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발해를 말갈이라고 부른 이유

중국사료 검토를 통하여

by 동방지희

오늘은 꽤 심도있는 주제에 대해 논할 생각입니다.


그 주제는,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고 머리아프게 하는 주제로서,

중국사,한국사에서 유독 당나라만이 발해를 말갈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이에 대한 의문과,

그 이유를 연구하여 정리해 보는 글입니다.




정말 간단하게 이 문제의 답을 말씀드리자면, 당이 발해를 말갈로 부른 이유는,




'고(구)려 PTSD'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추측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구)려 PTSD' 때문에 당은 자국 내의 기록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을 모두 우회적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방식을 택할 정도로 고려라는 단어를 싫어했으며, 의도적으로 고려라는 단어를 회피하여

다른 단어로 치환하거나 돌려서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기들이 오해와 곡해를 낳아서 현재 한/중의 역사학계에 많은 나비효과를 낳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 문제는 단순해 보이는 문제이지만, 의외로 현대의 한중간의 역사 귀속논쟁과 표기 문제까지 야기하였으며, 좁게는 단순히 고려라는 국호에서 넓게는 동북공정까지 얽힌 문제로서, 상당히 심도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참고로 이 글은, 발해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발해의 국호가 왜 발해인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해당 내용은 추후에 다른 글로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살펴보면, 당은 고구려와 싸울 때 워낙 많은 피해를 입어서 그런지, 이후에도 고구려를 언급하거나

고구려를 떠올리는 무언가를 나타내는 것을 마치 금기처럼 여겼습니다. 그러한 금기는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의 유민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의 금석문에서조차 이들의 출신에 '고려'를 넣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중국땅에서 무덤이 발견된 고구려 유민으로 밝혀진 인물들 중, 사서와 묘지명의 상호비교를 통해 고구려 유민임이 확실한 14명의 인물(고진, 고씨부인, 천남생, 천헌성, 천남산, 천비, 고질, 고자, 고족유, 이타인, 고제석, 고현, 고흠덕, 고원망) 중 고구려를 국적 or 출신으로 쓴 이는 거의 없으며, 딱 한명. 천헌성의 묘지명에 천헌성 자신도 아닌, 그의 선조를 '고구려국인'이라고 썼을 뿐입니다.



나머지 13인의 인물들 중, 고제석, 이타인, 천남생, 고족유 이 네명의 인물은 각각 출신이 국내성인, 책주(책성부)인, 평양성인, 평양인.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현은 출신을 '출신을 '삼한(三韓)인'으로 표현해 놓았으며, 고자, 고질, 천남산 세명은 셋 다 '조선인'으로 되어 있으며, 고원망의 경우에는 황당하게도 선조가 고구려도 요동도 아닌 은(殷)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고흠덕, 고씨부인, 고진은 '발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들은 물론 고구려계 사람들은 맞지만, 평생을 중국에서 살았으며, 발해에는 가보지조차 못한 사람들이니 여기서 말하는 발해는 당시 존재하고 있던 발해국이 아니라, '발해군'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해 보입니다. 그 외에 천비의 경우에는 '경조군(京兆郡)'으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 외, 우리와 중국 학자들이 추가적으로 고구려 유민으로 인정하는 7명(고요묘,고목로,고덕,고요,이인덕,왕경요,고모)은 각각 출신이 고요묘가 요동, 고목로,고덕,고요가 발해군, 이인덕이 낙랑군, 왕경요가 태원군, 고모가 안동(정황상 안동도호부)입니다.



분명히 지금 언급한 21명은 모두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계인데 왜, 고구려라고 자신의 출신을 명시하지 못했을까요. 고구려인/고구려계이면서 자신의 출신을 고구려로 직접 표기한 예는 21건 중에 단 한 건 뿐입니다.

고구려의 지명이나 삼한, 조선 등을 지칭한 경우는 8건이고, 그 외 중국 명이나 군현명으로 한 경우는 12건입니다.



여기에, 고구려의 지병이나 삼한으로 표기를 했다가 후에 당의 군현명으로 출신지는 바꿔 쓴 이타인(옹주 만년현), 고현(경조), 고족유(낙주 영창현)같은 경우를 포함하면 그 비중이 더욱 늘어납니다.

물론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의 군현명을 자신의 본적으로 표기하거나, 중국에 와서 바뀐 본적으로 묘지명에 표기한 것은, 당연히 고구려 유민의 정체성 약화와 관계가 깊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또 다른 문제도 존재합니다.




비슷한 사례인 백제의 예를 들면, 현재까지 확인된 11인의 백제유민 본적을 분적하면, 백제의 국명이 등장하는 것이 3건(예식진, 부여융, 흑치상지)이며, '부여'라고 쓴 본적도 등장합니다.(난원경 묘지명) 백제가 한때 쓴 국호가 남부여였음을 생각하고, 백제의 왕성이 부여씨인 것을 생각하면 21건중에 겨우 1건인 고구려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 뿐이 아니라, 백제라는 국명이 없는 사례에도, 웅진이라고 표기한 예가 존재합니다. 예군 모지명에 나오는 예군의 본적이 웅진 우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전법자의 묘지명에는 웅진 서부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웅진이 백제의 옛 수도이기도 하며 웅진도독부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백제의 별칭이라 이해할 만 합니다.




이들이 같은 시절을 살았는데, 고구려인만 정체성이 빠르게 사라지고, 백제만 오래 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존재합니다.




당에서 출사한 다른 이민족들의 본적표기를 살펴보면, 매우 다양합니다. 강거, 강국, 소륵, 페르시아, 박트리아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을 그대로 표기하였습니다. 고창국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그것이 보입니다.



하지만 다시 돌궐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돌궐 같은 북방 유목민들의 출신. 혹은 본적을 표기할 떄에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명칭인 돌궐이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돌권 대신 음산(陰山), 혹은 막북(漠北)처럼 막연하게 서 놓은 지명을 표기하거나, 계민가한의 손자처럼 '누구네 후손'이다. 이런 식으로 밝히는 데 그쳤습니다. 고구려도 그렇고 돌궐도 그렇고, 본래의 출신지를 은폐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고구려계와 돌궐계의 공통점은, 2~3세대 이후에는 본국이 아니라 자신이 현재 거주하는 군현명을 본적으로 삼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당에서 출사한 돌궐계 아사나충(阿史那忠)은 본래 대인(代人)이었으나, 현재의 본적은 경조 만년현이며, 그 증조부와 조부가 본국의 카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대인'이라는 것은, 북위를 세운 탁발부와 그 부역 이민족을 얘기하는 용어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아사나충의 선조가 탁발부 소속으로 확약했다가 서위-북주에 합류하고 이후 장안의 경조 만년현을 본적으로 둔 관롱집단에 속한다고 잘못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씨인 '아사나'는 돌궐의 군주 혈통이며, 그 증조와 조부가 본국의 가한이었다는 기록은 그의 집안이 돌궐 출신이었음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단서입니다. 본적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바꿔치기 한데서 돌궐 역시 고구려 유민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묘지명의 내용은 그 본인, 혹은 유족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국명의 표기 여부는 당 조정의 이민족 정책과 별반 관련이 없고, 그들의 자발적인 의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육전』의 비서성-저작국조 항복에는 저작국의 저작랑이 비지와 축문, 제문을 편찬한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당육전 제 10권 中)




이 기록에 따르면, 당 비서성의 저작국이 묘지명 작성을 맡은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 참여하는 이들은, 전기에는 사관, 후기에는 한림학사가 주로 꼽힙니다. 물론 케이스마다 ,집안마다 다르긴 했습니다. 그 집안에서 묘주의 친인척이나 문인이 그것을 분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당대묘지휘편 中)



하지만, 당대 이민족의 묘지명들의 찬자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한인 관료들이 찬자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천남생의 묘지명에는 중서시랑 왕덕진과 사훈낭중 구양통이,(당대묘지휘편 中) 천헌성의 묘지명에는 선부원외랑 양유충, 천비의 묘지명은 광록대부 위위경 상주국 변국공 천은이, 고질의 묘지명은 조산대부 행봉각사인 위승경, 고진의 묘지명은 헌서대제 양경이 찬자였습니다. 한인 관원들이 꽤 높은 확률로 묘지명 찬자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친인척이 찬자인 예도 존재하며, 사자 혹은 유가족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경우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당의 관리가 묘지명의 찬자일 경우, 유가족 입장보다는 당 조정의 원칙과 관행을 따랐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들이, 당의 입장에서 좋지 않은 상대였으며 껄끄러운 관계였던 고구려와 돌궐 출신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여 정체성 희석을 시도한 한편, 원한이 별로 없거나 좋은 관계였던 백제나 중앙아시아 출신들에게는 정체성을 인정하도록 허용했던 경향이 여기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발해 국호 연구 - 당조가 인정한 발해의 고구려 계승 묵인과 부인, 제 2장)






제가 이 묘지명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고 일부러 부른 이유 역시 이것과, 당과 고구려의 악연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은 고구려가 아직 존속하고 있을 때에도, 고구려를 당시의 국호인 고려로 부르기보다는, 요동, 요좌, 요해, 요갈, 삼한, 조선, 예맥, 진한 등의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게다가 1차 고당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고구려를 말살할 의도로 당시 편찬 중이던 『진서』에서

고구려의 열전을 없애버렸다는 의견은 지금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 의견을 뒷받침이라도 해 주는 듯이, 당태종은 648년에 신라의 김춘추,김법민 부자에게 진서를 하사하였는데, 이 진서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열전이 없었습니다.


(구당서 199권 상, 동이-신라전 中)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열전이 없는 진서를 하사한 것은, 당이 신라와 힘을 합쳐 그 두 나라를 없애버릴 것이라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도 하는 견해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당대 기록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을 없애버린 것은, 당대 중국인의 고구려에 대한 증오와 PTSD 현상이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발해의 경우를 이제 언급해 보자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고 고구려를 겨우 없애버린 당이었는데, 문제는, 겨우겨우 없앤 고구려가 불과 30년만에

간판만 바꾸어서 부활한 것입니다. 고구려가 간판만 바꿔서 부활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당은 발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발해를 의도적으로 나라취급 하지 않던지, 혹은 무시하면서 말갈로 묶어서 언급한 서술이 많은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동이열전에 포함되었지만, 발해는 북적전에 놓은 것에서 의도가 드러나며,

이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연속성이라는 관계를 끊으려는 의도임이 확실합니다. 또찬 당 시대의 자료를 사용하여 쓴 신당서의 발해전에서도, 발해의 영역을 고구려의 영역과 그 밖 영역으로 서술한게 아니라, 아예 부여고지, 옥저고지, 고려고지 등으로 나누어 고구려의 이미지를 최대한 떠올리지 않도록 서술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혐오, 혹은 증오감 때문에 고구려라는 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함과 동시에, 중국인들이

고구려라는 존재를 떠올리기 싫어했으며, 발해라는 나라가 고구려와 이어지는 관계라는 사실을 더욱 더 인정하기 싫어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추정됩니다.




그래서 대조영이 세운 국가를 발해라고 불러 고구려라는 단어를 피할 수 있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 국가가 고구려 그 자체, 고구려의 후예임을 스스로 부정하기 위하여, 고구려와의 연결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말갈, 발해말갈이라고 부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으로 인해 발해를 집단으로 인정은 하되 고구려와 발해의 연속성은 인정하지 않고, 발해를 당 스스로 정식 국가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갈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저는 발해의 초창기와 성장시기에 당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발해를 말갈로 뭉뚱그려서 불렀으며, 이는 발해의 건국 시기부터 당과 정식 수교를 하고 당에게 인정받는 발해의 초중반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사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이 고의던 아니던 발해를 진짜로 말갈로 불렀기 때문에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이나,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시는 분들은 사료에 대한 이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 발해를 말갈이 세웠다. 말갈의 나라였다. 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까지 합니다.


이 문제는 어찌 보면 발해의 역사귀속과도 연결이 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아래부터는, 당이 발해를 불렀던 호칭과 패턴을 정리하면서, 당이 발해를 사서에서 말갈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왜 발해가 말갈이 아닌지를 사료들을 가지고 와서 제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구당서를 간단하게 몇 항목 살펴보겠습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사실 이 사료는 잘 모르시는 분들께서 봐라. 구당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발해는 말갈이라고 쓰여있다.

라고 들이미는 용도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의미를 곱씹어보면, 제가 위에서 얘기한대로, 대조영이 세운 발해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즉 고구려의 후계로 인식은 하고 있지만 인정은 하지 않고 말갈로 부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이 사료는 발해가 말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신당서의 구절과 함께 제일 많이 가져오는 사료이긴 하지만, 동시에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 출신은 맞지만 고구려의 기존 주류, 핵심세력은 아니라는 뜻으로 쓴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고, 자못 문자가 있고 전적이 있다.


-예종 선천 2년(713), 낭장 최흔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으로 삼고, 아울러 통할하는 지역을 홀한주라 했으며 홀한주도독을 더해 제수하였다.



※풍속이 말갈이 아닌 고구려와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란과 같다는 것은 오기이거나, 혹은 의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거란은 풍습이 전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사료에서는 713년에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 이후 당과 통교를 하면서 당이 하나의 독자세력으로 인지는 하였다.정도의 의의가 있는 사료입니다. 아직 이 시기에 당은 발해를 제대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준 작위가 '국왕'이 아니라 '군왕'인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이 발해를 온전히 독립국가로서 인정하고 발해왕을 국왕으로 진봉시킨 때는, 이후 거의 50년이 지난 762년입니다.




그리고 구당서의 기록에 발해를 말갈로 칭하는 표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당서』 본기 현종 항목 中


-현종 개원 7년(719) 3월 정유일, 발해말갈 군왕 대조영이 죽고 그 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이었다.

-14년(726) 11월 신축일, 발해말갈이 그 왕의 아들 대의신을 보내고 아울러 특산품을 바쳤다.

-20년(732) 9월 을사일, 발해말갈이 등주를 침범하여 자사 위준을 죽이자 좌령군장군 개복순에게 군사를 징발해 치게 했다.

-26년(738)에 발해말갈 왕 대무예가 죽고 그 아들 대흠무가 왕위를 잇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그를 책립하였다.



『구당서』 신라전 中


-개원 21년(733)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다.


『구당서』 열전 199권 상, 동이 백제 中


-그 땅은 이 때무터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 가지고,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어졌다.





그리고 구당서에서 발해를 발해말갈로 불러오던 표현은, 당 대종 때인 767년을 기점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구당서』 본기 대종 항목 中


-대종 대력 2년(767) 5월 병술일, 발해가 조공했다.

-대력 7년(772) 가을 수확 무렵, 회흘, 토번, 대식, 발해, 실위, 말갈, 거란, 해, 장가, 강국, 석국이 아울러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67년의 이 사료 이후부터는 구당서에서도 발해말갈이 아닌 발해로 불리우게 됩니다.

그런데, 구당서에서도 사실, 발해는 말갈이다. 라고 하고 주장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발해를 말갈으로 취급은 하는데, 정작 구당,신당서에서는 말갈을 아예 발해와 분리해서 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구당서에서는 발해말갈, 신당서에서는 발해.)


말갈은 구당서 149권의 열전 하의 북적열전에서 다루며, 발해는 같은 149권의 '발해말갈'부분으로 따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 '발해말갈전'에서조차 발해를 말갈로 칭하는 것은 방금 언급한 7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사라집니다.




진짜로 발해가 말갈의 한 일파 중 하나였으면, 구당서 북적 말갈 항목에서 다른 말갈종족이 모두 언급되는 상황에서 그들과 같이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해말갈이라고 불러 말갈 취급을 하기는 했지만 흑수를 위시한 나머지 '진짜 말갈'들과 아예 따로 구분을 해서 기록을 했다는 것은 당이 발해를 국가로서 인식은 하지만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인정은 하기 싫다는 것과도 연결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이 쓴, 발해 자체가 말갈의 나라가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는 취지에서 말갈 취급을 하여 비칭, 낮춤 비슷하게 부른 '발해말갈'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나온 게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신당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신당서』 144권 열전, 북적 발해 中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이 역시 유명한 사료입니다. 구당서의 그 사료와 마찬가지로, 신당서의 이 사료만 가지고 와서,

발해를 속말말갈이 세웠다느니, 발해는 말갈의 나라였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말이 왜 신빙성이 떨어지는지는 수많은 연구서적들과 동북아역사재단의 서적들, 그리고

제가 위에서 써왔던 것들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위와 동일.


-예종 선천연간(712~713)에 사신을 보내서 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에 배수하고, 총괄하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로 삼아 홀한주도독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처음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만 불렀다.



※그리고 혹자들 역시 이 사료에 있는, 이로부터 처음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라는 구절에 주목하여

발해가 말갈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에서 적어놓았듯이 당이 왜 고구려의

이미지를 지우려 노력했고, 그로 인해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 역시 당에서 말갈으로 취급을 일부러 한 것을 보면,


신당서가 후대에 당의 자료를 가지고 쓴 것을 고려하면, 당의 시선에서만 본 사료라고 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진짜 발해의 초기 국명이 말갈이었던 게 아니라, 당에서 앞서 말했다시피 발해를 이미 말갈로 취급을 하였고, 713년부터 발해로 국호를 지정한 것을, 저렇게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신당서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위와 동일(신당서 발해전)


-보응 원년(762)에 조서를 내려, 발해를 나라로 삼고(나라로 인정하고) 대흠무를 그 왕으로 삼았으며 검교태위로진봉(관작을 높임)하였다.



안사의 난때 발해가 안록산 측의 지원요청을 거부하여, 당에서 그 보답으로 발해군왕이었던 작위를 발해 국왕으로 올려주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료에 지금까지 당이 발해를 말갈로 불러온 이유가 조금 더 나옵니다.


이 사료로 파악을 해 보면, 762년 이전까지 당은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발해는 당나라에 적대국가였던 고구려의 직계후손인 만큼, 당 입장에서는 매우 경계하는 대상이자 잠재적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무왕 때인 732년~733년 사이에 전쟁을 하였으며 당이 체면을 구기기도 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발해를 말갈로 폄하하고, 발해왕의 작위를 발해 '군왕'에 머무르도록 하면서 발해를 당 입장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안사의 난때 발해가 당에 비수를 꽂지 않은 것을 표창하고 감사하는 의미에서 발해를 드디어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잠재적국에서 제외한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시점을 기점으로, 당이 발해를 말갈, 발해말갈이라고 칭하는 빈도는 상당히 많이 떨어져서, 정사인 구당, 신당서에는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부원구 조공표에는 816년까지 나옵니다.)


따라서 저는, 당이 발해를 말갈 취급하던 원인 중에는 아예 당이 762년 이전까지 발해를 정식국가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상당히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이 발해를 정식국가 취급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신당서 43권의 지(志) 편의 기미주 항목에도 나와 있습니다.



-당이 흥기한 초에 아직 사방의 오랑캐를 미처 돌볼 겨를이 없었다. 태종떄부터 돌궐을 평정하자, 서북 제번과 만이가 점차 내속하였다. 곧 그 부락을 펼쳐 주현을 설치하고, 큰 것은 도독부로 삼고 그 수령을 도독과 자사로 하여 모두 세습하게 하였다.(중략) 지금 불러 항복하여 설치한 목록을 적어 그 성세를 보인다.(중략)



흑수주 도독부[개원 14년(726년)에 설치함]]

발해도독부

안정도독부


이상 처음에 모두 영주도독에 예속되었다. (중략)



당이 기미 여러 주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새외의 곁이었다. 혹, 오랑캐의 부락에 붙인 이름들이었다.



한마디로, 당은 초반에 발해를 정식 국가 취급하지 않았으며, 고의로 오랑캐 취급을 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기미주로 생각하고 있던 여지가 이것으로 생깁니다. 발해 초대 왕 대조영을 앞서 말한듯이

홀한주 도독 직위를 주면서, 여기 써 있듯이, 발해를 발해도독부라고 여기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넘어가서, 『송사』 에서는, 발해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송사』 250권 열전 외국 7. 발해국 항목 中


-발해는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후략)



당나라의 자료를 가지고 쓴 구당,신당서와 다르게 쓰여 있습니다. 이것으로서 구당,신당서의 내용은,

당이 일방적으로 발해를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에 당이 망하면서 고구려-발해에 경계심이나 PTSD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왕조인 송이 들어서면서

굳이 발해를 말갈로 폄하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 그 이유로 추측됩니다.


참고로 금사 본기에는 당과 마찬가지로 발해를 속말말갈이라 쓰고 있지만, 금은 발해인도 포함된 나라이기도

했으며, 수가 꽤 되었던 발해인을 억누르고 다스릴 필요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의 고구려-발해 경계를 이어받을 필요가 없는, 송에서 쓴 자치통감 210권에도 해당 기사를 이렇게 써 놨습니다.




『자치통감』 210권 당기 26. 현종 개원원년 中


-처음에 고려가 이미 멸망하자, 그 별종인 대조영이 영주에 옮겨가 살았다..(후략)




마찬가지로 송의 『무경총요』 22권에서도,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라고 쓰여 있지 말갈 이야기는 들어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반면, 당나라 이후에 썼는데, 당의 자료를 대부분 참고하여 쓴 『오대회요』 라던지, 『문헌통고』, 『책부원구』에는 또 발해를 발해말갈(오대회요 30권, 책부원구 956권), 속말말갈(문헌통고 326권)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헌통고는 좀 웃긴 것이, 정작 발해는 속말말갈로 써 놨으면서 그 후계국인 정안국은 마한의 종족이라고 써 놨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당에서 발해를 말갈 취급하는 것 자체가 일관성과 그 기준이 아예 없이 제멋대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의 자료를 주로 쓴 사료들은 하나같이 모두 발해를 말갈로 써 놓고, 그렇지 않은 사료들은 발해를 말갈로 쓰지 않았다는 것은, 발해를 말갈취급하는 것은 오로지 당의 시선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책부원구를 잠시 살펴보자면, 제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책부원구』 956권 종족 中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라고 나와서 구당서를 그래도 복사 붙여넣기 한 수준이지만,




『책부원구』 959권 토풍 1 中


-진국은 본래 고려이다.(후략)



위와 동일, 967권 계습 2 中


-발해말갈 : 당 성력연간에 고려별종 대조영이 자립하여 진국왕이 되었다.




이렇게 발해 이전의 국호인 을 언급하면서 진이 본래 고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956권의 사료는 당의 자료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 생각하며, 959,967권은 당의 자료 영향을 덜

받은 사료구절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적하고 싶은,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칭할 때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책부원구 971권의 조공표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말갈이면 말갈이고, 발해면 발해고, 발해말갈이면 발해말갈인데, 이 책부원구 조공표에는 이 세가지가 뒤섞여서 혼잡하게 나옵니다. 셋을 다 일관성없이 혼용합니다. 그래서 발해가 진짜 말갈이 맞다면, 과연 이렇게 표현할 때 혼잡하게 혼용을 하는게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부터 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개원 13년(725) 정월, 발해가 대수령 오차지몽을 보내고...


라고 써 있는 사료가 있는데 바로 다음년도인 개원 14년(726)에는,


-11월, 발해말갈왕이 그 아들 대의신을 보내 내조하고...


로 바뀝니다. 그런데 또 웃긴 것은, 727년 10월에는,


-10월에 말갈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과 3년사이에 발해-발해말갈-말갈이 모두 나오는데, 이 셋은 모두 동일하게 발해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책부원구 조공표에 나오는 말갈들은 전부 흑수말갈/월희말갈과 같이 말갈이라는 글자 앞에

종족을 표기해서 나오는데,(흑수말갈,철리말갈과 같이.) 그런 것 없이 오로지 '말갈'로만 표기된 대상은 발해 뿐입니다. 그리고 책부원구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 나오는 말갈이 발해라는 증거는 하나 더 있습니다.




위와 동일(책부원구 971권 조공표)


-개원 18년(730) 정월, 말갈이 그 동생 대낭아를 보내 내조하고 원단을 축하했으며 방물을 바쳤다.




심지어 책부원구 조공표에는 한 년도에 발해를 각기 다른 명칭으로 혼용하여 부르는 사료까지 존재합니다.



-개원 25년(737) 정월, 발해말갈 대수령 목지몽이 내조하였다.

-개원 25년 4월, 발해가 그 신하 공백계를 보내 송골매를 바쳤다.



그리고 정황상 741년을 넘어가면, 발해를 말갈로 부르는 이런 기록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발해가 무왕 시절에 이어서 문왕 초기 시절에 말갈 대부분을 통합한 것이 그 결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다가...769,772,774,777년에도 발해말갈이라 칭한 기록이 나오고, 792년에는 다시 말갈이라고 발해를 칭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당이 발해를 말갈로 호칭하는 것은 책부원구 조공표에 나오는 816년의 사료로서 완전히 끝이 납니다.



-원화 11년(816) 3월, 발해말갈, 11월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후 발해는 어떤 중국사서를 보아도 말갈, 발해말갈로 칭해지지 않고, 발해, 발해국으로 칭해집니다.







이 글을 요약해 본다면,



1.당은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에게 엄청난 PTSD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 국호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등, '고구려 잊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2.그런데 자신들이 힘들여서 없앤 고구려가 30년만에 간판만 바꿔서 부활했다는 것에 당은

큰 스트레스를 느끼고 고구려의 직계인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말갈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3.하지만 당이 발해를 말갈로 취급하는 것에는 기준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의 그때그때

상태와 정치상황에 따라서 여러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했다.


4.그리고 당 이후에 나온 역사서들 다수는 발해를 지칭할 때 말갈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5.결국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부른 것은, 발해를 고구려 그 자체가 아니라 말갈로 폄하함으로서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인정하기 싫은 감정이 상당히 섞여 있다.


6.사료정황을 보았을 때 당은 진짜로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인 것을 몰랐거나, 혹은 발해가 진짜 말갈족의 나라라서

발해를 말갈이라 한 게 아니라,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알고도 자존심과 감정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말갈이라 하였다는 쪽이 더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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