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에 나오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중국, 일본사료를 중심으로

by 동방지희

고구려의 후예, 후손. 혹은 고구려의 후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논박과 의문, 질문 등은 많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고려가 고구려의 후신이다. 고구려의 이름을 이었으니 고려가 정통성 있는 고구려의 후계국이다. 고구려의 영역과 인구 중 신라에 넘어간 인구와 지역이 그대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았으며, 이들이 결국 고려를 열었으니 고구려의 직계국, 후계국은 고려이다. 발해는 말갈이 섞여있고 인구도 별로 없고 고구려 인구 다수는 황해도에 있었으니 그들이 연 고려가 고구려의 후신이다. 등등 고려가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큰 지분을 차지한 것으로 얘기한 잘못된 의견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사실, 발해던 고려던 둘 다 고구려의 계승국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발해는 고구려인들이 주축이 되어 대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고구려의 잔존세력을 합하여 만든 고구려 그 자체인 나라이며,

고려 역시 신라 치하에 들어가게 된 고구려인들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훗날 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훗날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인들 상당수 역시 고려로 향하여 합쳐 살았기 때문에 고려의 고구려 계승성이 폄하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발해와 고려 둘 다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계승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직접적 후신이 어떤 나라이냐고 질문을 살짝 바꾸어 보면, 저는 그 질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 수백년이 지나서야 세워진 고려보다는 발해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이유를 나열해 보자면,



1.발해는 고토에 남아있던 고구려인들과 대조영이 데리고 탈출한, 그 대조영 세력에 합류한 구 고구려인이 주축이 되서 그들에 의해 세워지고 확장되었습니다. 즉, 고구려인 그 자체들이 고구려 멸망 직후에 만든 나라라는 뜻입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250년 정도가 흘러서 세워진 고려에 비하면 시기가 더 빠릅니다.


2.발해의 문화는 고구려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국들의 일부 문화가 합쳐진 문화입니다. 고구려에 있던 문화는 발해에도 있었으며, 양국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모양의 문화양식과 풍습, 전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3.주변국들(중국,신라,일본)이 발해를 고구려 그 자체,혹은 고구려의 후신으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발해가 직접적인 고구려의 후신임을 알려주는 정황들을 사료에서 찾아서 소개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제가 사료 몇 가지를 임의적으로 찾은 것이라서 증거사료가 이 이상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다수 중국과 일본의 사료만 가져온 이유는, 한국의 관련 사료는 고려시대(정확히 말하면 삼국사기 이전) 이전에 스스로 쓴 역사서가 전부 유실되고, 이후에 쓴 역사서는 중국의 역사서를 참조하여 쓴 2차사료 위주이고, 이들은 중국의 사서와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제외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자체 사료는 밑에 보시면 나오는 동인지문사육에 나오는 표장들 뿐입니다.


이 사료들은 당대에 기록한 사료들로서,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후신임을, 혹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스스로 얘기하거나, 외국에서 칭하는 것을 가져와서 설명한 것입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중략)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으며 자못 문자가 있고 전적이 있다.


★이것은 구당서의 유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별종'이란, 고구려의 왕계가 아닌 다른 갈래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긴 하지만 고구려의 왕족과는 관계가 없는, 다른 갈래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주로 해석됩니다.(당이 그걸 알았는지 말았는지는 둘째치고, 대조영이 구왕족인 고씨와 관련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리고 고왕 시대의 발해를 말하는 사료에서, 발해의 풍속이 고구려와, 굳이 '거란'과 같다고 기록하여 둔 것을 보면(고구려와 그 후신인 발해에는 고구려인, 말갈인 외에도 다른 소수종족들도 일부 있었다고 합니다.) 당은 확실하게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고 있되, 인정은 최대한 하기 싫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예전 고구려가 강성할 때 군사 30만으로 당과 맞서 싸운 것은 영웅스럽고 굳세다 할 만 하지만, 당군이 한번 덮치자 땅을 쓸어간 듯이 멸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구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데 왕께서 당나라를 어기시면 아니되옵니다.


★이것은 2대 왕인 무왕 당시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왕의 동생인 대문예가 왕인 무왕에게 만류하면서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 고구려가 당과 맞서 싸웠던 것을, 지금의 발해에 대입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이자 전조인 고구려가 당에게 망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오대사』 74권 사이부록 中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했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중략) 고구려의 별종인 걸걸중상과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서 고구려의 옛터에서 각각 왕이 되었다.



『책부원구』 1000권 中


-발해국왕 대무예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그 아버지 대조영은 동쪽으로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서 진국왕으로 자립하였다. 대무예를 계루군왕으로 삼았다.




『오대회요』 30권 中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했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중략) 고구려 별종 대사리 걸걸중상과 말갈추장 걸사비우가 함께 도망하여 요동을 차지하고 고구려의 옛땅에서 각각 왕이 되었다.



『선화봉사 고려도경』 1권 中


-고종이 이적에게 그를(고구려를) 평정하라 명했다. 그 왕 고장을 사로잡고 그 땅을 나누어 군현을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세우고 군사로서 진수하게 하였다. 후에 무측천이 장수를 보내 그 임금 걸곤우(걸사비우)를 죽이고, 그 임금으로 걸중상(걸걸중상)을 세웠는데, 그도 병으로 죽고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40만의 무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계루에 웅거하고 당에 신속했다. 중종 때에 이곳에 홀한주를 설치하고 대조영을 도독 발해군왕으로 삼았는에 이후 발해라 불리웠다.



『송사』 491권 외국전 발해국 항목 中


-발해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중략) 고구려의 별종인 대조영이 달아나 요동을 차지했고 예종이 그를 홀한주도독 발해군왕으로 삼았다.



참고로 위의 사료 중 '책부원구'에서는 특이하게 아버지인 대조영 말고 무왕을 '고구려의 별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별종이라는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위에서 써 놨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왕을 '계루군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발해의 왕위 계승자에게 고구려를 연상할 수 있는, 과거의 고구려 왕을 배출하던 집단인 계루부의 이름을 딴 것이므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어느정도 묵인하고 달래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무경총요』 전집 16권 中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예맥의 땅이며 나라의 서쪽은 선비와 접하며 땅은 사방 3천리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다스렸다.(중략) 고구려의 땅을 나누어 왕이 되었다.


★여기서는 발해를 부여의 별종이라 보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부여->고구려로 생각했듯이, 발해에게 부여의 별종이라고 한 것은, 부여의 뒤를 이은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의미로 썼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문헌통고』 327권 中 사예고 4, 정안국 항목 中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족으로, 거란에 격파되었다. 그 추장이 나머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경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자칭 정안국이라 했다.




『송사』 491권 외국전 정안국 中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족인데 거란에 격파되어 그의 추수가 무리를 규합하여 서쪽 변경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스스로 정안국이라 불렀다.




『송사』 491권 中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신은 본래 고구려 옛땅 발해의 남은 무리로....(후략)




위와 동일, 송 태종이 오현명에게 회답한 글



-경은 먼 나라의 호걸로서 왕으로 이름하고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문득 마한의 땅을 소유하고 경해의 가에 있어 강한 적들이 병합하여 그 옛땅을 잃었다.


★여기는 발해의 후계국 중 하나인 정안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문헌통고에 나온 '마한'이라는 표현은 예로부터 고구려 혹은 한민족계열 국가를 아울러 통칭하던 단어 중 하나로서, 고구려를 주로 이렇게 표현하였지만, 꼭 고구려만을 마한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를 부르던 단어 중 하나인 마한을 발해의 후계국에게 붙였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의 후계국인 정안국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 전신인 발해 역시 고구려의 후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송사에 나와 있는 정안국왕 오현명의 표에도 자신을 고구려 옛땅 발해의 남은 무리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 역시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 아래에 나오는 송태종의 글 역시 동일합니다.




『송회요』 293권 中


-발해는 고구려의 별종이다. 법도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고 복장에도 자비, 천비, 녹 및 아홀, 금은어의 제도가 있으며 나머지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비슷했다.(후략)


★여기서는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별종이라는 의미는, 위에서 말했듯이, 해당 국가의 왕계가 아닌 다른 족원 출신을 의미합니다.




『삼국사기』 37권 中


-발해국의 남해부, 압록부, 부여부, 책성부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땅이다.


★여기는 굳이 삼국사기 말고도 다른 중국사서에서 먼저 나온 항목이지만, 굳이 삼국사기로 표기해 놨습니다.

고구려의 옛땅을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존재합니다.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제 1권 사대표장(事大表狀), '신라왕이 당의 강서대부 고상에게 보내는 장' 中


-옛날 정관(貞觀) 연간에 태종 문황제(太宗 文皇帝)께서 수조(手詔)를 내려 천하에 보이시기를,

“지금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를 순행(巡幸)하여 요동(遼東)과 갈석(碣石)의 죄를 물으려 한다.”

라고 하시었습니다. 이는 대개 고구려(高句麗)의 사나운 습속이 기강을 범하고 강상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하늘의 주벌(誅伐)을 떨쳐 바닷가를 숙청하였는데, 일단 무공이 세워지자 문덕을 닦았으며, 이에 먼 곳의 사람들도 공사(貢士)를 따르도록 허락하였으므로, 요시(遼豕)를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앵(遷鸎)을 뒤따라갈 기약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고구려는 지금 발해(渤海)가 되었는데, 비로소 근년에 들어와서는 계속해서 고과(高科)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선(善)을 사모하는 외방의 정성을 수록하고, 사심이 없는 큰 나라의 교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비록 닭을 천하게 여기고 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혹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위와 동일, 예부상서 배찬에게 보내는 장 中


-옛날에 고구려(高句麗)가 나라를 지키고 있었을 때에 험준함을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군주를 살해하고 백성을 학대하여 천명을 거역하자, 태종 문황제(太宗 文皇帝)께서 불같이 크게 노기를 떨치시고 준동하는 여러 흉악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육군(六軍)을 친히 거느리고 멀리 만 리를 순행하시어 공경히 천벌(天罰)을 수행하시고 바다 한구석을 깨끗이 청소하시었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미친 듯 날뛰던 기세가 사라졌으나 그 잔당들이 불에 탄 나머지들을 거두어 모아 따로 고을을 만들 것을 모의하고는 갑자기 나라 이름을 도둑질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의 고구려요, 지금의 발해(渤海)임을 알 수 있나이다.



『삼국사기』 46권 열전 제 6권, 최치원 中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려·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어서 남쪽으로 오·월을 침략하였고, 북쪽으로 유주 지역의 연·제·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큰 해가 되었습니다. 수 황제가 통제를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정관 연간에 우리 당 태종황제께서 친히 6군을 통솔하고 바다를 건너 천벌을 집행하였습니다. 고려가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쪽 지방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는 데 도움을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려와 백제가 이전에 하던 악행을 계속하자 무열왕이 입조하여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중략) 총장 원년(668)에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고 안동도독부를 두었습니다.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고구려인〕을 하남과 농우 지방으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유민들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가지는 쓴 사람이 완전히 동일하므로(최치원) 함께 묶었습니다. (삼국사기의 항목은 최치원이 보낸 글을 삼국사기에서 소개하면서 써 놓은 것입니다.) 신라인이며 발해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지 않고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최치원의 글에서도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이며, 고구려의 후신임이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고구려를 폄하하고 발해를 폄하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으며, 발해를 굳이 고구려의 '잔당'들이 만든 나라라고 하지만, 발해가 고구려에서 나온 것이며, 고구려의 후신임을 당대의 인물인(발해가 아직 멸망하기 이전)최치원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한 사료입니다.





『속일본기』 10권 中


-12월 정해일에 발해군왕의 사신인 고재덕 등 8인이 서울에 들어왔다. 병신일에 사신을 보내 고재덕에게 의복, 관, 신발을 하사했다. 발해국이란 예전의 고려국이다. 담해조정 천지 7년 겨울 10월, 당의 장수 이적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멸망시킨 이후 조공이 오랫동안 끊어졌었다. 이에 발해군왕이 영워장군 고인의 등 24명을 조공하러 보냈는데 하이(아이누)의 경내에 도착하여 고인의 등 이하 16인은 모두 살해되고 수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왔다.




『일본일사』 제 7권 中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땅이다.(중략) 고씨 이래로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이 두가지 사료는 일본측의 사료입니다


여기서도 발해가 예전의 고(구)려라는 것을 드러내며, 일본일사의 기록 역시 발해가 예전 고구려라는 것을 얘기하고, '고씨' 이래로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마치 같은 국가의 다른 왕조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일본측이 왜 조공이라고 이야기했는지 아실 분은 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2권 中


-이 명절은 여러 나라에 없고 오직 신라국에만 있다. 노승들이 말하길 "신라국이 과거 발해와 싸워서 이 날에 승리를 얻었다. 그래서 명절로 삼아 노래하고 즐겁게 춤을 추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중략) 발해가 신라의 토벌을 당했을 때 겨우 1천여명이 북쪽으로 도망쳤다가 그 후에 돌아와 예전의 나라를 (다시) 세웠는데 지금 발해국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했다.




『속일본기』 10권 中


-대무예는 부끄럽게도 여러 나라를 담당하고 여러 번국을 아우르면서 고구려의 옛 터전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었습니다.


★여기 나온 무왕의 친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왕이 고구려의 옛 터전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었다는 것은, 부여-고구려-발해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와 동일, 32권 中


-옛 고구려 전성기에 그 왕 고씨는 조상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가깝기는 형제 같았고 의리로는 군신 같아 바다를 건너 산을 넘어 조공을 계속하였습니다. 말기에 이르러 고씨가 망하고 그때부터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이에 신구 4년(727) 왕의 선고인 좌금오위대장군 발해군왕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면서부터 비로소 직공을 닦았습니다. (중략) 왕은 유풍을 이어받아 전왕의 기업을 계승하고 정성을 바쳐 조공하여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보내온 서한을 보니 갑자기 글의 도리를 고쳐 날자 아래 관품과 성명을 밝히지 않고 서한 끝머리에 헛되게 천손이라는 참칭을 적었습니다. (중략) 지난 날 고씨 시대에는 병란이 그치지 아니하여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해 형제로 칭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대씨는 일찍이 아무런 연유도 없이 함부로 외숙과 생질로 칭하니 예의를 벗어났습니다.




『일본일사』 7권 中


-발해국은 큰 바다를 사이 두고서 대대로 지금까지 빙문의 예를 닦았습니다. 지난 날 고씨가 기업을 이을 때에도 교화를 사모할 때마다 서로 찾았으며, 지금 대씨의 집안이 기업을 회복하고서도 또한 바람을 따라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교화를 사모하는 것은 고씨의 발자취를 따르겠습니다.




★이 사료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발해의 전조인 고구려의 왕성인 '고씨'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를 보면, 마치 '고씨'가 현 왕조인 '대씨'의 전 왕조인 것처럼 써 놓았습니다. 고씨의 시대가 한번 망한 후, 대씨가 그 나라를 회복하여 같은 국가를 다른 왕조로 회복한 것처럼 느낌이 듭니다. 주목할 것은, 속일본기의 사료에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천손사상과 동일한 단어이고 동일한 뜻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것을 참칭이라 하면서 매우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는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뒷날에 발해와 일본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쓸 때 한번 언급해 보겠습니다.