절대 내릴수없는. 그러나 그 모든 고생과 설렘이 모여 더 잊지 못할 의미 있는 여행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도톤보리의 화려한 네온사인보다, 서바이벌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온몸으로 겪어낸 모험이 더욱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어쩌면 특별한여행은 특별한 장소가 아닌 예고편없는 롤러코스터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