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임마 가끔은 내 볼에 묻은 잉크도 좀 지워주고, 어? 종이에 잉크 다 번지는데 보이지도 않나봐? 저 지우개 똥은 언제 치울래? 그리고 난 언제까지 그 더러운 펜이랑 붙어있어야되는거야?? "
이렇게요.
이해할 수 있는 불평입니다. 하루 10 시간을 넘도록, 손은 펜을 그러쥔 채로 종이 위를 오갑니다.
언제 가만히 쉬지를 못하고, 만날 책상 위에서만 돌아다니니 사람이라면 지루해 할 만도 합니다.
하물며 손의 주인인 저나, 수많은 다른 고등학생들은 오죽할까요.
바른 공부는 언제나 바람직하고, 또 곧 사회로 나아갈 학생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전 지금까지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동차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 하나가 있어서 동기 부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모범적인 이야기이고.
굳이 펜을 잡고 공부를 하는게 아니더라도, 딱딱한 책상 앞에 앉아서 보는 책은 재밌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새롭기에 즐겁고, 다르기에 즐겁습니다.
공을 향해 뻗어나가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아낼 수도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뽐내는 매화를 두고 두고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꾼 과수원(?)의 모습을 돌아보거나
비가 내리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로 밝았던 날을, 괜스레 흑백으로 찍어 원하는 분위기로 바꾸면서 자기만족(?)을 느끼게도 해주며
막 떨어진 해가 남긴 여운을 고요한 장면으로 품을 수도 있습니다.
제법 오랫동안 이 녀석을 카메라로 애용했습니다만
역시 폰카(폰은 아니지만)는 폰카더군요. 아무리 열심히 찍어도 직접 조작하고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될 뿐더러, 해상도나 심도 표현은 카메라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결국 처음으로 "사진을 멋지게 찍어보겠어!" 하고 마음을 먹은 지 1년 만인 작년 겨울,
이 녀석을 샀습니다.
소니 알파 a6000.
첫 카메라인 만큼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경험이 있었고, 또 (아직까지는) 가장 많은 사진을 남긴 카메라입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어떤 이유로 카메라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후지필름 X100T입니다.
지금 사용중인 카메라이고, (역시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a6000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사진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해 준 카메라입니다.
이 카메라들을 손에 잡게 된 이후로, 고등학교 생활도 전에 비하면 훨씬 즐거워졌습니다.
관찰력이 느껴질 정도로 향상된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사물의 색감, 빛의 흐름, 밝음, 어두움 등을 의식적으로/무의식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의 모습에서 가장 즐겁고 특별한 순간을 느끼게 되었고, 또 사진을 찍는 동안의 모든 순간을 훨씬 더 의미있게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따금 듣는 말입니다.
결국 사진으로 보는 건 눈으로 보느니 못하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대로 담아내든,
필요한 조작을 가해 연출된 장면으로 담아내든,
실수로 무언가 잘못된 사진을 찍든,
사진은 내가 찍음으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부와 글쓰기가 필기구를 사용해 종이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면, 사진은 렌즈와 카메라를 사용해 빛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에 자신의 정서와 주장을 문체, 구성, 서술방식을 통해 반영하듯 사진 또한 대비, 심도, 색감 등으로 이것을 보여주는것이죠.
사진은 너무나 독특한 창작물이고, 사진을 찍는 것은 가장 서정적인 창작활동입니다.
저는 그래서 사진이 좋습니다.
항상 셔츠의 앞 주머니에 꽂혀있거나 손에 들려 있던 Signo 볼펜을 교과서 사이에 끼워두고,
카메라를 잡고 뷰 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대는 순간.
수 겹의 렌즈 너머의 빛이 인사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