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혜경 Feb 04. 2024

그거면 돼요

<목화맨션>의 울림 

 

 툭 마음을 건드리곤 쉽게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교훈을 주는 말들도 잊히지 않지만, 고단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서 우러난 말은 심금을 울린다. 

 

 김혜진의 [목화맨션]이란 소설에서 만난 말도 그랬다.

 

 “밥 잘 챙겨 드시라고요. 그거면 돼요.”

 

 철학적이거나 심오한 뜻이 담긴 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쓰고 듣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공장에서 일하고 오래 병원신세를 지기도 한, 마흔다섯 여자의 말이다.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시간을 지나온 이의 희로애락이 응축된 말 같아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그거면 돼요”는 “그거면 충분하다”,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란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거면 충분할까? 애타도록 원했지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닐까? 밑바닥이라고 여겨질 때마다 이 말을 되뇌며 힘을 내고 삶의 고비고비를 건너온 이의 안간힘 아닐까? 

 

 이 소설은 (<축복을 비는 마음>에 수록되어 있다.)

 지은 지 삼십 년이 넘은, 열 평이 안 되는 집의 주인과 세입자인 만옥과 순미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사 왔을 때 순미는 마흔다섯이었고 만옥과 속사정을 나누게 되면서 만옥을 ‘언니’라 부른다.

곧 임대차계약서에 따르면 갑을 관계인 둘이 계약 이상의 관계로 지내다가 엄혹한 현실 때문에 더 이어가지 못하는 과정을 작가는 찬찬히 보여준다.


먼저 도움을 주는 이는 만옥이다. 

이삿날 만옥은 집주인으로서 몇 가지 당부만 하고 돌아설 생각이었으나, 혼자인 순미의 처지에 마음이 쓰여 짐 정리를 도와준다. 그 보답으로 순미는 냉면을 사고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한다. 냉면 한 그릇을 먹으며 왜 이토록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지 의아했으나, 만옥은 이유를 묻지 않고 들어준다. 


순미도 그 배려를 느꼈으리라. 

그것은 둘 다 국물까지 모두 비울 정도로 맛있게 냉면을 먹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냉면을 좋아하지 않는 만옥에게도 달았고, 냉면 전문점도 아닌 가게인데 순미도 맛있게 먹은 “희한”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후 깨진 변기를 수리해 달라고 전화했다가 순미는 만옥의 형편을 알게 된다. 

재개발이 된다길래 덜컥 빚내서 산 터라 여유가 없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쓰러져 병원비 대기도 힘들다는 하소연을 듣고 순미는 직접 쑨 묵을 가지고 병원에 찾아온다.


식욕을 느끼지 못했고 몇 조각만 집어먹을 작정이었지만 만옥은 앉은자리에서 묵 한 모를 해치운다. 

그동안 병원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과 불안한 예감으로 두려웠던 만옥의 심정을 순미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거면 돼요.”란 위로를 전한다. 


 “입맛 없어도 밥은 꼭 챙겨 드세요. 밥 잘 챙겨 드시라고요. 그거면 돼요.” 


이 당부가 만옥에게 큰 울림을 줬음은 얼마 후 자신도 모르게 이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편측마비 진단을 받은 남편을 부축하며 그녀는 큰소리로 말한다.


 “밥 잘 먹으면 그걸로 된 거야. 걱정할 거 없어.” 


그것이 순미가 했던 말이라는 사실, 단순해서 싱겁게까지 여겨지는 이 말이 일렁이는 자신의 마음을 단번에 진정시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서로 사정을 봐주며 8년 가까이 이어가던 이들의 관계는 만옥이 집을 팔면서 끝난다. 


남편의 상태가 나빠지고 담보대출 이자가 가파르게 상승해서 적금을 깨고 살고 있는 집의 전세를 월세로 전환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존의 세입자를 내보내는 조건으로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만옥은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순미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가 쉽지 않다. 

행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할 때 흔히 그렇듯 만옥도 자신을 속이고 합리화한다. 

그 집에서 순미가 8년 가까이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배려와 노력 덕분이라고,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그리고 순미의 형편이 좋아졌다고 믿어서 팔 결심을 했다고.


순미는 처음엔 만옥을 설득했다가, 계약기간까지 살겠다고 했다가, 따지기도 하지만, 결국 떠나게 된다. 

만옥을 원망할 법한데, 이삿날 보증금을 돌려주기 위해 들린 만옥에게 순미는 “언니, 점심은 먹었어?” 묻고 근처 국숫집에 함께 간다. 

이삿짐 트럭을 타고 떠나기 전, 순미의 마지막 인사는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언니나 잘 살아. 밥 잘 챙겨 먹고.”이다.


이 인사를 건네기까지 순미의 내면은 분노와 억울함, 불안들이 뒤엉킨 실타래 같았을 텐데, 늘 그래왔듯이 “이만큼 사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뭐든 나쁠 게 없다”란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했을 것이다.

  

선한 마음이 현실에 내몰려 위선으로 덮이는 것이 씁쓸하면서도, 위로를 전하는 말이 있어 따뜻해졌다. 

나 역시 힘에 부치면 “이만하면 됐다”, “밥 잘 먹고 있으니 그거면 돼.”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곤 하니까. 


몇 달 전 뇌의 작은 종양을 감마나이프 시술로 제거한 후 부쩍 입맛을 잃은 엄마에게 죽을 권하며 “죽이라도 잘 드시면 돼요. 그거면 돼요.” 하다가 순미의 말임을 퍼뜩 깨달았다. 




엄마가 아직 내 곁에 계셨을 때 쓴 글이다.

지금은 비록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시리라 믿는다. 


"이제 아픈 데 없이 편안하시죠? 그거면 돼요."   






매거진의 이전글 길 위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