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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면 알게 되는 마음의 모양

by 윤하루


가끔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괜찮은 척 웃기도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설명되지 않는 서운함이나 무거움이 남는다.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 뒤에는 어딘가 모르게 텅 빈 느낌이 따라붙는다. 말로 표현하려 하면 너무 복잡하게 얽히고, 그냥 넘기자니 마음이 자꾸만 눌리는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글. 잘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괜찮다. 오늘 있었던 일, 지나가듯 떠오른 생각, 혹은 마음 한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감정을 적는다. 단정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로 흘러가는 내 안의 흐름을 따라간다. "오늘은 유난히 지치는 날이었다" 같은 단순한 문장 하나가 마음의 문을 연다.

신기하게도, 쓰다 보면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가 선명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피곤하다고 느꼈지만, 몇 줄을 쓰다 보면 그 피로 속에 외로움이 있었고, 기대했던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쓰는 행위는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을 천천히 끌어올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정리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문장이라는 형태를 갖추면서,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성인이 된다는 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감정이 올라오면 터뜨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넘기는 일이 익숙해진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는 줄어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단 관계의 평화를 선택한다. 그렇게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들은 어디론가 흘러가야만 한다. 나는 그 감정들이 안전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종이 위에 길을 만들어준다.

몇 달 전, 직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피드백을 받았다. 실망스럽기도 했고,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쿡쿡 찔렸다. 기분이 상한 이유를 말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남았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아무 말이나 적기 시작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로 시작된 문장은, 어느새 "나는 왜 그 말에 그렇게 흔들렸을까"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내 안의 감정을 하나씩 들여다봤다. 불안, 자존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어릴 적의 기억들까지… 그 모든 조각이 글 속에서 천천히 얼굴을 드러냈다.

글은 해답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글은 방향을 알려준다. 막막했던 감정의 정체를 드러내주고, 그 감정을 조금은 다정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때론 글을 쓰다 울게 되기도 하고, 때론 괜히 웃음이 나기도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나만의 언어로 쓴 글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그 솔직한 기록들이 나를 다독여주고, 다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어준다.

글이 꼭 잘 써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문장이 서툴러도, 맥락이 없어도 괜찮다. 맞춤법이 틀려도 상관없고, 같은 말을 반복해도 좋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매일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자. "오늘은 나를 좋아할 수 없는 하루였다", "괜찮은 척하느라 지쳤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같은 문장이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오래된 감정이 글을 통해 비로소 언어를 갖는다. 잊은 줄 알았던 사건이 문장으로 다시 떠오르고, 그 안에 묻혀 있던 감정이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넨다. 쓰는 동안 나는 과거의 나와 대화하고, 현재의 나를 이해하며, 미래의 나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낸다. 그렇게 글은 시간 속에서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된다.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어떤 생각이 나를 붙잡고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내 하루를 흔들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들쑥날쑥하더라도, 그것 또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감정은 정확해야 할 필요가 없고, 설명 가능해야 할 이유도 없다. 느끼는 대로,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이 진짜 쓰기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어려운 날이 있다면, 오늘은 스스로에게 말 걸어보자. 조용한 밤, 한 장의 노트, 한 줄의 문장이 당신의 마음을 꺼내줄지도 모른다. 바쁜 하루 속에서 단 몇 분만이라도 나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우리는 글 속에서 조금씩, 나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는, 더 단단하고 따뜻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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