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료를 중심으로
항상 발해사를 이야기할 떄, 발해사 자체가 한국사이다, 중국사이다, 공통사이다라는 문제는 있어 왔습니다.
그 이유 중 제일 큰 것은, 역시 창건자인 대조영의 출신성분이 불분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성분을,
1.순수 고구려인
2.고구려계 말갈인
3.순수 말갈인
4.말갈계 고구려인
넷 중 하나로 보아 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1번과 4번이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조영의 출자가 복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히 고구려의 구장(舊將)으로서 발해를 세운 건국자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대조영을 둘러싼 헷갈리는 기록들과, 대조영이 하필이면 말갈인들과 많이 얽히는 것도 있으며,
당에서 발해를 고의로 말갈로 불렀던 것들이 합쳐져 이렇게 되었다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조영 본인을 언급하는 사료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1.당나라 시절에 쓴 기록을 근간으로 하는 사료들은 대조영을 말갈로 호칭하지만,
그 외의 시대에 쓴 사료는 대조영과 발해를 말갈 출신이 아닌 방향으로 소개한 사료들이 존재한다.
대조영의 출자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료들 몇 개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구당서』 본기 현종 항목 中
-현종 개원 7년(719) 3월 정유일, 발해말갈 군왕 대조영이 죽고 그 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이었다.
『신당서』 144권 열전, 북적 발해 中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책부원구』 956권 종족 中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위와 동일, 967권 계습 2 中
-발해말갈 : 당 성력연간에 고려별종 대조영이 자립하여 진국왕이 되었다.
『신오대사』 74권 사이부록 中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들은)고구려의 별종이다.
『책부원구』 964권 봉책 中
-현종 선천 2년(713), 2월에 말갈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삼았다.
『오대회요』 30권 中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했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문헌통고』 326권, 사예고 3권, 발해 항목 中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들이다. 성은 대씨이다.
『금사』 세기편 中
-속말말갈은 처음 고구려에 부속하였으며 성은 대씨이다.
『옥해』 153권, 조공류 항목 하부의 외이내조 항목 中
-당나라 때 발해가 왕자를 보내 입시하였다. 전(傳)에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라고 했는데, 대조영 떄에 진국왕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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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210권 당기 26. 현종 개원원년 中
-처음에 고려가 이미 멸망하자, 그 별종인 대조영이 영주에 옮겨가 살았다..(후략)
『책부원구』 959권 토풍 1 中
-진국은 본래 고려이다.(후략)
『신오대사』 74권 사이부록 中
-무측천 때 거란이 북쪽 변경을 공격하자 고구려 별종인 걸걸중상과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서
고구려의 옛터에서 각각 왕이 되었다.
『책부원구』 1000권 구원 中
-발해국왕 대무예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그 아버지 대조영은 동쪽으로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진국왕으로 자립했다.
『무경총요』 전집 16권 하 中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예맥의 땅이며.....(후략)
『자치통감』 210권 中
-당현종 개원원년(713) 2월 초, 고구려가 망한 뒤 그 별종인 대조영이 영주에 옮겨가 살았다.
『문헌통고』 327권, 사예고 4권 정안국 항목 中(송사 491권 외국전 정안국항목도 완전 동일)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족으로, 거란에 격파되었다. 그 추장이 나머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경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자칭 정안국이라 했다.
『송사』 491권 中, 외국전 발해국 항목
-발해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사람들을 중국에 옮겨살게 했다.
『영락대전』 본 『송회요』 293권 中
-발해는 고구려의 별종이다.
보시다시피, 중국이 기록한 발해의 사료들 중 몇 개를 끄집어 내 와서 나열해 보았습니다.
제가 나열한 이 사료들은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눈썰미가 빠르신 분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줄로 쳐 놓은 부분의 위에 있는 사료들은, 발해, 그 창건자인 대조영을 말갈로 규정하고 있는 사료이며,
줄의 아래부분은 대조영과 발해를 고구려계로 규정하고 있는 사료입니다.
이 사료들을 여기 언급된 부류들로만 다시 한번 분류해 보겠습니다.
대조영/발해를 말갈로 규정하고 있는 사료
-구당서
-신당서
-책부원구
-신 오대사
-오대회요
-문헌통고
-옥해
-금사
대조영/발해를 고구려로 규정하고 있는 사료
-자치통감
-책부원구
-무경총요
-문헌통고
-송사
-송회요
볼드체로 표기한 사료들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담고 있는 사료들입니다.
우선 이 사료들을 보면, 제가 전에도 언급했듯이, 당나라 시대에 직접 쓴 사료이거나, 혹은 당나라 시대의
자료를 참조하여 쓴 사료들은 예외없이 발해를 말갈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 멸망 이후에 후대에 사료검토를 하여 쓰여진 사료들은 전부 발해를 고구려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위쪽 그룹에 분류되어 있는 '금사'는 여진족의 금나라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여진족이 자신들을 발해와 동족이라고 날조하는 과정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되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인식은 훗날에 여진족이 세운 또 다른 왕조인 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분류함으로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발해의 전조인 고구려에게 하도 당해서 '고구려 PTSD'가 있는 당은, 그 후계인 발해를 인정하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발해를 말갈로 호칭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제가 위에 분류해 놓은 사료들 중, 위쪽에 분류한, 발해를 말갈로 규정한 사료들은,
전부가 당나라 시기에 쓰여졌거나, 당나라 시기의 자료를 가지고 쓴 사료에 속합니다.
아래쪽에 분류한 사료들은 당 시기 이후에 쓴 사료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거나, 당 이후에 중국에서 본 발해를 썼거나,당나라 이후 시대에 당나라 시기 자료와 이후 자료를 규합해서 검토 후 쓴 사료입니다.
이 두 사료분류의 차이는, 당 시기에 쓰인 기록을 바탕으로 썼느냐? 입니다.
제가 위에 링크한 글에서 밝혔듯이, 당은 고구려 PTSD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후신인 발해를 꽤 오랜 기간동안 일부러 말갈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당의 자료들을 가지고 쓴 책들 역시 당의 그러한 의도들을 본의아니게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 멸망 이후 시간이 흐른 다음에 쓴 아래 그룹의 사료들은, 더 이상 고구려라는 존재에 중국이 PTSD를 겪을 이유도 없거니와(이미 고려국이 중국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인들의 한국계 국가에 대한 시선이 바뀌면서 고구려에 대한 증오를 품을 이유가 사라진 상황이라 당의 그러한 시선이 사라진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또한, 중국의 사료들을 찾아 볼 때, 대조영과 발해를 중국측에서 말갈이라고 우기고 있는 사료가 존재하지만,
그 내용이 거의가 당 시대에 쓴 사료이거나 당 시대에 쓴 자료를 활용하여 다시 쓴 사료들에만 존재한다는 것은, 대조영과 발해가 진짜로 말갈출신, 말갈의 국가가 아니라, 중국이 일방적으로 우긴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바이며,
당 시대 이후에 썼거나, 당 시대 이후에 자료를 수집하여 쓴 사료들에는 대조영과 발해가 말갈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분류한 사료들 중 양쪽에 모두 들어가는 책부원구와 문헌통고는 당 시절의 사료와 그 이후의 시선이 모두 함께 들어간 사료입니다.
이 두 사료를 보면, 분명히 똑같은 사료인데 어느 부분에서는 대조영과 발해가 말갈로, 어느 부분에서는 고구려라고 나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측은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발해를 말갈으로 칭했다는 겁니다.
이후, 중국이 안사의 난 이후, 안사의 난 때 안록산에게 지원요청을 받았음에도 수교국인 당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물론 당과 전면전을 피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안록산의 지원요청을 거부한 발해를 762년에 드디어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이 때를 기점으로 당에서 발해를 말갈이라 부르는 횟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9세기 초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집니다.
따라서, 당이 발해와 그 창립자인 대조영을 말갈로 부른 것은, 사료에서 보듯이 전혀 일관성이 없었으며,
당나라의 과거 고구려 PTSD와, 자신들이 정말 힘들게 무너뜨린 고구려가 고작 30년만에 간판만 바꾸어서 부활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당의 자존심 챙기기 + '꼬장' 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발해를 인정한 762년 이후에는 발해에게 '꼬장'을 부릴 이유 역시 사라졌기에 이러한 말갈 운운이 서서히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발해를 인정하기 싫었던 시절 발해를 말갈로 비하하여 써 놓은 기록들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에, 이후 당 초기~중기의 기록을 가지고 반영하여 쓴 사료들에는 그대로 대조영과 발해가 말갈로 기록되었으며, 이것 때문에 훗날에도 많은 인식의 오해가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는, 위에 서술했듯이, 송 시대 이후에 쓴 사료에는 발해를 말갈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조영이 말갈인이라는 근거로 그가 속말말갈에 속한다고 언급한 중국의 사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많은 반론이 존재합니다. 대조영 본인이 속말말갈에 속하는게 아니라, 대조영이
고구려인 출신으로 속말수(송화강) 유역에 살면서 근처의 말갈들을 감독,동원하는 무관직을 지냈다는 뜻이라는 해석 역시 존재합니다.
현재도 한국에서의 많은 고구려-발해쪽을 연구하는 교수님들과 연구원님들은 이러한 시선 역시 고려하여 거의가 대조영을 말갈인이 아닌 고구려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이 글은 교수님, 연구원님들의 의견동향을 이야기한 글이 아니고, 저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는 글이기 때문에,
그 분들의 의견은 소개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추후에 정리를 해 볼 생각입니다.
2.발해는 말갈을 강제로 병탄하고 압제한 나라이며, 발해는 말갈들을 서술할 때 사서에서 그들과 묶여서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발해는 말갈이 될 수 없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말갈인이라는 뜻을 어필하고 있는 중국은, '발해말갈'이 발해를 세웠으며, 발해는 말갈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제가 제목에 써 놓은 말과 아귀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말갈일지라도 필요에 의해 탄압하고 병탄할 수도 있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생각은, 사서의 서술방향과 '압말갈사'의 존재로 인해 깨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고』, 『만주원류고』 말갈 항목 中
-초기에 흑수 서북쪽에는 사모부가 있었고, 그 북으로 10일 정도 거리에 군리부가 있었다. 동북으로 10일 거리에 굴설부가 있었고 약간 동남쪽으로 10일 거리에 막예개부가 있으며 또 불열, 우루, 월희, 철리 등의 부가 있다. 그 남쪽으로 발해가 있고 북동쪽으로는 바다가 있으며 서쪽에는 실위가 있다. 남북으로 2천리, 동서로 천리이다. 후에 발해가 강성해져 이들을 모두 정복하여 복속시켰다.
『원사』 지리지 中
-개원로는 옛 숙신의 땅이다. 수,당때는 흑수말갈로 불렀다. 그 뒤 발해가 강성하여 이를 복속하였다. 발해는 거란에게 망하여 흑수부가 다시 그 땅을 차지하였다.
-발해가 강성한 시기에 월희의 옛 땅을 침범하여 병합하고, 회원과 안원 2부를 설치한 후, 달과 월 등 13주를 관할하였다. 철리의 옛땅에는 철리부를 두어 광과 분 등의 부와 6주를 관할하였다. 요사 지리지에 실린 신흥현은 본래 월희국 땅이다.
그 외에도, 사서에서 발해는 항상 말갈과 따로 구분되어 등장합니다.
흔히 말하는 말갈제부(불열,흑수,월희,철리,사모,굴설 등등)들은 모두 '말갈'이라는 이름 하에 주로 묶입니다.
하지만 사서에서 발해는 항상 그들과 분리되어 '발해'라는 이름으로만 나오며 말갈이라는 이름하에 발해가 지칭되는 적은 없습니다. 구당서에서나 북적열전에 들어가지, 신당서에서는 아예 발해전으로 따로 등장하며, 그 외 사서에서도 말갈을 포함한 북방 오랑캐들을 표현하는 항목에 들어가 있지 않으며 독립적인 공간을 빌어서 서술됩니다.
일본의 사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속일본기』 16권 中
-18년(746년) 이 해 발해와 철리사람 총 1100명이 교화를 사모하여 와서 조공했다.
『속일본기』 35권 中, 11월 을해일에 검교발해인사에게 내린 칙령 中
-병자일에 검교발해인사가 말하기를 철리국의 관인이 고설창(발해사신) 윗자리에 앉기를 다투고 업신여기고 있으니,
태정관이 처분해 주십시오.
이 사료들은 말갈에 속했던 철리말갈과 발해를 아예 다르게 구분하고 있는 사료입니다.
중/일의 사서에서는 말갈들을 한 곳에 묶어서, 그들의 이름과 영역, 역사가 조금씩 다를지라도 같이 서술합니다. 하지만 발해는 이렇게 말갈에 해당하는 철리와 구분이 되어 등장하는 사례가 존재합니다.
『금사』 열전 호사보 中
-호사보가 발해군을 만났는데 발해군이 그를 비웃고 말하되, 여진이 난을 일으켰다는데, 너희 무리가 이렇게 간사하구나. 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나오듯이 후대의 금 시대의 사료 중에서도, 흥기한 아골타 휘하의 여진군을 막으러 출병한 요나라의 발해군이 여진인을 간사하다고 비웃는 항목이 존재합니다. 발해가 말갈에서 비롯되었다면,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말갈-여진과 구분하고, 그들을 비웃을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발해 역시 말갈에 해당한다면 사서에서 발해가 말갈들을 지배,통제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관직인
'압말갈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회요』 제 96권 발해 항목 中
-정원 8년(792) 윤 12월, 발해의 압말갈사 양길복 등 35인이 와서 조공하였다.
이와 같이 발해는 타국들도 말갈과 완벽하게 구분을 하였으며, 말갈을 압제,감독하기도 한 나라였기 때문에
말갈의 범주에 속하기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3.영주에 있을 당시, 고구려인 그룹과 말갈인 그룹이 따로 구분되고 있었는데, 대조영이 말갈인이었다면
고구려 그룹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사서에 보면, 분명히 영주에 있는 두 집단인 고구려인 집단과 말갈인 집단이 있고, 고구려인 집단의 리더는
걸걸중상이며 말갈인 집단의 리더는 걸사비우입니다.
엄연히 고구려와 말갈집단이 나누어져 있는데, 고구려 집단에 속해 있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말갈인일 리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갈인이었으면 말갈 집단에 속해 있을 터입니다. 그리고 걸걸중상은 고구려 집단의
리더였으며, 그 아들 대조영 역시 걸걸중상의 뒤를 이어 고구려인 집단의 리더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말갈인이거나 말갈의 정체성을 가진 이라면 고구려인 집단의 리더가
될 수 없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말갈인이거나 말갈 정체성을 지녔다면 말갈 집단에 속해있지 않았을까요?
4.육정산 고분군의 무덤들에서 말갈의 묘제가 보이는 묘 중 상층권(상급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해 초창기 시기의 묘역으로 여겨지고 있는 육정산 고분군에는 수많은 묘지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대조영을 따라 탈출하여 고토로 돌아와 발해를 세운 이들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수백기의 무덤 구분은 부장품의 급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하며, 그 구분 기준은 묘에 함께 묻혀있는 부장품의 정도와 급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 중 말갈의 묘제를 따르는 묘지들은 전부가 예외없이 하~높아야 일부가 중 등급 판정을 받았으며. 고구려 묘제의 묘지들은 상에서 하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나라를 세웠으니 당연히 지도층일 것으로 보이는 대조영이 말갈인이었다면, 말갈인 중에서도 상층이 많이 나왔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말갈인 묘제들이 하층만 거의 절대다수가 나오는 이유는, 영주 탈출 이후 요동에서 이해고와의 추격전을 벌일 때 걸사비우의 말갈집단이 걸사비우 본인조차 전사했을 정도로 지휘층이 완전히 궤멸되어 버렸으며, 생존자들은 잔존 졸병과 하급장교 위주로 남아서, 일면식이 있던 대조영의 고구려 집단으로 달아나서 의탁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5.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칭한 사료는 많지만 스스로 말갈이라 칭한 사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립자인 대조영이 말갈의 정체성을 가진 말갈인이었다면, 당연히 그 주변인들도 말갈인이 많았을 테고,
발해 역시 말갈이라 칭하며 말갈의 정체성을 어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료에서 발해가 스스로를 말갈이라 부르는 사료는 일절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구려를 이었다, 고구려의 후계이다. 라고 일컫는 사료들은 한가득인 것을 생각해 보면, 발해를 세운
대조영과 그 창립자 집단이 말갈인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발해국과, 발해국을 세운 대조영은 말갈 출신이 아니며, 발해는 말갈이 주도한 국가라고 볼 수 없다.
라는 저의 주장을 간단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