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용감했다.
이 사건을 다루는 사료는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 구당서, 신당서, 책부원구, 자치통감, 문헌통고 정도만 보겠습니다.
발해를 세운 고왕 대조영(大祚榮)이 719년에 죽고, 이어서 무왕 대무예(大武藝)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영토를 넓히고 오랑캐들을 복속시킵니다.(정황상 말갈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대무예가 등극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자 동북지방 오랑캐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복속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으로 고쳤다. 황제는 왕위와 영토를 계승하라는 전책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726년경 흑수말갈의 사신이 당나라에 입조하는 일이 생기고, 당의 황제 현종은 흑수주를 그 땅에 세우고, 장사를 주어 총괄하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흑수말갈에 당의 기미주를 두어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발해의 조정은 말그대로 뒤집혀 버립니다.
무왕은 이를 두고, 처음에 흑수는 우리의 길을 빌어 당과 내왕했으며, 지난날 돌궐에 토둔을 청할떄에도 먼저 발해에 알렸으나, 이번에는 당에 관리를 청하면서 발해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협공하려는 수작이다. 라고 판단했습니다.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가 당에게 망한지 50년정도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과의 관계 역시 애매한데 등뒤에 있는 흑수말갈이 당의 기미주가 되었다는 것은 발해에게는 매우 중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이에 무왕은, 장인 임아(任雅)와 아우 대문예(大文藝)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하여, 비교적 만만한 흑수말갈을 칠 것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대문예는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흑수가 당에게 관리를 청했다 해서 우리가 흑수를 치면, 당과 한판 붙게 된다는 말입니다. 과거 고구려가 강성할 당시, 군사 30만으로 당과 싸웠지만, 결국 망한 것을 들고, 현재의 발해는 고구려 시절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들면서, 당과 싸우면 큰일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위와 동일(구당서 발해전) 中
-대문예는 일찍이 볼모로 장안에 가 있었으므로,(중략) 우리가 그를 친다면, 당나라를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당나라는 큰 나라이고, 군사는 우리의 1만배나 되, 그들과 원한을 맺으면 우리는 또한 망하고 말 것입니다.(후략)
실제로도 국력차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싸워서 폭격맞고 망한 나라는 꽤 많습니다.
동로마를 살살 열받게 하다가 결국 지워져 버린 1차 불가리아 제국이라던지, 몽골을 도발했다가 나라가 사라져버린 호라즘, 국력차가 명백한데도 오스만과 최후까지 싸우다 산화한 왈라키아라던지, 그 예는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매우 많습니다.
당은 동아시아 최강국이었으며, 수많은 병사와 수많은 재력, 수많은 명신들을 갖춘 세계 최고의 제국 중 하나였습니다.
이에 비해 발해는, 전조인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후 다시 세워져 이제 2대 왕이 자리에 앉은, 불안한 신생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발해 역시 대문예의 시선이 옳아 보였습니다. 아무리 전신인 고구려의 유산과 남은 세력을 모아서 나라를 빠르게 키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발해의 힘으로는 당에 정면승부하기에 역부족인건 사실입니다.
특히나 대문예는 당에 다녀와 본 사람이기 때문에, 당이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대문예는 고왕 시기에 볼모 겸 유학으로 당에 다녀 온 경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국의 상황과 당의 상황을 동시에 아는 인물로서 전쟁나면 큰일난다. 뭣된다. 하는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왕은 대문예의 간언을 듣지 않고 대문예와 임아를 흑수말갈을 치도록 보냅니다. 하지만 대문예는 나라가 걱정되었는지, 결국 국경까지 군사가 이르렀을적에 다시 형에게 글을 올립니다. 당과 전쟁을 하면 안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무왕은 크게 노하여 종형(사촌 or 근친으로 보입니다.) 대일하(大壹夏)를 대신 보내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여버리려 하였습니다. 이를 알게된 대문예는 잡혀가서 죽을지언정 달아나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나비효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대문예는 두려워 지름길로 해서 스스로 당나라에 귀부하여 오니, 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그와중에 흑수말갈 접경지에서 당까지 안들키고 달아난 대문예도 능력자는 능력자인 모양입니다.
그러자 대문예가 당나라까지 달아난 것을 확인한 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대문예의 죄를 폭로하고,
그를 죽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책부원구 권 1000 中
-대무예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표를 올려 대문예의 죄를 극구 말하고 그를 죽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현종 입장에서 이는 좋지 않은 선택지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나면, 우선 대문예는 당과 전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요구했던 친당파 인물이기 때문에, 당 입장에서 우대했으면 우대했지 굳이 죽일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발해의 계속된 성장과 확장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을 당 입장에서, 왕의 동생이 항복해 온다는 것은,
차후 발해 왕가의 계승문제에 있어서 카드패 하나를 쥘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무왕이 빨리 죽거나, 발해 왕실에서 내전이나 싸움이 터진다면 그때 '발해 창시자 고왕 대조영의 아들인 대문예'라는 존재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예 자신이 친당파이기 때문에 만약 대문예가 왕에 오르면 발해의 위협을 아예 없앨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들과 전쟁을 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달아난 대문예를, 당현종은 무왕의 부탁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환영하고 잘 보살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발해와 당나라의 진흙탕 싸움의 시작이 되어 버립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황제는 비밀리에 대문예를 안서로 보내놓고, 이어 대무예에게 답하기를 "대문예는 멀리서 찾아와 귀부했으므로 의리로 보아 죽이지 못한다. 지금 영남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미 떠나버렸다."라고 하면서 보내온 사신 마문궤, 총물아를 남겨두고 달리 사신을 보내 이 일을 알렸다.(후략)
하지만 발해의 정보력이 보통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당나라의 정보가 줄줄 새었는지, 무왕은 당현종이 뻥카를 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매우 당돌한 외교문서를 보내어 당현종을 비판합니다.
위와 동일.(구당서 발해말갈전)
-대국은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어찌 기만하는 도리가 있습니까? 지금 소문에 대문예가 영남에 있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앞서 청한대로 죽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국서를 받은 당현종과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완전히 뒤집히고 맙니다. 세계 최강국 중국이 고작 신생국 발해에게 황제가 직접 사기를 쳤다가 쪽팔리게 걸리고, 그 사기극에 대한 꾸짖음을 듣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당나라는 이 관계자인 홍려소경 이도수와 원복이 관리를 감독하지 못하고 기밀을 누설했다고 하여 그 둘을 근거도 없이 좌천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대문예를 진짜로 영남에 보내놓고 다시 무왕에게 국서를 보냅니다.
장곡강집 中, 현종이 발해왕 대무예에게 내린 칙서 中
-경이 형제지간에 서로 성내고 싸워 대문예가 곤궁하여 나에게 귀부했으니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중략)
경의 땅이 모름지기 바다의 한 모퉁이에 있으면서 항상 중국의 풍습을 익혔으나, 형제간의 우애는 어찌 익히고 가르치는 것을 기다리겠는가?(중략)
대문예가 비록 잘못을 했더라도 또한 그 뉘우치는 것을 용서해야 할 것이다. 경은 끝내 대문예를 잡아 동쪽으로 돌려보내라 요구하니 마치 멋대로 죽이려는것 같다. 짐은 효도와 우애를 천하에 가르쳤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차마 들어주겠는가?(중략) 경이 나라의 은혜는 알지 못하고 드디어 나의 덕을 배반하니 경이 믿는 것은 멀다는 것 뿐이고 다른 것은 없지 않는가? 짐은 근래 관용의 마음으로 더욱 중원을 보살폈다.
나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일이 또한 언젠가 있을 것이다. 경이 잘못을 뉘우치고 정성을 다한다면 전화위복이 될것이다. 말로는 따르는 듯하나 마음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 대문예를 죽인 뒤에 귀국하겠다고 청하니 무슨 말인가?(후략)
상당히 긴 글이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줄요약
1.니같으면 보내겠냐?
2.니 지금 나랑 멀리 있다고 까부냐?
3.내말 안들으면 뭔일 날지 모른다?
4.난 너 못믿는다.
보기 귀찮은 분들을 위한 한줄요약
-니 멀리 떨어져있다고 뵈는게 없냐? 내말 안들으면 후회할거다.
바로 저 위의 국서에서만 해도 떨떠름한 표현을 하면서 최대한 회피를 하려던 당나라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강경한 국서를 보낸 것에는,
무왕의 '세자'(다른글에서 아시다시피, 발해는 세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부왕이라는 칭호를 씁니다. 하지만 이때는 초기라서 제도가 완비되지 않았을수 있기 때문에 저게 맞을수도 있습니다.)로 기록된 대도리행(大都利行)의 죽음(728년)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는 인안 원년(720년)에 당에 파견된 이후로 당에 있으면서 벼슬을 받고 숙위로 머물면서 양국의 징검다리 역할을 열심히 한 인물입니다. 황제가 그의 죽음에 특진을 시키고 추증벼슬을 더하고, 직접 제사를 지내고 시신을 온전히 발해로 돌려보냈다는 데에서(발해국지 종신열전 제 1권 발췌.)암살의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며,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병으로 급사한게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당은 계속 열받게 하고, 원쑤같은 대문예를 죽였다는 소식은 안 오고, 거기다가 당에 보내놓은 금쪽같은 큰아들까지 죽어 시신으로 돌아오자 무왕은 더이상 국서를 보내지 않고 행동으로 화답합니다.
구당서 발해말갈 中
-(현종)20년에(732년) 대무예는 그의 장수 장문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위준을 공격하게 했다. 현종은 조서를 내려 대문예를 유주에 파견하여 군사를 징발하여 그를 치게 하고 대복원외경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의 남쪽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마침 산이 막히고 날씨가 추운데ㅔ다 눈이 한 길이 넘게 쌓였으므로 병사의 태반은 죽는 등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당서 발해전 中
-대무예가 대장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들을 거느리고 등주를 공격하니, 현종은 재빨리 대문예를 보내 유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치게 하는 한편 태복경 김사란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때마침 큰 추위를 만나 눈이 한 장이나 내려 군사들 가운데 얼어죽은 자가 반수를 넘어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책부원구 권 1000 中
-위들과 같지만 신라에 10만명을 징발하여 응접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라는 다른 구절이 존재합니다.
자치통감 213권 中
-역시 장문휴가 해적을 거느린 것으로 나오고, 등주를 노략한건 나오지만, 여기서는 황제가 우령군 갈복순(葛福順)에게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라고 합니다.
문헌통고 328권 中 사예고 3권 中 발해 항목
-장문휴가 해적을 거느린 것으로 나오고, 유주에 가서 병사를 징발하여 대응한 인물이 대문예로 나옵니다.
열받은 무왕은 이대로 잠수를 타나 했더니, 갑자기 732년에 해군을 동원하여 당나라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합니다.
신라와 당이 발해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것으로 보이며, 당의 수군기지였던 등주가 파괴되고 처참하게 노략당했다고 나옵니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 당 조정에서는 이후로도 상당히 많은 돈을 써야 했다고 합니다.
형제싸움에서 일어난 나비효과가 외교마찰을 떠나 드디어 전쟁까지 번져버린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 수록한 자료 중, 구당서, 책부원구는 해군을 동원했다 나오고, 신당서, 자치통감, 문헌통고는 해적을 동원했다고 나옵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 시기에 황해 쪽에 해적이 들끓는다는 기사가 딱히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먼저 쓴 구당서에서는 해군으로 썼다가, 나중에 쓴 신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자존심 문제 때문에 해적으로 바꿔 버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발해군이 순식간에 등주를 쓸어버리고 파괴할곳만 골라 파괴하고 일사불란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바탕으로 해적이 아니라 정규 해군이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현종은 재빨리 대문예를 파견하여 요격하게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을 겁니다. 이미 발해군은 튀어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이죠.
한편, 무왕은 괘씸한 동생놈을 가만 둘 수 없었는지, 이번에는 아예 자객을 중국 한복판 낙양까지 보내어 대문예를 암살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문예 자신이 직접 자객과 맞서 싸워 물리쳤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자객들은 현종의 명으로 하남에서 모두 잡혀 죽었습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대무예는 품은 원한을 풀지 못했으므로 가만히 동도(낙양)에 사람을 보내 자객의 손을 빌어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암살하게 했다. 대문예가 자객을 대적하여 싸웠기 때문에 죽음을 모면했다. 현종은 하남부에 조서를 내려 그 자객들을 모두 잡아 죽이게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해에서 당으로 갔던 무왕의 아우인 대낭아(大朗雅)는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시기 잘못 만나서 어처구니없이 형제들 싸움에 괘씸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영남(광저우 지방)까지 귀양을 가고 맙니다. 대낭아는 결국 마도산전투 이후에 돌궐이 해와 거란을 공격하자고 발해에 요청한 것을 발해가 당나라에 일러바친 사건으로 인해 당과 발해가 사이가 좀 나아지자 겨우 사면받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발해국지 1권 무왕 中
-당나라는 왕의 아우 대낭아 등을 영남에 귀양보냈다. 대성경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표문을 올려 잘못을 뉘우치니 현종은 조서로서 달랬다. 돌궐이 사신을 보내와서 함께 해와 거란을 공격하자고 청하였다. 왕이 사신을 붙잡아 보내려고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 청했으나 당나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당나라는 (후에)대낭아 등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 보냈다.
발해국지 7권 종신열전 1권 中
-당나라는 이에 들어온 조공사신을 영남에 귀양보냈는데, 대낭아가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장곡강집 2권 中
-근래에 사신이 이르렀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모두 알았다. 아울러 숙위 교체를 요청한 것은 이미 그대로 시행했다. 대낭아 등이 전에 국법을 어겨 남쪽 변경으로 쫓아 보냈는데, 역시 모두 죄를 용서하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경은 가히 짐의 자애심을 알아주기 바란다. (후략)
참고로 형제 싸움에 영문도 모르고 광저우까지 잡혀간 이분이 아마 발해 역사상 발해인으로서는 제일 먼 거리를 다녀온 분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오지에 속했던 광저우 지방인지라 더더욱 고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당현종은 뜬금없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발해 공격에 협조하게 합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을 직접 거론하여, 그가 군사를 이끌게 하여 발해를 치라고 구체적으로까지 요청을 합니다.
형제싸움이 이제 국제전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43권 열전 제 3. 김유신전 부록 손자 윤문.
-이에 대왕(성덕왕)은 윤중과 아우 윤문(允文) 등 네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다.
그래서 신라군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을 사령관으로 하여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발해의 남부를 공격하러 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라군은 별 소득 없이 추위에 병사만 날려먹고 돌아갑니다.
발해군에게 안걸려서 다행이지, 만약 발해군에게 걸렸다면 그 반수의 병력도 못건지고 지휘부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혹은, 발해군에게 대판 깨진 것을, 쓰기에 쪽팔려서 추위를 만나 피해를 봐서 퇴각했다고 둘러댔을 가능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진위 여부는 하늘만 아시겠지요.
한편,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한 당군은 거란, 해족과 연합한 발해에게 마도산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무왕이 직접 지휘한 발해군은 거란과 해족에게 얻어맞고 패색이 짙은 당군을 공격하고, 추격하려 했으나,
당군이 돌로 400리에 걸친 장성을 쌓아 항전하여 추격은 실패했습니다.
자치통감 中
-733년 윤월, 계유, 유주도부총관 곽영걸(郭英傑)이 도산(都山)에서 거란(契丹)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시절도사 설초옥(薛楚玉)을 보내 곽영걸의 정기(精騎) 1만 과 항복한 해족으로 거란을 습격하고자 유관(榆關) 밖에서 둔병하였다. 가돌우(可突于)가 돌궐의 무리를 인도하여 합전하니 해족이 양쪽을 지지하려다가 흩어져서 달아나 험준한 곳에 의지했다. 당나라 병사가 불리했고 곽영걸이 전사했다. 남은 6천여명은 멈추지 않고 힘을 다해 싸웠다. 거란이 곽영걸의 수급을 보여줬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니 모두 살해당했다.
신당서 북적열전 거란 中
-나수충(羅守忠)이 1만 기병과 해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도산(都山) 아래에서 싸웠다.
가돌우가 돌궐의 군대로 오니, 해(奚)가 두려워하여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오지의와 나수충이 패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전사하였으며, 당나라 병사 만여명을 죽였다.
신당서 열전 61 오승자 中
-발해국(渤海) 대무예(大武藝)와 그 형제 대문예(門藝)가 나라 안에서 다투고서 대문예가 들어왔다.
(733년에) 조서를 내려 태복경 김사란(金思蘭)에게 범양에서 발군하여 신라병 십만명과 발해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공적이 없었다. 대무예는 낙양의 대문예에게 자객을 보낸 후 병사를 이끌고 여러 성읍을 도살하면서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렀다. 오승자가 주요한 길목을 막으려 4백리에 걸쳐서 구덩이를 파고 큰 돌로 막으니 발해가 들어오지 못했다.
발해국기 1권 中
-또 군사를 유주로 보내 마도산에 이르니 당나라의 평로선봉 오승자가 막았다. 또 돌로써 그 귀로를 막아 군사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없게 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는 더이상 발해를 공격하기에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으며, 발해를 우습게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후로 발해에게 시비를 걸지 못하게 됩니다.
발해 역시 이번 전쟁에서 이기긴 이겼으나, 당과 이 이상 정면으로 맞서면 곤란해진다는 것, 그리고 당이 필요 이상으로 약화되면 돌궐과 거란이 커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은 더이상 싸우지 않고, 735년부터 무왕이 죽는 737년까지 다시 사신이 왕래함으로서 사실상 화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도산전투 이후에 무왕이 당나라에 대성경을 보냈을때,(위에 언급한 돌궐이 발해에게 해와 거란을 공격하자고 했던 사건을 당에 일러 바쳤을 때입니다.) 이미 당나라와 화해 하고 사이가 풀렸음에도, 이때도 역시 무왕은 대성경 편으로 대문예를 죽여달라는 황명을 요청하였지만, 현종은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고 서신으로 완곡하게 달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대낭아가 유배가 풀려 돌아가게 된 것도 이 직후입니다.)
장곡강집 中
-반역과 순종의 단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존망의 조짐도 알지 못하면서 나라를 보유할수 있다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경이 왕년에 덕을 배반하여 이미 화가 따랐으나, 근래 잘못을 뉘우쳐 신하의 절의를 잃지 않았고 (중략)..
또 근래 경의 표문을 보니 돌궐이 사신을 보내 양번을 치자. 라고 한다고 했다. 해와 거란은 지금 이미 내속했는데 돌궐이 사사로운 원한으로 이들 번국에 복수를 하고자 하니 경이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지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사신을 붙잡은 모양인데 의리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인정인데 하물며 임금의 도리를 행함에 있음이다.(후략)
위와 동일(장곡강집)
-경이 지난날 잘못을 계책하여 재앙을 당하게 되었지만, 도리를 잃은 것이 멀지 않아 의리를 듣고 능히 고쳤으니 얼마나 지혜로운가? 짐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접어두고 다만 정성만을 받아들인다. 경이 마음을 씻은 것을 밝혔으니 실로 그 마음을 위로한다.
마도산전투 직후에 돌궐에서 발해에 사신을 보냅니다.
그 내용은, 돌궐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 해와 거란을 같이 치자. 샌드위치로 만들자.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당나라와 이제 그만 싸워야겠다고 생각하던 무왕은 저놈들이 정신나간 망상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는지 돌궐의 사신을 붙잡아 버리고, 우리 잘했지? 하고 당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버립니다. (이걸 바로 대성경이 가서 알린 겁니다.)
이에 당현종은 얼마 전까지 미친듯이 서로 싸우던 무왕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에이 그래도 너네가 안했으면 그만이지, 그렇다고 사신을 생포하냐... 라고 달래 줍니다. 그리고 형제싸움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저 먼 남부지방까지 귀양가있던 대낭아를 풀어 줍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아직도 괘씸한 동생놈에게 미련이 남은 무왕은, 대성경 편으로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여달라 청했지만, 이미 당나라 관료로서 열심히 싸운 대문예를 죽이긴 뭣했던지, 현종은 무왕을 치켜 세우면서도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매우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 이후 다시는 이야기가 안나오고, 2년뒤에 무왕이 죽어서 그런지, 다시는 대문예가 언급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문예는 당에서 평생 살다 죽었는데, 시신은 발해로 돌아갔다는 설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북망산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로서 발해는 자신들을 호시탐탐 노리던 당에게 한방을 먹이고, 이후 화해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고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흑수말갈이 당의 휘하에 들어가는 일을 막아내서 많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당은 어쨌거나 발해에게 한 방 먹긴 했으나 발해와 화해함으로써 더 이상의 참화를 막고, 발해가
반당전선의 선봉장으로 서는 일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형제 다툼에서 시작된 전쟁은 이렇게 좋게좋게 마무리가 되었으나,
형제들 다툼에 영문도 모르고 저 먼 광저우까지 귀양갔다 온 대낭아가 이 사건의 최대의 피해자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의 요약
1.당과 흑수의 연합으로 인해 생긴 형제의 갈등
2.형제의 갈등은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3.당과 발해의 외교갈등을 만들었으며
4.당과 발해의 전쟁을 만들었다.
5.거기에 졸지에 신라까지 휘말려 들어갔고,
6.그와중에 무왕은 열받아서 중국 내지까지 자객을 침투시켜 들쑤셨으며,
7.당은 발해에게 2연벙을 당해서 큰코 깨지고 발해를 인정할수 밖에 없었고,
8.그와중에 형제싸움에 다른 형제가 뜬금없이 중국 남부까지 귀양을 갔으며,
9.현실적인 생각으로 모두가 해피엔딩이 되었어도 무왕은 대문예를 죽이고 싶어했다.
10.그로인해 당과 발해는 화해하고 대문예는 죽을때까지 발해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 소재는 개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면 좋을거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에서도 일어날법한 일이 고대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일어나고, 형제다툼이 동아시아 국제대전이 되고,
동생을 죽이기 위해 중국까지 자객을 파견한 무왕이나, 그 자객에 맞서 제압하여 살아남은 대문예도 그렇고,
형제가 동아시아를 소란스럽게 뒤집어버린 나비효과가 일어났다는 것도 재밌습니다.
그와중에 혼란의 도가니로 같이 들어간 당과 신라, 거란, 해족, 돌궐도 그렇지만, 이 혼란의 도가니를
강단있게 잘 헤쳐나가고 결국 당에 쓴맛을 보여주고, 발해를 무시하지 못하게 꺾어놓고 외교실리까지 챙긴 무왕은 기록은 비록 많지 않을지언정 한국사에서도 꽤 능력있는 군주로 꼽힐만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래서 현명하고 강단있는 지도자의 존재는 귀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가위기로 찾아온 형제싸움, 그리고 왕제의 적국 귀순이라는 엄청난 위기를 잘 헤쳐나가 오히려 자국의 국위선양과 성공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이끌어온 무왕의 능력은 칭송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나라가 아예 망해버린 고구려와 다르게 발해는 잘 헤쳐나가 생존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